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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8). 불의한 지도자를 만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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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8). 불의한 지도자를 만날 때

시편 58:1-11, 누가복음 18:1-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0-03-04

말씀내용
세상은 늘 지도자의 위기를 겪습니다. 비단 정치의 영역만이 아닙니다. 경제 영역에서나 기업조직에서도 그렇고 작게는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우리는 지도자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복입니다. 좋은 대통령, 좋은 회장, 좋은 아버지, 좋은 목사 등등 말입니다. 물론 모두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지도자는 없습니다. 또, ‘좋다’는 말의 모호함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다룰 주제는 불의한 지도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에는 그의 능력면에서의 면모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악한 자이고 정의의 가치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상이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역사를 살짝 훑어보아도 불의하고 악한 지도자들을 열거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지 모릅니다. 이런 지도자를 만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 58편은 그 구체적 지침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가 근본적으로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시편 58편은 저주시에 속합니다. 6-9절은 그 불의한 지도자에 대한 저주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는 1980년 예식서(the Service Book)에서 교인들이 예배 때 이 시편을 읽지 않도록 제외시킨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Wilcock, M. (2001). The Message of Psalms: Songs for the People of God. (J. A. Motyer, Ed.) (Vol. 1, pp. 208–209). Nottingham, England: Inter-Varsity Press.). 소위 ‘혐오시’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불의한 지도자로 인한 고통을 겪었던 적이 없었을까요? 저는 이 본문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얼마나 위로하시는지를 경험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이 시편을 예수님을 재판한 산헤드린 공회에게 적용하였다는 것만 보더라도, 이 말씀의 효용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991년 하버드대학교 비지니스스쿨에서 미국 감옥 선교회(Prison Fellowship Ministry)를 창립한 척 콜슨(Charles Colson, 1931-2012)이 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연설에서, 1990년 미국 고위공직자들이 연간 1150건의 기소를 당함으로써 최고 기록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도자들의 도덕성의 위기를 설파했습니다. 물론 그의 연설에 대한 반응은 인상적으로 시큰둥했다고 전해집니다. 기독교 국가는 아니었어도, 기독교와 성경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태생을 가진 미국이기에, 전통적으로 지도자에게는 도덕성이 요구되어 왔습니다. 현대 미국사에서 그 현상이 무너진 계기는, 케네디 대통령 때인 60년대 초로 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제 미국은 정치 지도자를 포함하여 각계 지도자에게 더 이상 도덕성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990년의 고위 공직자 기소 건수의 기록은 이후 계속 경신되어 왔을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 지도자들과 관련된 추문들은 그치질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는 불의한 지도자는 단지 이런 개인적 추문을 가진 사람들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음으로써 그 주어진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물고 삼키고 해치는 일들이 일어나기에, 그런 악한 자들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개인과 공인 사이의 도덕성의 문제를 구분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우울한 이야기입니다. 기회가 없어서 죄를 짓지 못하는 것이지 기회만 주어지면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입니다. 그 기회는 다름 아닌 돈, 권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스 태너(Beth Tanner)는 그녀의 시편주석(NICOT)에서 “58편은 너무 타락하여 정의로 돌아갈 곳이 없는 인간 체제의 실상을 반영하는 시편”이라고 하면서, “인내심과 사랑이 많은 사람들조차도 무자비와 배반이 그들이 보는 전부일 때 폭력적 소망을 표현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필요합니다. 이 시편은 우리를 폭력적이고 사나운 성질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시편의 구조를 보면, 1-5절은 불의한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이고 6-9절은 정의를 구하는 기도이며, 10-11절은 그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하는 선언을 보여줍니다.


1. 불의한 지도자들을 향한 비난 (1-5; 51:5; 마 3:7; 23:33; 12:34)
먼저 불의한 지도자를 비난하는데 1-2절은 비난 그 자체이고 3-5절은 그 불의한 지도자들의 실상을 묘사하면서 비난의 이유를 말합니다.
1절은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원문에는 ‘통치자들아’라는 말이 없고, 대신 ‘잠잠하다’를 뜻하는 ‘엘렘’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나오는데, 이 말의 해석 여하에 따라 약간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전체 맥락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통치자들과 인자들은 같은 말입니다. 그들은 정의를 말해야 하고 올바르게 판결을 내려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2절에서 말하듯이,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손으로는 폭력을 달아 줍니다. 그들의 마음과 손은 합작하여 악과 폭력을 이룹니다. 그들은 어쩌다 실수로 악을 행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닙니다. 악과 폭력은 그들 중심에 있는 전부입니다.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주는도다’라는 말은 [우리말성경]이 뉘앙스를 살려 “너희 손은 땅에서 폭력의 수위를 가늠하고 있구나.”라고 번역을 잘 했습니다. 불의하고 악한 지도자들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폭력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지, 선과 악 사이의 결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3-5절에서는 그 악한 지도자들—악인—의 실상을 묘사함으로써, 다윗은 왜 그들을 비난하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먼저 3절에서,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멀어졌다’는 말은 ‘삐딱하게 나아갔다, 결길로 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곁길로 나아갔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하는 셈인데, 이게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면 모태에서부터, 그리고 나면서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권력을 잡은 다음부터 변한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거짓말은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 본래 거짓말장이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원죄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 악한 지도자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참회시인 51편에서 한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편 51:5).” 무엇이 다릅니까? 다윗과 악한 지도자들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질, 종류의 차이가 아닙니다. 살면서 행사한 악과 폭력의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보통 악한 지도자를 비판할 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4-5절에서 다윗은 악인들의 실상을 뱀, 독사에 비유합니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여기서 독사는 특별히 치명적인 살무사나 코브라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치명적인 독을 뿜습니다. 그들에게 물리면 죽습니다. 그들은 ‘귀머거리 독사’같아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통제 불능입니다.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입니다. 여러분은 인도에서 바구니에 코브라를 담고 앉아 피리를 불면 코브라가 나와서 춤을 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영상으로나 직접 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사실, 뱀은 귀가 없어서 듣지를 못합니다. 소리를 감지하더라도 피부와 혀로 진동을 감지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코브라가 술사의 홀리는 피리소리에 반응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피리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고 춤추는 것이 아니라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이런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다윗의 비유가 악한 지도자들, 죄인의 패역한 모습에 대한 비유로서 너무나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의 말은 커녕, 참모나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통제 불능의 작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입에서는 치명적인 독을 뿜어댑니다. 얼마나 위험하고 악한 존재들이겠습니까? 이런 자들이 지도자의 자리에 있으면 백성이 곤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다윗이 이 시편을 사울 왕을 생각하고 쓴 것이라면 적절한 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이 좀 심한 것일까요?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려고 자기에게 나아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서 무어라 말했습니까?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태복음 3:7).” 또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복음 23:33).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태복음 12:34).” 다윗의 이 묘사는 정도를 벗어난 욕이나 비난이 아닌 것입니다.


2.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간구함 (6-9; 눅 18:7)
우리는 이런 악하고 불의한 지도자들을 비난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 전부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거리에라도 나가서 행동을 해야할까요?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6-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들을 읽어본다면 과연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6절은 그들의 이를 꺾되, 젊은 사자의 송곳니([개역개정]의 ‘어금니’보다 정확한 의미)를 꺾으시듯 꺾어달라고 기도합니다. 무서운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려면, 그 지도자가 폭군이나 독재자로서 ‘명백하게’ 백성을 위협하거나 신앙적 평안을 깨뜨리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신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기도의 포인트는 악한 지도자들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 없도록 그 능력을 제거해 달라는 것입니다. 송곳니가 부러지거나 뽑히면 사자의 힘이 약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가진 권력을 그들로부터 제거하여 더 이상 행악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7절 하반절에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라는 기도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화살이 목표물에 도달할 수 없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들이 심중에 계획하는 악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말입니다.
7절 상반절에서는,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악한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막을 수 없는 거센 급류라고 여기겠지만, 다윗은 그 물줄기가 나뉘고 나뉘어 사라지는 물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이 계획한 바가 이루어질 수 없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8절로 가면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여기에는 두 개의 비유가 있습니다. 민달팽이가 해 아래서 끈끈한 액체를 묻히면서 기어가다가 죽는 모습, 만삭 되지 못해 태어난 미숙아가 죽는 모습입니다. 요즘 같으면 미숙아라도 웬만하면 다 살릴 수 있는 의료적 기술이 있지만, 다윗의 시대에는 미숙아가 살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악하고 불의한 지도자들이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만행이 멈추어 지도록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9절에서 다윗의 기도는 불붙은 가시나무가 바람에 불려 날아감으로써 가마를 달구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의 일생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날아가는 인생이 되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가시나무가 그 악하고 불의한 지도자들이라면, 가마는 백성을 의미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렇게 기도를 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다고 생각되십니까? 이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영국 성공회가 피해가려고 했을 만큼, 기독교인이 이런 기도를 드려도 되나 싶은 내용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리처드 필립스는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시편 58편과 같은 저주 기도를 그냥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악한 지도자들을 향하여 동일하게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Phillips, R. D. (2019). Psalms 42–72.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 171).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불의하고 악한 지도자를 만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도 이점을 강조하여 기도를 가르친 적이 있으십니다. 누가복음 18:1-8에 기록된 소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신 것이 그것입니다. 이 비유에는 어떤 도시에 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등장합니다. 시편 58편이 묘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수로 인해 원한이 맺힌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 재판관에게 나아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가 들어줄 리 만무입니다. 하지만 과부의 간청이 너무 번거로워서 결국 들어줍니다. 주님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누가복음 18:7).”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 데이빗 웰즈(David Wells)는 말합니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최고 법정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불의한 자들, 불의한 세상을 고소하는 일이다.” 시편 58편에서 다윗이 하고 있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이것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여 두셨습니다.


3. 악인들의 심판과 의인의 기쁨 (10-11; 시 68:23)
10-11절에서 다윗은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10절입니다. “의인이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좋은 소식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뻐합니다.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라는 표현은 고대 근동문학에서 전쟁터의 승리를 당당하게 알리는 보고서에 쓰이던 과장법적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은 시편 68:23에도 나옵니다. “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시편 68:23).”
11절은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을 보여줍니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
악하고 불의한 지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정의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인정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의인들에게는 보상이고 위로입니다. ‘의인에게는 갚음이 있고’라는 말은 보상이 주어질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11절은 시편 58편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다윗의 간구가 단지 개인적 앙갚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기도였다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베스 태너의 말입니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참된 해결책은 10절과 10절의 오싹한 이미지가 아니라, 11절에 놓여 있다. 참된 해결책이란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시는 세상, 혹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왕이요 재판장이요 만물의 통치자가 되시므로, 1절의 상황과 정반대로 정의가 공정하게 집행되는 세상이다. ‘의인의 상급’이 ‘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는’ 데 있지 않고, 의로운 삶의 방식의 ‘열매’(갚음)라는 것을 모든 이가 알게 되는 세상 말이다.”
즉, 구약의 다윗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간구가 시편 58편처럼, 불의하고 악한 지도자들, 통치자들을 하나님께 고소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4. 적용과 교훈
이 세상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온전하게 실현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치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거나 조직의 리더가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완전한 정의를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세상에 사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나 불의하고 악한 통치자들이과의 차이는 본질에 있지 않고 정도에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현실주의자가 되게 합니다. 하지만, 이상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나라입니다. 성도는 비록 이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정의를 드러내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의롭게 살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보상과 열매를 다 누리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갚음, 보상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먼저 오늘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 지도자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그는 정치 지도자일 수 있고 어떤 기업이나 조직 혹은 영역의 지도자일 수 있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죄성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죄인에게 주어진 권력은 위험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기 전에 자기 영혼에 위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지도자는 이것을 명심하고 주어진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지도자는 자신도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행동하고 권위를 행사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판사라면 지금은 내가 누군가를 심판하고 있지만, 내가 언젠가 최고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목사와 교인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히 13:17; 고후 1:14). 언제나 그리스도인은 그 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지도자로서 이 말씀을 읽기 보다, 보통 사람으로서 이 말씀을 읽기가 쉽습니다. 불의하고 악한 지도자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일이 적잖이 발생합니다. 이 경우,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명백하고도 기본적인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성경은 모든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롬 13:1-7). 다윗은 비록 이 무서운 기도로 하나님께 기도했을지라도, 사울에게 기름부어 왕을 세우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스스로 사울의 목숨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시편 58편의 기도는 권위를 무시하고 전복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악하고 불의한 지도자 아래 있을 때, 그것이 국가, 회사나 조직, 또는 가정이나 교회, 무엇이든지, 우리의 항의는 언제나 기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6-9절에서 다윗이 드린 기도는 결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는 하늘의 재판장께 소송장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믹담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믹담’은 돌판이나 철판에 새긴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믹담 시는 모두 여섯 편인데, 16편과 56-60편입니다. 믹담 시의 공통점은 16편과 56-59편은 모두 사울에게 쫓길 때 쓴 시들이라는 점이고, 60편만 아람과 에돔과의 전투 상황에서 쓴 시입니다. 그래서 믹담 시에는 위기의식이 있습니다. 다수의 믹담 시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특히 굴에 숨어 있을 때 쓴 시라는 점에 착안하여 제임스 보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편의 싯구들이 실제로 아둘람 굴의 암벽에 새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씀들이 여러분의 가슴에는 새겨지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근거하여 의인에게는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사실을 확신하십시오(Boice, J. M. (2005). Psalms 42–106: An Expositional Commentary (p. 486). Grand Rapids, MI: Baker Books.).”
불의하고 악한 지도자를 만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시편 58편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유일하고 참되며 완전히 의로우시고 무한히 선하시고 전능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롬 8:32)”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의인에게는 갚음이 있다는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우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