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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4). 언어적 압박과 음해를 당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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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4). 언어적 압박과 음해를 당할 때

시편 64:1-1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0-06-03

말씀내용
살다 보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중 하나는 언어적 압박과 음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비록 칼과 창이나 화살은 아니지만, 말로 하는 음해는 그에 못지 않게 혹은 그보다 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음해의 사전적 정의는 “몸을 드러내지 아니한 채 음흉한 방법으로 남에게 해를 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로 가하는 압박은 심지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누구를 통해서 전파되었는지 조차 정확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습니다. 본문은 이런 상황에서 드려진 다윗의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정처럼 보이는 은신처에서 예상치 못한 화살이 쌩하고 지나간다.” 친구 인줄 알았는데, 무서운 화살이 그로부터 나를 향해 날아옵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어느 누구 하나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친구와 적을 구분할 수가 없고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결국 철저하게 고립됩니다. 이런 일이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이 이 경험 속에 빠지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기도를 시편에 기록하게 한 것도, 이런 상황 속에 빠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일 것입니다.
대중에게 알려진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이런 일을 겪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어디서 시작되었든지 간에 언론이 날마다 지치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쏟아냅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이야기는 삽시간에 온 세상에 퍼지게 됩니다. 대중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이야기들을 믿기 시작합니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선한 역할이 아니라 나쁜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십계명을 통하여 말씀합니다(출 20:16). 이 계명은 말로 사람을 죽이는 일의 무서움을 경고함과 동시에 그것을 금하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일을 당할지 언정, 그런 자리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본문은, 성도가 이런 일에 가담하지 말라는 적극적 명령은 아니지만, 성도는 이런 악한 일을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런 일들이 인터넷 댓글이나 SNS를 통해서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는 오늘날의 상황을 생각할 때, 이점을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이제 본문을 살펴볼텐데, 본문은 성도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될 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기록하고 있고, 성도가 이때 어떤 믿음을 견지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 본문의 구성과 주제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1-6절은 다윗을 음해하는 원수들의 공격을 묘사하고 있고 이 공격으로부터 구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1-2절은 기도이고, 3-6절은 원수들에 대한 묘사입니다. 두번째 부분은 7-10절인데, ‘그러나’로 시작하는 7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윗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공격이 원수들을 향하여 급격히 임하게 되고 원수들의 악한 계교는 자신들에게 임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 일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피하여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용은 단순하지만 사실 이 모든 상황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다윗 자신에게나 이런 일을 겪는 사람들 자신에게 이것은 결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2. 긴박하고 절박한 간구(1-2; 롬 12:19)
본문은 다윗의 간구로 시작합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시편 64:1–2).”
여기 ‘들으시고..보존하소서..숨겨 주시고..감추어 주소서’라는 짧막한 명령형 간구들은 상황의 긴박성을 잘 보여줍니다. 이것들은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기도입니다.
먼저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라고 기도하는데, ‘근심하는 소리’는 단순한 불평이나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징징거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어 성경들은 이것을 complaint 이라고 번역을 했지만(ESV,NIV, NLT, NASB), 개역개정역의 ‘근심하는 소리’는 뉘앙스를 잘 살려주는 번역입니다. 하지만, 아직 다윗이 근심하는 이유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들으시고’라는 말은 우리 말에서도 그렇듯이, 단순히 귀로 들어달라는 뜻만이 아닙니다. 반응하시고 응답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라고 간구하는데, 여기서 다윗이 근심하는 이유가 좀 더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원수들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원수들을 두려워하고 있고 이 두려움에서 자기 생명을 보존해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보존해 달라’는 기도는 원수들이 자기에게 무슨 짓을 하든지 그 일들이 자기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마음의 평강도 잃어버리게 되길 원치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다윗이 이미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마음의 평강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절에서 다윗은 ‘숨겨 주시고’라고 간구합니다. 개역개정역에는 ‘숨겨 주시고’와 ‘감추어 주소서’가 나오지만, 본래 ‘숨겨 주시고’라는 하나의 간구이고,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로부터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으로부터 숨겨 달라는 것입니다. 1절에서 다윗은 ‘원수의 두려움에서’ 보존해달라고 구할 때, 원수를 단수로 언급했는데, 2절에는 ‘악을 꾀하는 자들’과 ‘악을 행하는 자들’로 그 원수들이 복수로 언급됩니다. 누군가 이 일을 시작한 원수는 있었겠지만, 그 일에 참여하여 함께 악을 꾀하고 행하는 자들은 많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로 하는 언어적 압박과 음해의 무서운 점입니다. 누가 친구이고 누가 원수인지 모릅니다. 하나 정도는 지목할 수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가 나를 찾아낼 수 없도록 숨겨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음모는 음모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폭력과 소란과 소동을 일으킵니다. 성경은 말로 누군가를 근거없이 공격하는 일을 ‘악을 꾀하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악행이라고 단정합니다.
다윗이 지금 드리는 간구는 사실 로마서 12:19의 말씀을 따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 12:19).”
악에는 악으로 갚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윗이 자기의 생명을 취하려고 지치지 않고 추격하는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준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견지하는 태도였고, 이 간구에서도 그 태도는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다윗의 이 기도는 단순한 불평이나 근심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법정에 고소장을 제출하는 것입니다. 그 고소장의 내용이 이어지는 3-6절입니다.


3. 고소장 (3-6; 엡 6:16; 약 3:8)
먼저, 3-4절은 대적들이 몰래 숨어서 갑자기 공격을 해대는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시편 64:3–4).”
이제 다윗이 두려워하는 원수의 행위가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언어적 압박과 음해였습니다. 그들은 혀를 칼 처럼 연마하여 다윗을 향하여 휘둘렀고, 독한 말을 화살처럼 다윗을 향하여 쏘아 댔습니다.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라는 말은 가장 큰 해를 입히기 위해 말을 정교하게 다듬고 준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라고 할 때, 겨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표적을 향하여 활 시위를 당긴 모습을 묘사합니다. 바울 사도는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라고 성도들을 향한 마귀의 공격을 불화살에 비유했는데(엡 6:16), 이것이 꼭 말의 공격만을 의미하지 않지만, 말의 공격은 실로 불화살, 독화살 처럼 무서운 것임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독한 말’의 화살에 맞아 죽었을까요? 야고보서 기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야고보서 3:8).” 그러므로, 성도는 얼마나 이 혀를 잘 사용해야하겠습니까? 죽이는 독이 가득한 혀가 아니라, 살리는 복음의 말씀이 흘러나오는 혀가 되도록 혀를 연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대적들의 공격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숨은 곳에서’라는 말은 매복하는 악인들의 습성을 보여줍니다. 친구인 척 하지만 결국 말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려 듭니다. 숨은 곳에서 화살이 날아와 온전한 자를 쏩니다. 대적들의 공격의 또 하나의 속성은 ‘갑자기’ 쏜다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방심하는 순간에 그들은 화살을 쏩니다. 그렇게 그들은 온전한 자, 무죄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쏘아 댑니다. 그렇게 하고도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다윗은 이 기도를 드릴 때, 자기 아들 압살롬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수년 동안 음모를 꾸미면서, 혀를 칼 같이 연마하고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있다가 숨은 곳에서 갑자기 화살을 쏘았던 압살롬을 말입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그 안에서 다윗은 모든 악인들의 특성을 보았을 것입니다.
5-6절은 그들의 자신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며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시편 64:5–6).”
그들은 서로 격려합니다. 그 격려는 악한 목적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들은 또 의논합니다. 어떻게 말의 올무를 놓아 다윗을 확실히 죽일 수 있을지 의논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건방진 말입니다. 자기들은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한 말입니다.
또 그들은 죄악을 꾸미는 중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고 실행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계획은 실패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팽배합니다.
6절 마지막에 있는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이 말은 악인들이 자화자찬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해봐도 이 묘책은 정말 기가 막힌 계획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말은, 시편 기자인 다윗이 해설자로서, “너희 계획이 정말 대단하구나”라는 풍자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은 두번째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고대의 격언을 인용하여 “사람의 악한 생각에는 한계가 없다”며 혀를 차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악인들을 하늘의 법정에 고발하는 다윗의 고소장 내용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4. 개입하시는 하나님(7-8a; 에 5-8; 단 6; 왕상 21-22; 살전 5:2-3; 딛 2:13)
7절에서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다윗의 고소는 6절로 마치고 7절부터는 하나님의 개입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다윗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셨고 다윗의 생명을 원수의 두려움에서 보존하시고 악을 꾀하고 행하는 자들의 음모와 소동에서 숨겨 주십니다.
7절은 반전을 알리는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그들의 음모와 소동, 칼 같은 혀와 화살 같이 독한 말, 악한 목적과 남몰래 놓은 올무, 기가 막힌 묘책, 아무도 헤아릴 수 없는 그들의 속 뜻과 마음, 이 모든 것이 다 물거품이 되어버릴 뿐 아니라, 도리어 그들 자신에게로 향하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겨눈 화살이 하나님의 무기가 되어 그들 자신을 죽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갑자기’ 쏘려고 한대로,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칼 같이 연마했던 그들의 혀가 도리어 자신들을 해하게 되고 그들은 엎드러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하만과 모르드개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만든 탑에 하만 자신이 달려 죽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에 5-8). 다니엘의 이야기도 동일한 것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어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그를 참소한 자들은 결국 자기들이 꾸민 그 음모 대로 자신들의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을 우리는 압니다(단 6). 이외에도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거짓 증거로써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합에게 심판을 선언하셨고 아합은 결국 꾀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아람 군인의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 죽게 됩니다(왕상 21-22).
이 모든 사건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악인들의 계획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판을 뒤집으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인간의 모든 지혜를 뛰어넘으시는 무한한 지혜 그리고 인간의 계획을 수포로 돌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에 지금 이 시편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었기에, 하늘의 법정에 고소장을 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3).”
악인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은 이렇게 임할 것입니다. 이점에서 주님의 재림은 세상의 판을 뒤집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주의 재림의 약속은 복된 소망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디도서 2:13).”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마지막 순간에 그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일을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5.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8b-10)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판을 뒤집어 놓으시자, 일어나게 된 결과를 8b-10절에서 보여줍니다. 먼저 8b-9절을 보지요.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시편 64:8b–9).”
대적들의 멸망을 사람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자들이 다 머리를 흔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들을 보는 자’는 의인들과 대조가 되는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음모를 꾸미고 소동을 일으키는 일을 소극적으로 추종하던 자들일 것입니다. ‘머리를 흔들다’라는 말은 ‘놀람과 혼란으로 동요하다, 허망하게 되다’ 라는 의미인데 ‘도망한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9절에서 ‘모든 사람’도 역시 앞에 ‘그들을 보는 자’와 동일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9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시편 64:9).”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행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회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은 역사에 하나님의 최후 심판 앞에서 악인들이 보이게 될 반응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의인들의 반응은 10절에 묘사됩니다.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편 64:10).”
의인들을 사로잡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즐거움과 찬송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합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즐거워했던 자들에게 주어질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피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이심을 그들은 절실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이 또한 일평생 피난처가 되어주신 하나님께 피해본 사람들이 그날에 그 피난처로 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대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도의 피난처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할 것입니다. ‘자랑한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힐렐(הלל)’인데, ‘할렐루야’가 여기서 파생하였습니다. 이 말은 ‘찬양하다, 자랑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두 가지 의미 모두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기는 자는, 의인이고 마음이 정직한 자이며, 경건한 자이고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6. 영원한 승리를 오늘 누리며 살라(고후 5:21; 벧전 2:23; 3:9).
결국 악인은 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때에 개입하셔서 악인들이 짜놓은 판을 엎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알고 믿으며 사는 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악인들의 언어적 압박과 음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성경은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수 있고,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 말씀, 시편 64편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다윗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그 일을 고스란히 겪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죄를 알지도 못하셨으나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어 주셨습니다(고후 5:21). 이뿐 아니라, 주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원수들의 언어적 압박과 음해 아래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되갚지 않으셨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베드로전서 2:23).”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3:9).”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여기에는 궁극적인 승리의 약속이 있습니다. 앨런 로스의 말입니다. “보호와 구원을 위해 주를 의지한다면, 주 앞에서 흠 없이 사는 의인들은 악한 자들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