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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6). 신앙의 내용을 경험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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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66). 신앙의 내용을 경험 하십시오

시편 66:1-2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0-07-22

말씀내용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하여, 과거에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던 신앙의 관습들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거의 반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고 할만큼 코로나19 바이러스 상황의 영향은 깊고도 광범위합니다. 이렇게 이 상황은 신앙을 포함하여 우리의 삶 전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거의 강제적인 기회를 마주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이 상황이 우리를 자동적으로 반성하게 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생각해보는 것은 이 모든 상황을 허락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신자로서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상황에 있는 성도들에게 매우 적합한 본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 고백의 내용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경험하고 살아가는가? 우리 신앙의 실재는 과연 무엇인가?”하는 질문들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핵심인 예배와의 본질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 66편은 우주적 스케일로 시작해서 개인적 스케일로 좁아지면서 마무리되는 시입니다. 이 시편에는 적어도 세 가지 찬송과 예배의 주체가 등장합니다. 1절에서는 ‘온 땅이여”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 ‘만민들아’라고 말하는데 이는 생명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13절부터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 차원에서 드리는 예배와 찬송으로 좁아집니다.
전체적으로 이 시편에 흐르는 분위기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송입니다. 그 예배와 찬송의 주체가 온 땅에서 백성으로, 그리고 시인 자신에게로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예배와 신앙의 경험
본문은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시편 66:1).”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촉구인데, 온 땅에게 명령합니다.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말은 예베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Shout joyfully to God,” 즉, “하나님을 향해 즐겁게 함성을 지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마 이런 외적 모습을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가수들이 등장하는 콘서트에서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혹은 국민들이 열광하는 종목의 중요한 스포츠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 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과장되거나 꾸며내서 연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그들 모두의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것, 그들이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이와 같습니다. 물론 예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정을 다 개인적으로 드러내고 발산하지 않습니다. 함께 부르는 찬송과 드리는 기도, 그리고 함께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과 물질의 헌상을 통해 질서 있게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스스로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하나님을 향해서 즐거움으로 함성을 외치고 싶은 심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가, 집에서 영상으로 드리는가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스포츠 경기를 직접 경기장에 가서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과 집에서 실시간으로 보면서 열광하는 사람이 차이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본문의 두 부분을 주목할 수 있는데 5절과 16절입니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시편 66:5).”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시편 66:16).”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고 말한 시인은 다시 “다 와서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에게는 이렇게 보여주고 싶고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거듭 반복해서 예배를 스포츠 경기와 비교하는 것이 못마땅합니다마는, 가장 가까운 예라고 생각하기에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감격적인 승리를 이룬 스포츠 경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때로는 그 경기의 영상을 보고 또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노라면, 마치 그 때의 그 감격이 되살아나는 듯 하기도 합니다. 이미 수년이 흘렀어도 그 감격을 다시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예배에 던져주는 시사점이 무엇입니까? 시인은 자신이 고백하는 말을 들어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에게 신앙은 단지 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을 경험한 실재입니다. 이 차이는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은 입술의 고백입니까, 경험한 내용입니까? 신앙을 경험함으로써 고백은 실재가 됩니다. 없었던 사실이 사실이 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있는 실재를 직접 경험하여 앎으로써 자신에게 실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힘이 있어서, 주변의 분위기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신앙은 살아있는 참된 예배를 가능하게 합니다. 1절의 언어를 빌어 말하자면, 하나님을 향해 즐겁게 함성을 외치고 싶은 심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예배가 아닌 것
시인은 온 땅을 향해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내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3절에서는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라고 아뢰라고 말합니다. 물론 온 땅은 입이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 있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 전체가 마땅히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해야겠기에, 그렇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5절 하반절에서 다시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성 없는 자연은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찬송하고 예배할 수 없습니다.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또 그들이 무언가 엄위로운 일을 보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대단한 자연 재해, 천재 지변을 겪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들먹입니다. 꼭 부정적인 것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미국과 같이 세속사회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기독교적인 색채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2000년 이전만 하더라도, 지진과 같이 큰 재해가 임할 때 공공방송에서 “하나님이 뭔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엄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냥 거기까지만 일 뿐입니다.
엄위한 일을 보았다는 것은 두려운 일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목도할 때, 특히 자연에서 발생하는 두려운 일을 목도할 때 그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말씀을 전하셨을 때에도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태복음 7:28–29).” 하지만 그들은 거기까지 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그 앞에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설교를 평가할 뿐이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시던 중, 예수님께서는 뱃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을 때 큰 광풍이 불어 위태한 지경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막 4:35-41). 그때 주님은 깨어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셨고 바람은 그치고 잔잔하여 졌습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말했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께 꿇어 경배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거기까지 만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에서 두려운 일, 엄위로운 일을 보았을 때 놀라며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아무 감정없이, 남의 나라 경기를 관전하면서 “공을 정말 잘 차는군.”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이성이 없는 자연 조차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해야 한다고 느낍니다(4).


3. 신앙의 경험은 시간에 머무르지 않는다. (5-12)
5절에서 시인은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떠올리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6절은 출애굽 당시 홍해를 건넌 사건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시편 66:6).”
이 사건은 구약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이고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시인은 과거 역사 속의 그 구원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시편 66:7).”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은 비단 한 민족, 한 국가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를 능력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보여주고 싶은 하나님의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신 자기 백성을 또한 고난 가운데서 연단하십니다. 10-12절 상반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시편 66:10–12상).”
시인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겪은 하나님의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언약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또한 은을 연단하시듯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자기 백성을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어려운 짐을 허리에 매어 고단한 인생 여정을 걷게 하십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한다고 고백할 만큼 남의 발 아래 짓밟히는 처참한 패배를 겪게도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시인은 불과 물을 통과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신자가 신앙의 내용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일들만 평생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기에 징계하시고 가지치기를 하심으로써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음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고백이 12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우리를 어디서 끌어내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물과 어려운 짐 그리고 처참한 패배, 즉 불과 물에서 끌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풍부한 곳에 들이셨다고 고백합니다. 풍부한 곳은 넘쳐 흐르는 곳, 풍요로움의 장소, 축복의 장소를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서 결국 여호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영원히 살리라고 고백하는 말과 같습니다(시 23:4-6). 하나님은 그 모든 고난을 통과하게 해주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시인은 과거의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은 결코 과거라는 시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인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그래서 페로운(J.J.S.Perowne)은 “믿음은 미래 뿐 아니라 과거를 우리 것이 되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 모든 과거의 신앙의 경험으로부터,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보존해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셈입니다.


4. 시인 자신의 예배 (13-17)
아무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향해 예배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예배는 의무가 되고 사람들은 예배를 오해하고 하나님 마저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예배를 한 예로 들어봅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런 충만한 기쁨을 가지고 있을 때, 부모가 하나님을 즐거워함이 가득할 때, 가정예배에 참여하는 자녀들은 하나님을 배우고 예배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가슴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흘러나오거나 터져 나오는 찬송이 되지 않을 때, 예배는 의무조항이 되기 쉽습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예배를 드리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그가 환난 때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시편 66:13–15).”
어떤 점에서 이 시편의 전체 맥락은 여기서 마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온 땅의 예배로 시작해서 시인 자신의 예배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시편 66:16).”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부릅니다. 여전히 시인에게는 들려주고픈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시인에게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한 고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것이 있습니까? 이 참된 신앙의 경험들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미 여러분의 지난 삶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살아있는 감격하는 예배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어디서 예배를 드리든지 말입니다.
사실 16절은 존 번연이 자신의 영적 자서전인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를 쓸 때, 그의 모토가 되었던 말씀입니다. 존 번연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것은 하나님께 깨끗한 마음을 드려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오해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던 존 번연은 요한일서 1:7과 고린도후서 12:9을 묵상하게 되었고 거기서 그는 비로소 복음의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1서 1:7).”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12:9).”
그리고는 자신이 경험하게 된 일,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적 자서전을 쓰게 된 것입니다.


5. 은혜로운 삼단논법 (18-20)
이 놀라운 복음의 내용은 시인에 의하여 매우 은혜로운 삼단논법으로 정리됩니다. 18-20절입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이 시편 강해에서 놀라운 삼단논법을 말합니다(Boice, J. M. (2005). Psalms 42–106: An Expositional Commentary (pp. 542–543). Grand Rapids, MI: Baker Books.).
삼단논법에는 두 개의 명제가 있고 결론이 나옵니다. 첫번째 명제는 내가 마음에 죄악을 품는다면 주께서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18). 두번째 명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고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다는 것입니다(19). 그렇다면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마음에 죄악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결론은 다른 것을 말합니다. 20절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편 66:20).”
결론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그것이 나 같이 부족하고 때로는 죄악을 품기까지는 하는 자의 기도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응답하게 하신 것입니다. 시인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볼 때, 그가 왜 온 땅을 향해서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내라고 말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에 대한 고백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을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될 때, 나오게 되고 이것이 예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평생 동안, 별별일을 다 겪을 것입니다. 물과 불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은혜에 대한 경험과 고백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무감정한 의무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인의 요청과 함께, 마음을 실어 하나님께 즐거운 함성의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멈추어 섰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이 예배당에서 모여 드리는 주일 공예배 조차 자유스럽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예배와 찬송을 멈추지 않게 하기를 구합니다. 시인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했듯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