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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2,43)B. 영혼의 노스탤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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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2,43)B. 영혼의 노스탤지어

시편 42:1-43:5, 히브리서 11:13-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09-04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 시편 42-43편을 좀 더 상고하려고 합니다. 시인이 드러내는 이 깊은 갈급함과 갈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갈망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난제들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채워주셔야 하는 그 갈망을 보여주고 자각하게 해주는 은혜로운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우리는 모든 게 다 잘 되어간다고 착각하지만, 문제가 맞닥드려질 때 비로소 우리는 좀 더 자신의 영혼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좀 더 깊이 살펴본 결과, 이 시인의 갈망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지만 구체적으로는 공적 예배에 대한 갈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의 성소에서 멀리 쫓겨가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갈 수가 없습니다. 갈 수 없는 시인의 주변에는 그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한다고 말합니다.
그 상한 마음이 바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드러납니다(42:5,11; 43:5).


1. 영혼의 고향이 있다.
파스칼이 말한 바, “모든 인간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이 만들어두신 빈 공간이 있다”는 말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면 모든 인간에게는 영적 고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향이라는 말은 우리의 정을 자아내는 정겨운 말입니다. 정지용 시인의 시 가운데 잘 알려진 고향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약간은 슬픈 시입니다. 그리던 고향에 갔지만, 그리던 고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꿩도 있고 뻐꾸기도 있고, 흰 점꽃도 그대로인데, 왠지 그리던 고향이 아니어서 마음은 다시 방황한다는 내용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 향수, 노스탤지어가 있지만, 어쩌면 그 노스탤지어는 정지용 시인이 그의 시에서 표현했듯이 세상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마음만의 고향일 수 있습니다. 그 시인이 주님을 알았던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는 정직하게 인간 안에 있는 향수를 이 시 안에 담아낸 것 같습니다. 고향이 고향 같지 않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고향에 대한 향수가 대개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영혼의 노스탤지어, 영혼의 향수입니다. 거듭난 신자들에게는 영적 고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나온 갈대아 우르를 본향으로 여기지 않았고, 믿음으로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았듯이(히 11:13-16), 신자들의 궁극적인 영적 고향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는데, 하늘에 있는 것의 그림자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맛볼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도 하늘의 고향과 같은 그림자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시인이 바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의 영적 고향은 바로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야곱의 영적 고향은 벧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댓가로 멀리 밧단아람으로 피신하던 광야 길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벧엘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일, 세겜에서의 문제로 큰 위기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시고, 그는 순종하여 가게 됩니다. 영혼의 회복이 일어나는 곳, 영적 고향으로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고향이 어디입니까?


2. 시인의 영적 노스탤지어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시편 42-43편은 정지용의 시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동일하게 보여주고는 있지만, 정지용의 시와는 전혀 다른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가 뵈옵는 것, 즉 예루살렘의 성소에서의 예배를 간절히 사모하고 그리워합니다. 그는 먼 곳, 이스라엘의 최북단 헤르몬 산 인근에서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형편 가운데 있습니다. 지금 그의 삶은,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휩쓸고 있는 상황입니다(42:7). 특별히 42:7에서,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라는 표현은 ‘깊음이 깊음을 부른다’고 읽을 수 있는데, 깊음이라는 단어는 바다 혹은 큰 홍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깊음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2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시인은 이 단어를 거듭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큰 물에 삼킬 것 같은 위협적이고 혼돈스러운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인의 마음은 메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42:1의 고백이 너무나 잘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 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인의 영혼은 간절히 회복을 필요로 했습니다. 전처럼 친구들과 함께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인생이 깊음의 바다 속에 빠져버린 듯 싶을 때, 이런 인생의 광야에서 사람은 영혼의 노스탤지어를 경험하게 됩니다. 범죄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래, 만만한 인생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버겁습니다. 이런 상황들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내면 깊숙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노스탤지어(향수병)를 앓게 합니다. 더 이상 자기 영혼의 목마름과 갈망을 무시할 수도 없고 피해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인생의 광야에 들어섰을 때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영혼의 노스탤지어를 무시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사람들은 얼마든지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대충 만족하면서 얼마든지 그냥 살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심각한 목마름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대체물들이 널려 있고 그것들로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견딜 수 없는 갈급함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때마다 대충 채우고 갈 수 있기 떼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단 인생의 광야를 만나고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될 때에는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그는 더 진지해지고, 자기 영혼에 대해서 염려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있는 영혼의 노스탤지어를 직면하게 됩니다. 영혼의 목마름, 영적 갈망을 비로소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노스탤지어에서 나오는 탄식
본문에서 보게 되는 시인의 영적 노스탤지어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 노스탤지어가 가장 먼저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탄식입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듯이, 시편 42-43편은 탄식에 이은 후렴구(42:5), 다시 탄식에 이은 후렴구(42:11) 그리고 또 한 번 탄식에 이은 후렴구(43:5)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 모든 탄식들이 바로 영혼의 노스탤지어에서 나오는 탄식입니다.
평상시의 모습과는 달리,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고 할만큼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립니다(42:3). 마음이 상합니다(42:4). 자신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슬프게 다닐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잊었다는 생각 마저 듭니다(42:9). 아니,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린 것만 같습니다(43:2).
그리고 후렴구에서 반복해서 고백하듯이, 시인의 마음은 낙심으로 떨어지고 있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42:5,11; 43:5). 놀라운 것은, 시인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노스탤지어는 시인으로 하여금 살아가던 분주한 삶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탄식하고 있지만, 이 탄식은 사실상 기도와 진배 없습니다. 신자에게는 이것이 축복입니다. 신자는 탄식을 할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탄식은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의 탄식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는 모든 말과 우리가 내쉬는 모든 한숨 조차도 하나님께서 보고 들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의 탄식은 영감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4. 노스탤지어에서 나오는 간구
이런 영혼의 노스탤지어에서 시인은 탄식을 넘어 자기의 힘이 되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43:3입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43:3).”
시인의 간구는 자신을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영혼의 고향으로 데려가 달라는 간구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인도해달라는 것입니까? 시인은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인도해달라고 구합니다. 빛은 은유입니다. 무엇을 가리키는 은유일까요? 생명, 기쁨, 구원, 진리, 하나님의 얼굴빛, 긍휼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는 은유일 것입니다. 칼빈은 빛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슬픔의 시간에 빛을 덮어버린 짙은 모호함을 쫓아낼 하나님의 호의”라고 말입니다.
앞서 시인 자신이 고백했듯이, 그는 깊음이 깊음을 부르는 혼돈과 위협 아래 있습니다. 목마름과 고독, 슬픔이 그를 덮고 있습니다. 이 모든 어둠과 모호함을 거두어갈만한 빛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빛이 비칠 때, 모든 어둠이 한 순간에 물러가듯이, 시인은 그런 빛을 자신의 삶을 향해 비추어달라고 구합니다. 그것은 종종 시편 기자들이 고백했듯이, 하나님의 얼굴 빛일 수 있습니다(80:3,7,19; 89:15; 90:8). 42:1에서도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고 탄식했듯이, 시인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시는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주의 빛’을 보내달라는 것은, 시편 67:1의 기도처럼,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는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이 구하는 것은 ‘주의 빛’과 함께 ‘진리’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매우 자주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인자를 뜻하는 ‘헤세드’와 함께 짝을 이루어 나오는 단어입니다. 보통 ‘인자와 진리(시 25:10; 40:10,11; 57:3; 61:7; 잠 3:3)’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진리는 확고함, 바름, 신실함과 같이 성품과도 연결이 되는 단어입니다. 즉, 이것이 헤세드와 함께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 하나님은 끊어질 수 없는 언약의 사랑을 베푸시며 또한 진리 안에서 진실하고 공의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42:8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42:8).”시인은 적어도 하나님의 헤세드, 그 언약의 사랑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힘들게 하고 조롱하는 세력들을 가리켜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라고 묘사하는데(43:1), 이것을 직역하면, ‘헤세드가 없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일컬어 ‘나라’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대적하고 자신의 신앙을 조롱하고 위협하는 자들은 ‘헤세드가 없는 자들’이라면 자신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신뢰이고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을 이루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이런 인자하심을 확신하는 시인은, 이제 진리를 보내셔서 자기를 영적 고향으로 인도해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시인이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라는 기도에서, 빛과 진리는 동의어 반복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 119:105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한 것 처럼 말입니다. 빛과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든지,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혼의 고향으로 데리고 가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노스탤지어에서 나오는 시인의 간구입니다.


5. 소망—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
끝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시인의 믿음과 소망입니다. 이것이 정지용 시인의 시가 나타내는 것과 극명하게 다른 점입니다. 시인 정지용은 그의 시 [고향]에서 고향에 이르렀어도 그건 내가 바라던 고향이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시편을 쓴 시인은 비록 아직 그 고향에 이르지는 못했을지라도, 이미 이른 것처럼 장래의 은혜를 소망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현재에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43:4입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시인은 그런 은혜의 날을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1에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한 것은 정확하게 이 경우에 맞아떨어집니다. 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하나님께 이르러, 수금으로 주를 찬양할 것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나님을 ‘큰 기쁨의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가장 큰 기쁨이고 만족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분으로 인하여 채워지는 큰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겠노라고 결심합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세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 후렴구(42:5,11; 43:5)를 보십시오. 그 하반절에서 시인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특히 43:5의 후렴구는 앞에서 두 번 반복한 것과는 조금 다른 어조를 보여줍니다. 43편이 그렇듯이, 좀 더 단호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도 하나님을 단순히 자기 도움이나 구원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넘치는 기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이 탄식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동안, 점점 염려의 자리에서 믿음의 자리로 옮겨져 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후렴구는 기독교 신앙에서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소망은 인내하며 기다리는 동시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품는 것입니다. 청교도 목사인 윌리엄 거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망은 곤경에 처한 그리스도인을 진정시키며 침묵하게 한다. 또한 이 소망은 곤경에 처한 영혼을 내적 기쁨과 위안으로 채우며 그리하여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입에서는 한숨이 나오지만 그 영혼은 웃을 수 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 바, ‘소망의 확신과 자랑’(히 3:6)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영적 통찰을 얻습니까?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은 신자의 영적 침체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영적 침체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영혼의 노스탤지어, 향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향에 이를 때까지는 온전하게 채워질 수 없는 향수입니다. 세상에서의 고향은 정지용 시인의 시처럼 실망을 안겨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주신 이 짙은 향수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다하고 난 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에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향수, 노스탤지어를 만족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런 영혼의 향수를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거 어느 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큰 은혜를 받았던 날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큰 기쁨의 하나님을 인하여 찬송하였던 그 때를 말입니다.
그날의 은혜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상고한 이 말씀을 묵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그 깊은 갈증, 갈급함, 갈망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내 영혼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간구하십시오. 주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러 수금으로 비파로 찬송하겠다고 말씀드리십시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혼란하게 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잠시 위안을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노라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의 영혼의 향수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런 향수를 알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세상이 살만하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사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 여러분 안에 존재하는 이런 영혼의 깊은 갈망, 갈급함을 느낀 적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인자와 진리의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이 갈급함을 보게 해달라고, 이 갈망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 갈망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채움받는 큰 기쁨의 날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5,3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