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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5). 왕의 혼인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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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5). 왕의 혼인 찬가

시편 45:1-17, 히브리서 1:8-9, 요한계시록 19:6-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09-18

말씀내용
우리가 오늘 상고할 시편 45편은 참 아름다운 찬송시 입니다. 표제에 썼듯이, 이 시편은 ‘사랑의 노래’입니다. 왕의 결혼식 그리고 왕과 그의 신부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찬가입니다. ‘소산님에 맞추었다’는 것은 백합화 모양의 악기로 연주된 노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시편의 분위기는 앞에 있는 44편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44편이 어둠 속에서 왕이 하나님을 찾는 시편이라면, 45편은 내내 밝고 행복한 분위기에 있는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두 시편은 어쩌면 우리 삶에서 늘 교차되고 경험되는 두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5편은 왕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제왕시로 분류되는데, 다른 제왕시들처럼, 이 시편도 궁극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을 읽고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서 의미와 교훈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1. 배경지식: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 관습
이 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 전통에 대한 선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혼식의 첫 단계는 약혼식이었습니다. 약혼식은 보통 우리 사회에서 이해하는 약혼식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들의 약혼식은 결혼식은 아니지만 결혼으로 간주되는 약혼이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그녀와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일이 일어났다는 기사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마 1:18). 약혼은 신랑과 신부의 부모들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증인들 앞에서 신랑과 신부가 서약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대개 약혼식에서 신랑 측은 신부 측에 줄 혼수를 약속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약혼식을 하면 신랑과 신부는 남편과 아내로 불리고 또 부부로 간주되었지만, 한 몸으로 연합되기까지는 결혼식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때로는 신랑과 신부가 어린 나이에 약혼을 함으로써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날이 이르면, 신부의 집에는 신부의 친구들과 시중들 처녀들이 모여듭니다. 그리고 신부는 아름답게 단장을 하게 되지요. 그때 신랑의 집에서도 신랑의 친구들과 시중들 사람들이 똑같이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신랑과 그 일행은 어둑어둑해 지면 마을의 큰 길을 가로지르는 행렬을 지어 횃불을 들고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러니 언제 신랑의 일행이 올지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도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일단 신랑의 행렬이 신부의 집에 도착한 뒤에는, 신랑이 신부와 그녀의 친구들, 시중드는 사람들을 데리고 신랑 신부의 행렬을 만들어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갈 때보다 더 큰 행렬이 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신랑의 집에 도착하면, 그 때로부터 1-2주 정도 결혼 축연이 베풀어지게 됩니다. 이 축제의 기간은 그 집안의 경제적 형편과 상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천국 비유 중, 열 처녀의 비유는 이런 결혼 관습을 알고 들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서의 열 처녀는 신랑 일행이 신부를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시편 45편도 이런 배경 지식을 가지고 읽을 때,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절과 16-17절을 서론과 결론이라고 하고, 2-15절을 분석해보면, 2-9절은 왕인 신랑과 그 일행이 신부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고, 10-12절은 신랑의 일행을 기다리는 신부에게 주어지는 조언입니다. 그리고 13-15절은 신부가 그 친구들이나 시중드는 사람들과 함께 신랑(그는 왕입니다)의 인도를 받아 신랑의 궁전으로 들어가 마침내 왕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시인을 만든다(1; 엡 5:32)
여러분은 혹시 시를 쓰실 때가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인생 중에 시를 써보았던 때가 있습니까? 모두에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시인이 되는 경향이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지요.
이것은 정말 멋진 고백이 아닙니까?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1).” 왕의 혼인을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그 왕을 향한 시인의 마음은 설레일 뿐 아니라 샘처럼 솟아 오릅니다. 1절은 히브리어로 ‘휘젓다, 계속 움직이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개역개정역성경에는 그 단어의 의미가 충분히 표현되지 못했습니다. 그 의미를 살려 번역한다면,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좋은 말,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헤르만 궁켈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 마음이 영감을 받은 말들로 흘러 넘칩니다(My heart overflows with inspired words.).” 영어 성경 중에서, ESV, NASB, NKJV, RSV 등이 ‘흘러 넘친다’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좋은 말은, 2절부터 시인이 말하려는 칭송의 말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또 그는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고 말합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려가는 실력 있는 서기관의 붓끝처럼 내 혀가 쉬지 않고 움직이며 왕과 그의 혼인을 향하여 시를 지어 부른다는 말입니다. 영감 받은 말들이 흘러 넘치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왕과 그의 혼인을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입니다.
시편 45편은 왕의 혼인 찬가입니다. 일종의 결혼 예찬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듯이, 단순한 결혼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엡 5:32). 이것은 결국 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게 읽을 때, 우리는 이 시편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좋은 말이 봇물처럼 솟아오르고 흘러 넘치며, 자신의 혀는 서기관의 붓끝처럼 그리스도를 찬송하노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냉담함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거룩한 감정이 분출하고 있고, 시상이 충만하게 흘러 넘치게 되어, 아름다운 언어들을 쏟아내는 시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3. 신랑-왕에 대한 칭송(2-9; 사 50:4; 눅 4:22; 히 1:8-9)
이어지는 2-9절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신랑 일행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의 집으로 가는 신랑의 행렬을 묘사합니다. 그 행렬의 주인공, 신랑인 왕에 대한 칭송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좋은 말들이 흘러 넘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신랑-왕의 뛰어난 자태를 칭송합니다. 2절입니다.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원히 복을 주시도다(2).”
왕의 자태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의 입술은 은혜를 머금고 있습니다. ‘머금다’는 말은 ‘쏟아져 내린다, 쏟아 붓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입술에서 은혜로운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50:4을 떠올리게 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는 혀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우리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
은혜로운 말씀이 쏟아져 내리는 신랑-왕을 시인은 칭송합니다. 이런 왕의 자태와 언행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두번째 칭송은 신랑-왕의 용맹에 대한 것입니다. 3-5절입니다.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왕의 위엄을 세우시고 병거에 오르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3-5).”
시인은 신랑-왕을 용사, 진정한 영웅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사사로운 일로 용맹을 발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와 온유, 공의를 위하여 용맹을 발하는 분입니다. 왕의 대의명분은 언제나 정의롭습니다.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놀라운 일을 가르치리이다”라는 말은 왕의 능력(오른손)이 놀라운 일들을 드러낼 것이라는 시인의 소원과 기대를 피력하는 것입니다. 왕의 대적들을 결국 다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세번째로 시인은 신랑-왕의 통치가 가져오는 공의를 칭송합니다. 6-7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6-7).”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엄밀하게는 이스라엘 역사 속의 어떤 왕에게도 돌려질 수 없는 찬사입니다. 만일 이것이 어떤 인간 왕에게 돌려졌다면, 그것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아첨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윗 왕의 이상적 통치를 언급하는 칭송이라고 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왕권 통치는 영원하고 그 통치는 공평할 것입니다.
6-7절은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인용을 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8-9을 보겠습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히 1:8-9).”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45:6-7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인용으로 인해, 시편 45편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더 분명해집니다. 사실, 왕에 대한 칭송을 하는 중에, 갑자기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특이해 보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왕의 하나님’이라고 함으로써, 왕과 하나님을 구별합니다.
데렉 키드너는 이 역설적 표현이 담긴 난해한 구절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성부 하나님과 구별됨을 경험하였던 성자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 묘사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신랑-왕의 통치가 공평한 이유는 7절에 설명됩니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어 그를 뛰어나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신랑-왕의 혼인식 날 하나님께서 신랑-왕에게 기쁨을 흘러 넘치도록 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즐거움을 부어주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환유법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신랑-왕의 의복과 그를 호위하고 따르는 화려한 행렬을 칭송합니다. 8-9절입니다.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8-9).”
몰약과 육계는 성막에서 사용할 향기로운 관유를 만드는 재료로 언급된 것입니다(출 30:23,24). 이렇게 만든 관유는 사람을 위해 쓰거나 사적 용도로 만들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왕의 의복이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로 가득하다는 것과 함께, 화려한 상아궁에서 흘러나오는 현악에 대한 언급은 신랑-왕이 최고, 최상의 화려함 가운데 있음을 묘사합니다. 이제 신랑-왕의 행렬은 신부의 집에 도착합니다. 신랑이 왕이므로, 신부는 왕후입니다. 그녀의 자리는 왕의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 외에도 그녀의 옆에 함께 있던 많은 여인들이 언급됩니다.


4. 신부-왕후에 대한 칭송(10-15; 고전 2:9)
이어지는 10-15절에서는 신부에 대한 칭송이 이어지고, 신부는 당연히 왕후로 불립니다(9). 먼저 신랑을 맞아 신랑의 집으로 따라 나설 준비를 하며 기다리는 신부에게 시인이 주는 조언이 나옵니다. 10-11절입니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10–11).”
시인은 나이든 사람이 젊은 사람을 아들이나 딸이라고 호칭하는 방식으로 신부에게 말합니다.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들으라는 것은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순종을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보라는 것은 관심을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신부는 시인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신부는 자기 백성과 자기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연결고리를 끊는 것을 말합니다. 이전의 삶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은, 이전에 살던 삶을 잊어버리는 것을 요구합니다. 여전히 이전의 즐거움에 연연하여 살아간다면 그는 구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그전처럼 세상과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행위입니다(약 4:4). 그녀의 남편은 왕입니다. 그녀는 아내인 동시에 왕의 신하로서, 남편을 남편인 동시에 왕으로서 대할 것을 권면 받습니다.
여기에는 감미로운 약속도 있습니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11).” 신랑-왕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사모할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12절에 “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라고 했는데, 이 말은 신부가 두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이렇게 오해하면, 시편 45편이 역사적으로 아합과 그 부인 시돈 사람 이세벨의 결혼을 노래하는 시편이라고 이해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악한 아합과 이세벨의 혼인은 결코 칭송 받을 수 있는 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로의 딸은 두로의 백성을 일컫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두로의 딸’이 무역으로 부강해진 물질을 자랑하는 두로의 백성을 의미한다고 보면, 그런 나라에서도 왕의 결혼을 축하하려고 예물을 보냈다는 의미가 됩니다. 백성 중 부한 자들이 신부의 얼굴을 보기를 원할 만큼 신부는 존귀함을 얻습니다.
13절에서 신부는 다시 ‘왕의 딸’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이제 신랑-왕의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게 되고 그녀는 금으로 수놓은 옷을 입고 그녀의 친구 처녀들과 함께 신랑-왕에게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아 왕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14-15).


5. 적용과 교훈(16-17; 요 14:2-3; 계 22:20; 19:6-8)
끝으로 16-17절은 신랑과 신부의 혼인을 통한 연합의 축복을 말합니다. 이렇게 혼인을 통해 신랑과 신부는 한 몸이 되고, 그들을 통해서 출생한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하고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오늘 이 시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 저녁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신랑이신 주님께서는 신부인 교회, 성도들을 데리러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혼인예식과 정확히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초림 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당신의 피로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것은 영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약혼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의 관습은 약혼을 마치면 이미 남편과 아내가 되고, 부부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완전한 연합에 이르려면, 결혼식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결혼은 언제 일어날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대로, 우리를 영접하여 데리고 가시기 위하여 다시 재림하시는 그 때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식,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열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님은 신약성경의 마지막에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혼인의 날을 기다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드디어 그 날이 이른 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6-8).”
오늘 시편은, 그날에 우리가 누릴 영광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혼인하게 될 주님의 영광에 대한 칭송이 이 시편 안에는 가득합니다. 이것을 마치 제삼자처럼 묘사하는 시인의 마음에서는 영감에 찬 좋은 말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의 혀는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처럼 움직여 그리스도를 칭송합니다.
우리는 사실 제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오늘 시편 기자가 묘사한 그 모든 영화를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입술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우시고 영화로우신 주님을 우리의 신랑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시편 45편은 그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마음을 장래의 영화로운 은혜로 가득히 채워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편을 읽을 때마다 그런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복된 역사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