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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7). 온 땅의 왕께 열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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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7). 온 땅의 왕께 열광하라

시편 47:1-9, 요한계시록 11:1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10-02

말씀내용
1. 우리들만의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우리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과 나를 나누고, 너희 편과 우리 편으로 나누고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표현일 수 있지만, 한편 편협한 신앙적 사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본문 3-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라들을 우리 발 앞에 복종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고대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패한 장수나 왕의 목을 발로 밟는 장면을 보여줍니다(수 10:24).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패하게 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승리가 되는데, 그 승리를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적들에게 패배를 주시고, 자기 백성에게는 그 땅—하나님의 소유된 땅입니다—을 기업으로 택하여 주십니다. 여기에는 너희 편과 우리 편이라는 대립 구도가 있고, 또 하나님께서 저들을 꺾으시고 우리에게 기업을 주신다는 개념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굴복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범죄하고 타락한 때부터, 이런 전쟁과 대립의 구도는 성경 전체의 구속사를 흐르는 기본 설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쟁의 이야기이고 여기서 너희 편과 우리 편이라는 구도는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언급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a).”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차별적 재앙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당시 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부족신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이후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도 그랬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그들이 이런 생각에 빠져들 유혹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의 부족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앞에서 우리가 본대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고 하셨지만 이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2:3).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를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9:5-6). 하나님은 결코 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긴장이 존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과 전쟁을 치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방편으로 주변 나라들을 사용하실 때를 제외하면, 하나님은 그들 편에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이스라엘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 곧 축복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이 긴장 관계를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대부분의 가나안 민족들이 그러했듯이, 여리고는 이스라엘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에 라합이라는 여인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인정과 고백까지도 하였습니다(수 2:9-11).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라합과 그 집안을 여리고성의 멸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후일 라합은 유다 지파의 지도자인 암미나답의 손자 살몬과 결혼하게 되고 다윗의 증조부인 보아스를 얻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선대한 사람을 복 주신 증거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기들 편에서 싸우시고 자기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살면서, 동시에 누구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개방된 공동체로 존재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의식 자체가 개방적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보여준 선민의식은 비뚤어지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종교심의 표출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하나님은 온 세계, 온 땅에서 찬송과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하나님이시다”하는 의식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좀 장황하고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마는, 오늘 시편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2. 시편 47편의 예언적 성격
본문 47편은 대관식 시편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으로 즉위하시는 것을 경축하는 분위기가 이 시편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왕이셨고 어떤 순간에 왕이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93:2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시 93:2).”
이점에서, 데렉 키드너(Derek Kidner)는 47편은 하나의 시편을 넘어, 먼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7-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시 47:7-9).”
이것은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아직 뭇 백성이 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았고, 뭇 나라의 고관들이 아브라함의 백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보게 될 말씀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이고 예언적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
그 날이 옵니다. 시편 47편은 바로 이 날을 멀리서 바라보는 예언입니다. 이 날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7편을 읽을 때, 우리는 이미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으로 인정되실 날이 올 것을 바라보며 그 왕께 열정과 마음을 다해 찬송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두 개의 연으로 구분됩니다. 1-5절은 주로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며, 그분에게 열광적으로 반응하고 즐거워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6-9절은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시고 성취하실 온 땅의 절대 주권과 왕권을 바라보며 찬송하라는 내용입니다.


3. 하나님께 열광하라(1-5)
1절을 봅시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만민들’을 부름으로써 시작합니다. 이로써 시인은 하나님의 왕권이 미치는 범위가 온 땅, 모든 세상임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이 시편의 분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손뼉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라고 말합니다. 외치라는 말은 함성을 지르라는 말인데, 이것은 종종 전쟁에서 사기를 돋우고 승기를 잡기 위해서 군사들이 지르는 함성을 의미하거나 큰 기쁨의 함성을 가리킵니다. 스포츠 경기장에서 팬들이 응원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팬들은 목이 쉴 만큼 노래 부르고 함성을 지르고 응원을 합니다. 또는 가수들의 공연장에서 가수들과 함께 떼창을 부르며 소리 지르고 열광하는 모습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은 그런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며 함성을 지르라고 말합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께 돌려지는 예배로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배의 목적과 대상은 오직 성 삼위 하나님 뿐이십니다. 시인은 만민들에게 손뼉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함성을 지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근저에는,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만민들로부터 손뼉치고 함성을 지르는 열정적 예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 오순절교파 교인들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잘로교인들은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모든 예배에서 박수치고 소리 지르는 것이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시인의 마음은 그런 열정을 표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건성으로, 무덤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표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을 표출하는 방식은 손뼉치고 즐거운 함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북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도자가 나타나면, 이런 식으로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면서 함성을 지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온 마음으로 스스로 기뻐서 함성을 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지요.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우리 말 성경에는 생략이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2절이 시작합니다. 이렇게 열광적으로 찬송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2절에 소개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지존하신 하나님이시며, 마땅히 경외할 대상이고, 온 땅을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존하다’는 표현은 이방인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하나님의 성호입니다. 세상 모든 신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두려우시고’라고 했는데, 마땅히 경외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3-4절에서는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은 두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먼저, 만민과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얻으신 그 땅을 기업으로 택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온 땅의 주인이고 왕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을 따라 행하신 일입니다. 시인이 이 말을 할 때, 가나안 정복 전쟁을 회고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내쫓으셨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사용된 동사, ‘복종하게 하시며’와 ‘택하시나니’의 미완료시제는 과거를 넘어 미래의 영역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습니다. 즉, 가나안 정복 전쟁을 넘어 먼 장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택하시나니’라는 표현은 절대주권자의 행동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온 땅의 왕께서 당신의 소유인 것들 중에서 한곳을 택하여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처럼, 그 땅은 바알의 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 사랑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세 율법에 기록한 대로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7-8).”
‘영화’라는 말은 자랑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기업은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토록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기업을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이 감격은,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열정을 다해 손뼉치고 함성을 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이 구절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안치하던 그 역사적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삼하 6:15).” 모든 백성이 모여 손뻑치며 즐거움의 함성을 지르는 가운데 언약궤가 안치되고, 하나님은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좌에 오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교회 역사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떠올리는 개념으로 인식되었기에, 예수님의 승천일에 종종 이 시편이 찬송으로 불리고 읽혀지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열광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4. 우주적인 종말론적 찬송(6-8)
이제 우리는 시의 두번째 연으로 갑니다. 두번째 연은 먼 장래의 일을 바라보며 예언하는 성격을 두드러집니다. 6-7절입니다.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6-7절에서 찬송하라는 말이 5번 반복됩니다. 정복과 기업주심을 성취하신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찬송하고 찬송하고 또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끝없이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7절 하반절에 ‘지혜의 시로’ 찬송하라고 말하는데, 지혜의 시는 히브리어로 마스길입니다. 우리가 42편, 44편, 45편의 표제어에서 봤던 용어입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되어있었지요? 마스길은 교훈적 노래(Wisdom Song)를 가리킵니다. 마스길의 기본형은 ‘식견이 있다, 가르치다, 묵상하다, 바라보다, 이해하다, 파악하다’와 같은 뜻을 가지는데, 명사로는 ‘총명, 깨달음, 명철’등을 의미합니다. 7절에서는 마스길을 ‘지혜의 시’로 번역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으로서 찬송을 받으셔야 할 이유를 교훈적인 노래로 지어 부르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자손들이 배우고 알아 그들도 함께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제 8-9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주권을 가진 왕으로서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뭇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여기서 ‘다스리고, 앉으셨다’는 말은 원문에 완료시제인데, 진리를 나타내는 완료시제의 용법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뭇 백성을 다스리시고 거룩한 보좌에 앉으신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입니다. 뒤집어질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왕이십니다.
그러나 이 시제는 예언적 완료시제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모든 대적을 물리치시고 온 땅을 통치하시는 완전한 성취가 이루어질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이라는 말입니다. 데렉 키드너가 47편은 한 편의 시를 넘어 예언이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 리로다 하니(계 11:15).”라고 한 이 말씀이 성취되는 때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방패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현에서, 방패는 방패를 지닌 사람들, 지상의 강력한 전사들을 가리키는 환유법입니다. 그 용사들이 하나님께 속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하며 시인은 찬송을 마무리합니다. 미완의 예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도 그날을 기다리며 이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더디지도, 빠르지도 않게, 하나님의 시간에 올 것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입니다.


5. 교훈과 적용
이 말씀의 적용적 교훈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에 따라 신실하게 행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십니다. 온 땅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십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재림의 날에 이것을 명확하게 볼 것입니다. 우리는 적대적 관계나 칼과 창의 방편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도적, 선교적 관계를 통해서, 그들을 굴복시키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으로 경외와 경배를 받으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왕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당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이 온 땅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땅의 왕이심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당신의 왕으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은 당신의 왕이십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넓은 예배당을 구할 때에도, 우리가 헌금으로 예배당을 마련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택하여 주실 기업이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주께 드리는 모든 헌금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이 시진핑의 손에 있고, 미국이 트럼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도, 미국도, 그리고 모든 나라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말씀을 보십시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단 5:30-31).”
모든 제국, 모든 열왕이 서고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온 땅의 왕,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우리는 머리로만 인정하는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열광해야 합니다. 그 어느 스포츠 경기장에서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그 어떤 콘서트장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열광하며, 손뼉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예배하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아니, 성령 하나님께서 이 시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느냐? 그렇다면,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열광함으로 예배하라고 말입니다. 그 감격과 열정을 가지고 하라고 말입니다.
이 시편을 상고하고 묵상하면서, 이런 간절함이 제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열광하면서 예배하자. 그렇게 하고 싶다. 그 어디에서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오직 하나님께 열광하자.” 이 시편이 여러분에게는 어떤 마음을 불러일으킵니까?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1-2).”
여러분은 이 말씀의 권고를 어떻게 들으십니까?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시겠습니까? 오,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열광하는 예배를 드리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런 열광하는 예배가 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가운데서와 온 땅에서 높임을 받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