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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8). 시온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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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8). 시온의 영광

시편 48:1-1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10-23

말씀내용
이 아름다운 찬송시는 시편에서 시온시 혹은 시온의 노래(The Songs of Zion)로 분류됩니다. 시온의 노래는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아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도성인 시온의 영광을 노래하는 시편들입니다. 우리가 최근에 살펴본 46편은 시온의 노래 중 첫번째 시편인데, 이 시편에 시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4절에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은 지나가며 말한 것이 아니라, 이 시편의 중심을 형성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이 시편은 시온의 노래로 분류됩니다. 이외에, 우리가 잘 아는 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 84:5-6)”라는 아름다운 고백을 담은 시편 84편도 시온의 노래입니다. 시온의 노래는 이외에 76, 87, 122, 그리고 132편이 있습니다.
‘시온’이라는 말은 교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에 비하면 정확하게 인식되지는 못하는 개념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시온이가 있고, 시온은 많은 교회의 찬양대 이름으로도 사랑을 받습니다. 본래 시온이란 말은 요새라는 뜻입니다. 지명으로는 예루살렘 성이 세워진 해발 790m의 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윗 시대에 비로소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정복하여 수도로 삼고 성곽을 세워 다윗 성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그곳에 성전을 지음으로써, 명실공히 시온은 이스라엘의 수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됩니다. 그래서 시온은 거룩한 산(시 2:6), 여호와의 산(미 4:2), 또는 예루살렘(왕하 19:21; 133:3), 이스라엘 회중이나 국가를(시 126:1)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마지막 날 세워질 새 예루살렘 즉 천국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됩니다(히 12:22; 계 14:1).
시온의 노래들은 장소로서의 예루살렘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좌에 임재하셔서 다스리시는 도성, 위대한 왕이신 하나님의 도성의 영광을 노래하는 시편들이고, 영적으로는 그 의미가 매우 포괄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시편 학자들은 아마 이 찬송시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가 모이는 절기 때 불려졌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 (1-3)
먼저 1-3절은 우리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 그 거룩한 산을 묘사하고 칭송합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1).” 어디에서 찬양 받으셔야 한다고 말합니까? 시인은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 곧 시온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실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시편에서 시온 혹은 시온을 의미하는 말들을 읽을 때 언제나 교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시온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왕이신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 아래 평안을 누리는 백성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시온에서 그들의 위대하고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께 영원토록 극진히 찬송을 돌려야 할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온산을 거룩하게 하고, 시온산을 안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니, 그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절에는 그 성에 대한 첫 묘사가 나옵니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2).” 그 성은 ‘터가 높고 아름답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에서 시온산이 제일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이기에, 터가 높고 아름답다고 묘사됩니다. 이 산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산이 가진 위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는 온 세계를 즐겁게 합니다. 이것은 위대한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온 세상에 미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시온산이, 예루살렘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구약의 어느 시대에도 하나님의 성이 온 세상의 즐거움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 시인은 미래의 시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계시를 통해서 꿈꾸었던 모습을 바라보는 듯 합니다. 이사야 2:2-4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2절 하반절에,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라는 표현은 해석에 논란이 있는 부분입니다. ‘북방’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사폰’이라는 단어는 보통 북쪽을 가리키는 말인데, 당시 고대 근동 특히 가나안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신들이 거하는 성산(聖山)을 가리켜 쓰던 용어였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단순히 북쪽 산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이 믿는 바, 사폰에 거하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 밖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분이 임재하시는 ‘사폰’이 곧 시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성이 안전하고 견고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요새로 알리셨도다(3).” 하나님께서는 여러 궁중에서 당신의 능력과 주권을 요새로 드러내셨습니다. 요새는 높아서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요새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큰 왕의 성이 아름답다는 개념에서 모든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성이라는 개념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4-8절의 전쟁의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2. 대적들에게 임하는 두려움과 패배 (4-7)
1-3절에서는 위대한 왕이신 하나님의 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즐거이 찬송하고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두번째 연에 해당하는 4-8절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두려움과 공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즐거움의 반응을 만들어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공포를 자아냅니다.
4절에서 “왕들이 모여서 함께 지나갔음이여”라는 말은, 왕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하나님의 도성으로 결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전쟁을 벌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생각하는 세상 나라들의 공격은 과거의 어느 전쟁보다도 더 광범위하고 전방위적입니다. 이 공격은 육지에서만의 공격이 아닙니다. 7절에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해상으로도 공격이 임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성을 지날 때 그들에게 임한 것은 놀람과 두려움이었습니다. 5절의 동사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이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지나갔도다(5).” 그들은 무엇을 보았기에 놀랐고 두려워서 빨리 도망을 했을까요? 그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보았는지 단정할 수는 없어도 그들은 분명히 이 도성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관한 무언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랐고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빨리 도망했습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6절을 계속 보지요. “거기서 떨림이 그들을 사로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 같도다(6).” 그들은 떨었고 그 떨림은 그들을 사로잡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두려움과 공포는 두 가지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첫째는,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7절에 ‘동풍으로 깨지는 다시스의 배’와 같다는 것입니다. 동풍은 고대 근동에서 바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파괴적인 바람을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였습니다(출 14:21; 렘 18:17).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언제나 파괴의 흔적을 남기는 ‘태풍’ 같은 것입니다. 다시스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스페인 남부 해안지대로 추정되는데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고 여긴 곳입니다. 첫번째 이미지가 그 공포의 극심함을 표현한다면, 두번째 이미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무력한 성냥개비같은 것에 불과한 대적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번째 깨지는 배의 이미지는 에스겔서에서 두로의 심판을 예언할 때와 요한계시록에서 큰 성 바벨론의 영구적 멸망을 표현할 때 다시 나타납니다. 에스겔 27:26입니다. “네 사공이 너를 인도하여 큰 물에 이르게 함이여 동풍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너를 무찔렀도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8:17-19도 볼까요? “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도성을 공격하는 것은 무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존재할 것입니다.


3. 믿음의 발생과 자라남 (8)
물론 최종적인 하나님의 심판과 승리가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8절에서 시인은 먼저 자기가 들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들은 대로”라는 말은 선조들, 부모들의 세대로부터 시인과 그의 세대가 들은 하나님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이제 시인은 자기가 들은 것을 친히 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는 들었고 들은 것을 이제 봅니다. 이것은 믿음과 관련한 중요한 성경적 표현입니다. 믿음은 듣는 것과 깊이 연관됩니다. 로마서 10:17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44편도 본문 8절과 비슷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욥도 극심한 고난을 통과한 뒤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시인은 선조들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제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고 봅니다. 그렇게 성장한 믿음은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라.” 참된 믿음은 언제나 미래의 약속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그가 들었고 그가 본 하나님의 승리는 최후의 승리에 대한 맛보기라는 것도 그는 압니다.


4.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뻐하고 자세히 살펴 후대에 전하라 (9-14)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 연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시인은 위대하신 왕, 하나님의 도성에서 그분의 보호와 돌봄 아래 안전하게 거하는 백성이 해야할 일을 말합니다.
첫번째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들이 돌볼만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는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하겠습니까? 인자하심,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그 은혜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먼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이렇게 고백됩니다. 10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오른손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힘의 특징은 완전한 정의이고, 그분은 당신의 성품과 말씀을 따라 정의를 행하십니다. 정의가 충만하게 실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땅끝까지 미치게 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찬송도 땅끝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 백성은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위대하신 왕의 도성에 사는 백성이 해야할 두번째 일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평안히 그리고 즐거이 누리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도성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큰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시온 산은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들을 가리킨다면, 유다의 딸들은 예루살렘 주변이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에 그들의 치안과 경제를 의존하고 사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세번째로 위대한 왕의 도성에 사는 백성이 할 일은 시온을 돌며 그의 성벽을 자세히 살피는 일입니다. 12-13절을 보지요. “너희는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 보라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여기서 동사들을 주목해보십시오. (시온을) 돌면서, (그 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들을) 세어보고,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더 많이 더 깊이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시온을 돌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느헤미야 시대의 일을 기억하게 합니다. 바벨론의 군대에게 멸망을 당했던 예루살렘이 150여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폐허가 된 성벽에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제국의 성공한 관리로서의 자리를 내려놓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벽 재건을 완수한 뒤에, 유다의 지도자들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 무리로 나누어 성벽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돌게 했습니다(느 12:31-43). 느헤미야 12:31과 38절을 보지요.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 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이 멋진 행렬에서 그들은 이 시편을 노래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시온을 돌며 둘러보고, 망대들을 세어보고 성벽을 자세히 보았을 것입니다. 존 오웬은 성벽을 자세히 보라는 말씀에서 성벽을 다섯 가지로 적용했습니다. 성벽이 다음의 다섯 가지를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1)교회의 왕, 시온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2)허다한 하나님의 약속들, 3)교회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 4)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 5)하나님의 언약.
이것을 하나 하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는 돌아야 할 물리적 성벽이 없습니다. 우리가 돌면서, 둘러보고 세어보고 자세히 볼 물리적 시온산과 성벽과 망대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존 오웬의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찰스 스펄전이 말한대로, 우리는 교회의 기원, 특권, 역사, 안정, 그 영광을 읽고 자주 음미해야 합니다. 찰스 스펄전이 이렇게 말한 것은, 위대하신 왕의 도성인 시온은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사를 공부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의무와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면 주일 오후에 교회사를 강의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24-25년 전, 인도네시아 단중에님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교회사를 가르치던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는 매시간의 강의를 마친 뒤, 저는 학생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을 돌리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온을 돌며 둘러보고 망대들을 세어보고 성벽을 자세히 보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해야합니다.
끝으로, 시인은 이 모든 것을 ‘후대에 전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시온을 돌고 둘러보고 망대들을 세어보고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야 하는 이유입니다. 후대에 전하는 것 말입니다. 8절에서 시인은 선조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과 자신의 세대가 가진 책임을 심각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후대에 전하는 일, 이 일을 위해서 그들은 시온을 돌고 성벽을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향해, 자녀들의 세대를 향해서 들려줄 수 있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말은,“공부 잘 해라. 성공해라.”가 전부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앞선 세대로부터 진 빚을 갚기 위해서 후대들에게 그 말씀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결정적인 말은 이것입니다. 14절을 봅시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우리가 전해주어야 하는 말은, “위대하신 왕, 그분은 영원토록 우리의 왕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죽을 때까지, 아니 영원 영원히!”


5. 적용적 교훈
시편 48편의 중심은 성이 아닙니다. 그 성에 임재하셔서 그 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 성을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마 1:23). 그리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대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마 16:18).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b).”
이것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들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우리가 지금은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처소인 교회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이 지어져 가던 처소는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계 21:10-17).”
교회는 위대한 왕의 도성입니다. 파괴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은 지어져 가는 중이어서, 약하고 상처받기 쉽고 흔들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현실을 살아가면서,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거하시고 그 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 성을 완성하실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완성될 왕의 도성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교회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열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돌고 살피고 세고 자세히 보며 후대에게 들려줄 하나님의 이야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복된 믿음을 우리의 다음 세대로 풍성하게 전해줄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시편 90편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