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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9). 세상의 헛된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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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49). 세상의 헛된 영광

시편 49:1-20, 누가복음 12:13-21, 디모데전서 6:6-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11-06

말씀내용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6-8).” 인간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는 풀과 꽃이 영원할 수 없어 마르고 시들 듯이, 다 사라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 49편의 말씀을 그 영원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우리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세상 영광은 헛되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태도는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네 그렇습니다. 아멘”하고 인정하는 태도 말입니다.

1. 시편 49편의 맥락, 주제, 구조
오늘 상고할 시편 49편은 제2권이 시작한 ‘고라 자손의 시’라고 묶여진 단위의 마지막 시편입니다. 그리고 고라 자손의 시는 다시 84-85, 86-87편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앞의 48편의 마지막으로부터 이어지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48:14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그 주제는 ‘죽을 때까지’라는 표현에 드러난 대로 죽음 그리고 죽음 너머라는 주제입니다. 사실, 이 시편은 신자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죽음을 생각하는 것의 유익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는 동안, 신자들이 겪는 혼란, 환난의 문제를 죽음 또는 죽음 너머의 관점에서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5절 하반절에서 시인은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언급합니다. 그 환난의 날이 의미하는 것은, 경건한 자들, 하나님의 경외하는 성도들이 부자의 힘과 권력자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상황을 가르킵니다. 이렇게 본문은 세속주의의 허망함, 세상 영광의 헛됨을 가르칩니다. 한편으로는 세상 권력과 자랑을 좇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 의해 휘둘리는 경건한 자들을 향한 격려입니다. 동일한 메시지가 이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런 주제 때문에, 본문은 시편 73편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은 이런 문제로 거의 시험에 든 시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49편은 기도는 아닙니다. 이것은 전도서나 잠언을 생각하게 할만한 교훈시, 혹은 지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49편은 도리어 37편과 더 비슷한 성격을 가진 시편입니다. 시편 37편은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37:1-2)”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기심과 질투로 마음이 상한 경건한 자를 위로하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도 비슷하지만, 성도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말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뉘는데, 처음 네 절은 서론이라고 할 수 있고, 두번째 단락인 5-12절에서는 부의 한계를, 13-20절은 부의 우매함을 다룹니다. 두번째와 세번째 단락은 각각 12,20절의 비슷한 후렴구로 마무리됩니다. 12절을 먼저 보면,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리고 20절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입니다.

2.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말씀(1-4)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시인은 누구에게 말합니까? 그는 언약 백성에게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뭇 백성들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1). 이어서 그는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2). 즉 이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복음이 세상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고 들려져야 하듯이, 시인은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이들에게는 경고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격려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이들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입니다(고후 2:16).
이제 시인이 들려줄 경건한 가르침은 지혜, 명철, 비유, 오묘한 말로 표현됩니다(3-4). 우리는 이 각각의 단어의 의미를 특별히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지혜는 세상 지혜가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돈 버는 지혜, 성공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늘의 지혜,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말합니다. 여기 비유라는 말은 잠언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말이고, 오묘한 말은 수수께끼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데, 삼손이 낸 수수께끼 같은 의미라기 보다 깊고도 중요한 진리를 의미할 것입니다. 가령, G.K.체스터턴이 “모든 삶이 하나의 수수께끼(오묘한 말)이기 때문에 욥기는 위대하다.”라고 말한데서 사용한 의미와 같을 것입니다. 여기에 피터 크레이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수수께끼에 대한 쉬운 대답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갈 지혜는 있다. 지혜교사, 시인이 풀려고 하는 또는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이제 시인은 5절부터 그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을 줄 것입니다.

3. 부의 한계--죽음을 바라보라(5-12)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노년의 시기를 맞을 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절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연금이나 물질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그런 준비를 잘 한 사람들을 보며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박탈감이나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것을 넘어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행해지는 부정함과 부당함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청중 혹은 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5절입니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사실, 이 질문은 6절과 연결됩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들로 인한 환난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말하는 ‘환난의 날’은 특별히 악인들이 주변에서 자기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약자들을 힘들게 하는 때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직역하면, ‘내 발꿈치의 죄악’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가는 길에 숨어 있다가 덮치는 뱀처럼 공격하는 죄악을 말합니다. “눈 뜨고 코 베어간다”는 속담이 있지요. 그만큼 인심이 흉하다는 말인데, 시인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가진 자들이 더하고, 그들은 더 잔인하게 약자들을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억압하고 강탈합니다. 이것은 21세기 한국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살고 있던 이스라엘 역사 속의 한 시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사람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본성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참으로 악합니다. 4절에서 말한 ‘죄악’은 히브리어로 ‘아웬’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주로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가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들에게는 일반적으로 거짓된 확신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한다는 6절의 표현에서 드러나는데, 그 재물과 그 부유함이 자신들의 인생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재물’이라고 할 때 재물은 사실 돈이나 물질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재물 외에도, 군대, 재상, 용맹한 용사, 지주, 상류층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 시인은 재물이라는 단어 하나로, 세상의 권세와 지위와 부를 모두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특징은 그 ‘재물’이 자기 인생을 보장한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거짓 확신은 11절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자기들의 집과 거처가 영원하고 대대에 이를 것이라고 착각하기에, 그들은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는 시도를 합니다(11). 자기 이름으로 등기하고 자기 이름의 길을 만들고, 기념비를 만드는 등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애를 씁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런 착각, 거짓된 확신에 머물러 살아가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런 거짓 확신에 이끌려 행동하시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그야말로 착각이고 거짓 확신입니다. 그 이유를 7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7-9절은 그 재물과 그 부유함으로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어떤 은금으로도 구입될 수 없을 만큼 값비싸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적은 금액이라도 평생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어서 영원히 갚을 수 있다면 모르겠습니다마는,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말씀한 것이, 9절입니다.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자기의 재물과 부를 의지하고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그것으로 자기 영혼 하나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단락에서 강력한 펀치는 10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모두 죽습니다. 지혜 있는 자도,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죽고, 부자도 죽고 권력자도 죽습니다. 그때 부자는 그 자랑하던 재물로 자기 생명을 연장시키지도, 자기 영혼을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로 기독교를 유난히 공박했던 볼테르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대단한 부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죽음은 찾아왔습니다.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 의사에게 부르짖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내 생명을 6개월만이라도 연장하여 줄 수 있다면, 내 재산의 절반을 주겠소.” 그의 재산 절반이 아니라 전부였다고 할지라도 이 똑똑한 사람의 생명을 단 1분도 연장시킬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이 땅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 남겨주고 가야 합니다. 어떤 부도, 어떤 권력도 죽음 앞에서는 헛되고 무용합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시인은 이 단락의 결론을 말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재물은 가졌지만, 명철이 없는 사람의 인생은 멸망하는 짐승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자의 죽음과 짐승의 죽음은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세상의 영광은 헛되다는 말입니다.

4. 부의 우매함--죽음 너머를 보라(13-20)
이제 시인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제 시인은 죽음 너머를 바라보게 합니다. 앞에서 가르친 교훈을 통하여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은 영원의 관점에서 세상의 화려함과 그 영광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13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단지 짐승 같은 삶은 단지 어리석은 자들만의 길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이 가는 길이기도 하다는 이 말씀은 두려운 말씀이 아닙니까? 자기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들을 보고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하는 자들도 같은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제 극명하게 다른 두 인생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14절은 어리석은 자의 결말을, 15절은 지혜롭고 경건한 자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먼저 14절을 봅니다.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시인은 사람을 양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들을 스올, 곧 죽이기로 작정된 자요, 무덤에 들어가기로 작정된 양들이라고 말합니다. 섬뜩하게 무서운 것은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낮에는 배부른 양처럼 보이지만, 밤마다 그들은 우리 안에서 학대당하는 양들입니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잡아먹히기 위해서 길리움을 당하는 양들입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이것은 단순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기정 사실입니다), 정직한 자들이 그들을 정복하고 발로 밟을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자랑하던 재물과 부유함의 아름다움은 그 빛을 잃고 소멸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완전히 다른 인생의 결말이 이어서 주어집니다. 15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세상 최고의 부자가 그의 가진 재물과 권력을 다 준다고 할지라도 자기 영혼 하나 구원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영접하시고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로운 자의 미래는 악인의 미래와 정반대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영접하시리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아무 방해도 받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삶을 묘사하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영접하신다’는 단어는,“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고 할 때, ‘데려가시므로’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교제는 세상의 모든 부자, 권력자들의 압제를 넘어 존재하고, 그들로 인해 빼앗길 수 없으며, 죽음의 경험을 넘어서도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제 이렇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16절입니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시인은 이 시편을 이런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5).” 이제 더 이상 이런 두려움으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치부하는 자는 부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하는 자는 권력을 가진 강한 자입니다. 그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불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하나님의 백성들, 성도들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음에 삼켜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도 힘도 다 한 철, 한 때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시인은 앞에서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4)”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남은 네 구절은 그 수수께끼를 푸는 말입니다.
17절을 보지요.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단순히 죽는 게 아니라,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가는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가 가지고 누리던 모든 영광이 있었어도 그 영광이 그를 따라 음부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덤의 화려함이 그 속에 죽어있는 영혼에게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입니까? 죽음 앞에서는 재물도, 권력도 소용없습니다.
이어지는 18절을 봅니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는 동안에 자기를 축하하고 축복하며 자기를 꾸미고 치장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칭찬과 칭송을 받았을지라도 그것 조차 죽음 앞에서는 소용이 없고 헛될 뿐입니다. 온 세상이 그의 성공을 축하하고 칭송했을지라도 말입니다. 19절에서 말씀하듯이, 그들의 모든 빛은 다 영원 속에서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20절에서 다시 한 번 12절에서 내렸던 결론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여러분은 과연 깨닫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시인을 통하여 주시는 지혜와 명철을 깨닫습니까? 존귀해도, 재물을 가지고 부유함을 자랑해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인생은 어리석어서 멸망하는 짐승과 진배 없다고 말합니다. 짐승은 자기의 죽음을, 혹 죽을 날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고 또 준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의 재물, 성공, 명예, 권력을 가지고 그것을 의지하고 자랑하면서 거짓된 확신에 빠져 살아가는 자들은 짐승과 같은 인생일 뿐입니다. 이것은 이런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이점에서 충분히 안전합니까?

5.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라(눅 12:13-21)
시편 49편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 자기 형이 자신과 유산을 나누게 말씀해달라고 청합니다. 주님은 거절하시면서,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넓은 밭을 소유했고 소출도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7-19).” 하나님께서는 그 날 밤 그 어리석은 부자의 생명을 취하셨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고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다. 하나님께 부요한 것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만 유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유익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세상의 영광은 헛된 것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피었다가 마르는 풀과 같고 지는 꽃과 같습니다. 그 물질이 내 인생이 많이 주어지지 않아서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그 물질이 내 인생에 많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하고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도 마십시오. 세상의 재물, 세상의 헛된 영광, 그것들이 여러분의 삶에 주어졌던 주어지지 않았든 그것에 부심하며 살지 마십시오.
바울 사도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주는 목회적 권면의 결론부에 있는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그러므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여러분의 경건은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딤전 6: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함을 배우는 것,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우리는 배워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요체입니다. 그런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