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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1)A. 회개와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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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1)A. 회개와 용서

시편 51:1-19, 요한일서 1: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11-20

말씀내용
시편에 있는 7개의 참회시 중(6,32,38,51,102,130,143), 51편은 가장 널리 알려진 참회시입니다. 51편은 표제가 보여주는 대로, 다윗이 밧세바와 붑법적으로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와서 죄를 지적했을 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삼하 11-12장). 이 시편은 교회 역사에서 많은 경건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추악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은혜를 구하며, 용서의 은혜를 입은 뒤에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 이 시편은 자신의 죄의 무게를 인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모어 경(1475-1535)과 레이디 제인 그레이(1537-1554)가 사형대에 오를 때, 이 시편이 읽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캐리(1761-1834)도 자신의 장례식에서 이 본문으로 설교해주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1. 죄의 본질을 인정하다(롬 3:23; 막 1:15).
왜 그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이 시편을 기억하기를 원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인간이 가진 죄의 실존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칭송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본문 1~2절에서 자기 죄를 지워주시고 말갛게 씻어 주시고 깨끗이 제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죄가 항상 자기 앞에 있다고 고백하며(3), 심지어 5절에서는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고 어머니가 죄 중에 자기를 잉태하였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비록 밧세바를 불법으로 취하고 이 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음에 던져 넣은 추악한 죄를 범했다고 하지만, 그의 고백을 보면, 단지 자신이 지은 죄만을 특정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의 성격과 본질을 충분히 알고 있고, 또 근본적으로 자기 본성 안에 지울 수 없도록 깊이 새겨져 있는 죄의 자국을 고백합니다.
먼저, 다윗이 어떻게 죄를 인식하고 있는가를 보지요. 1-2절에는 죄를 의미하는 단어들이 적어도 세 종류가 나옵니다. 먼저, 1절에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라고 할 때, ‘죄악’이 나옵니다. 이것은 경계를 넘어가는 것, 규율을 범한다는 뜻인데, 의도적 반역이라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이것은 군대에서의 ‘항명’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단어로써, 다윗은 자기가 하나님께 의도적 반역을 행했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4절에서 그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표현하는 부분도 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밧세바와 우리야에게 범죄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가 범한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3절에서 “내가 내 죄과를 아오니”라고 할 때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두번째로 다윗은, 2절에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라고 말할 때, ‘죄악’이라는 말을 또 사용하는데, 히브리말로는 1절에서 말한 ‘죄악’과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부패, 타락의 악한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기준과 길에서 벗어난 삶입니다. 5절에서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라고 할 때,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세번째로, 2절 하반절에,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할 때, ‘죄’입니다. 이 단어는 죄를 묘사하는 가장 포괄적인 단어로서, ‘과녁에서 빗나가다, 또는 미치지 못하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했을 때, 정확히 같은 개념을 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절에서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할 때, 이 단어가 또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죄를 의미하는 세 종류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기가 지은 죄의 본질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악을 인정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구원과 죄사함의 감격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회개가 없기 때문이며, 회개가 없는 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죄의 본질을 거의 알지 못하고 직면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은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4). 이런 죄에 대한 인식을 가진다면,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고백합니다(4). 이 말은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야에게 범한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첫번째 의미의 죄악, 즉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는 죄의 무거움을 하나님 앞에서 인식하는 사람의 고백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거꾸로 죄를 인식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웃에게 범한 죄를 뼈저리게 인식한다고 할지라도, 그 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깨뜨린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웃에게 범한 죄를 인식 하는 데서 나아가, 하나님께 범한 죄악의 크기와 무게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이 무게가 그를 가장 크게 짓누르는 두려움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윗은 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죄인의 도덕적 무능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나는 나의 어머니 모태로부터 죄악의 상태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의 죄책을 변명하려는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6절에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은 해석이 쉽지 않은 구절이기는 하지만, 대략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죄속에서 잉태되었지만 주님은 태속에서부터 신실함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비밀스러운 곳(어머니 자궁)에서 저에게 지혜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NIV의 번역을 따른 해석입니다. 즉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부응하지 못했고 반역을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회개는 자기 죄악과 그 본질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회개는 죄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고, 그 죄가 타인에게 끼친 고통과 그 참혹한 결과를 슬퍼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휴 마틴(Hugh Martin)의 말입니다. “참된 죄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죄책을 씌우는 것이다. 그것은 죄의 가증함과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우리의 당연한 책임, 변명할 수 없는 대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4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공정하고 순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셔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에서 회개가 사라져버린 것은 큰 비극입니다.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는데(막 1:15), 회개는 사라지고, 오직 믿음만을 말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회개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매주일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죄사함의 체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사실, 이들은, 로이드존스가 말했듯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찾을 수 있는 위대한 구원을 체험하기 위해서 해야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와 회개의 주제,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 핵심적인 이 두 가지 주제는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간과되거나 축소되어서는 안 되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주제들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성품이 회개의 근거다(눅 15:21; 시 86:5).
누가 회개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자기 죄악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두번째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악을 지워주시고 씻으시고 제하여 달라고 구하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1절에서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헤세드에 기대어 죄악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으로, 그리고 은혜와 긍휼에 기대어, 자기의 그 모든 죄악을 고백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모든 회개의 근거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인자하심, 은혜와 긍휼입니다. 다윗이 지금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며 나아가는 모습은 거의 주님의 비유 가운데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눅 15:21).”
말하자면, 죄용서를 구할 수 있는 어떤 자격도, 요구할 어떤 권리도 없는 존재가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참된 자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여 구체적으로 간구합니다. 죄가 세 가지로 묘사되었듯이, 다윗의 간청도 세 가지로 표현됩니다. 1절에 ‘지워 주소서,’ 그리고 2절에, ‘씻으시며’와 ‘제하소서’입니다.
먼저 1절에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에서, ‘지우다’라는 말은 완전히 파괴하고 없애 버려 주시기를 구하는 말입니다. 둘째로 ‘말갛게 씻으시며’는 옷을 빨래할 때 사용하는 단어 그대로입니다. 얼룩이나 때가 하나도 남김이 없도록 빡빡 빤다는 개념입니다. 죄의 얼룩이 하나 남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깨끗이 제하소서’는 제사용어로서 정결 의식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정결하게 해주셔서 다시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청원은, 육체적으로도 죄의 영향력, 그 자욱에서 벗어나고 영적으로도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회개의 간구를 드릴 수 있음은,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소망을 품고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시편 86:5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아멘!!!


3.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속한다. (레 14:1-9; 요일 1:9)
다윗은 비록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1000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자신의 속죄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7절을 봅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우슬초는 첫 유월절 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벗어나던 밤, 그 백성의 집 문의 좌우 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사용되었습니다. 돌 틈이나 담벼락에서 자라는(왕상 4:33) 우슬초라는 작은 식물은 가지들이 많고 줄기에 털이 많아서 오늘날의 스폰지처럼 물을 잔뜩 머금는 성질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 우슬초가 다음으로 나오는 장면은, 나병 환자가 다 낳아서 정결 의식을 가질 때입니다(레 14:1-9). 새 두 마리를 가져와서 한 마리를 흐르는 물 위에 질그릇 안에서 잡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새와 우슬초를 함께 그 피에 적십니다. 우슬초로 적신 피를 정결하게 될 사람에게 뿌립니다. 그리고 피를 묻힌 살아있는 새는 들에서 창공으로 날아가게 합니다. 이 날려보냄은 나병으로 상징되는 죄악이 완전히 다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다윗이 우슬초로 정결하게 해달라고 구할 때, 그는 자신의 부정함과 죄악을, 나병과 같은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죽은 새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을 때, 그의 피는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어 속죄의 은혜를 얻게 합니다. 비록 구약의 인물이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들을 통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구약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죄의 본질과 무게와 깊이를 인식한 사람은 죄사함의 기쁨과 은혜를 그만큼 누립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 무엇이 즐겁고 기쁜 소리이겠습니까?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소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겪은 고통을 묘사하면서, 그는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일서 1:9을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은 자백과 죄사함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살면서 죄를 짓습니다. 이 말은 “그러니 죄는 아무 것도 아니야”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다윗이 느꼈던 것처럼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죄를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다윗이 1-2절에서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언급합니다. “그는 미쁘시고(신실하시고) 의로우사”라고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어 신자는 자기의 죄를 자백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하여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죄의 자백과 죄사함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사함의 직접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피 흘려 죽으심입니다. 그리고 자백은 믿음의 표현으로서, 도구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백을 통해서, 신자는 아버지와의 소원한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다윗이 간구한대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12).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자백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써, 그의 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장 3항은 회개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비록 회개가,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인 죄를 위한 어떤 만족이나 죄용서의 어떤 원인으로 의지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은 모든 죄인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회개가 죄용서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언제나 우리 신앙 생활에서 오해되기 쉬운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회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모든 죄인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죄를 슬퍼하고 그 결과로 인해 슬퍼하며, 그것이 하나님께 행한 반역임을 인식하고 죄를 자백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매우 필수적’입니다. 그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찡그리신 얼굴을 활짝 펴시고 우리를 향하여 미소를 지으실 것입니다.


4. 참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약속(롬 1:18)
마음을 쏟아 오늘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은 다윗이 고백하는 그 고백에 공감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적어도 밧세바를 불법적으로 취하고 그 남편을 죽이는 간음과 살인 같은 죄는 짓지 않았지”라고 생각하며 안심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넘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고백에서(5)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가 실로 큽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95개 신학논제의 제1번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이고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명하셨을 때, 그분은 신자의 전생애가 회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셨다.” 싱클레어 퍼거슨도 말합니다. “회개는 전 생애의 특징이지, 한 순간의 행위가 아니다. 구원은 우리가 실제로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여러분이 평생 그리고 매일의 삶에서 회개를 잊어버리고 살아가신다면, 매일의 삶에서 죄로부터 건짐을 받는 삶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임을 증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무감각하고 무감동한 삶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우리 앞에 드러내 줍니다. 잊어버리고 살면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할 만한 문제일지 모릅니다.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 한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의 서두에서 말씀한 대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제외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롬 1:18). 그러나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고,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는 살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좇아 그 은혜를 구하고 긍휼에 기대어 죄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윗이 참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믿었습니까? 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 약속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모든 자를 향한 자비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십시오. 오늘 밤, 그리고 내일, 또 그 이튿날, 계속해서 일평생,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은혜를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