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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1)B. 회복과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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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1)B. 회복과 사명

시편 51:10-19, 누가복음 19: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12-04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번 시편 51편 강해에서’회개와 용서’라는 주제로 1-9절의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참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의 본질과 성격을 분명하게 자각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 그리고 언약적 사랑, 은혜와 긍휼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고 신뢰함으로써 회개를 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회개와 죄사함의 근거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회개는 일생에 한 번이나 두 번이 아니라, 평생 신자의 삶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본문에 이어서 오늘은 10-19절의 본문을 살펴볼텐데, 그 주제는 ‘회복과 사명’입니다.
지난 설교의 주제인 ‘회개와 용서’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주제인 ‘회복과 사명’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신자가 회개를 통해 죄용서의 은혜를 입게 되었을 때, 그냥 거기서 끝날 수는 없습니다. 죄용서를 경험한 신자는, 혹은 죄용서를 간구하는 신자는 죄용서 이후에 자신의 회복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죄용서를 받고 풀려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회복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다시 감당하는 자리로 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회개와 용서에 따르는 중요한 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참회시인 시편 51편은 이점에서 이 모든 요소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회복에의 간구(10-12)
10-12절은 회복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앞의 9절까지만 하더라도, 다윗은 “내 모든 죄악을 지워주소서”(9b)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0-12).”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구합니다. 성령을 거두지 말아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간구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범죄하기 전에, 자신이 하나님과 바르고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가졌던 모든 것입니다.
다윗이 10절에서 ‘정한 마음’을 창조하여 달라고 구하는 것은 죄용서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정한 마음’은 모든 죄와 부정함을 지워주시고 말갛게 씻으시며 깨끗이 제하시고 정결하게 하신 결과로 주어지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라고 간구합니다. ‘창조하시고’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사용된 단어로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다윗은 옛적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기적을 행하셨던 것처럼, 죄로 찌든 자기 삶에 선을,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시는 기적을 행하여 자기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 간구에서 ‘창조하시고’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렇게 다윗의 특별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즉,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것을 자기 속에 이루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다윗은 자기가 구하는 그것, 정한 마음을 자기 안에 주시는 것은, 자기 같이 죄로 인해 더럽혀지고 부패한 존재에게 정한 마음을 주시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맞지도 않으며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감히 구할 수도 없는 것을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신뢰,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구하는 것이 도무지 합당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와 긍휼에 기대어 정한 마음을 구합니다.
저는 이 말씀, 다윗의 이 간구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께 정한 마음을 주시기를 구할 때, 마땅히 주셔야 하는 것처럼, 제가 그 정한 마음에 어울리는 사람인 것처럼, 혹은 그것을 구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것처럼 생각하면서 구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정한 마음, 깨끗한 마음, 순결한 마음을 구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마음은 언제나 죄악으로 인해 더럽혀지고 오염되고 망가집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간구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간구할 때, 우리 자신이 그것을 감당하거나 담아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한 마음과 함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여기서 ‘정직한’이라는 말은, ‘견고하다, 심지가 굳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이런 정직한 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죄악을 저지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범죄를 뼈저리게 아파하며 느끼고 있기에, 자기 안에서 무너져버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새롭게 하소서’라는 말은 말 그대로 회복하고 갱신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10절에서 다윗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서 간구한 것입니다.
그의 회복을 위한 간구는 11절에서도 이어집니다. 자신을 주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기를, 그리고 성령을 거두지 마시기를 구합니다. 이 두 가지 간구는 연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당신의 면전에서 쫓아내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서 성령을 거두어가실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다윗의 이 간구는 처절한 간구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어가실 때 일어날 수 있는 비참하고 처참한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울 왕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14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을 떠나시자,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하기 시작했고, 사울은 종종 미쳤으며, 결국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사울의 가장 가까이서 수금 타는 자로서, 부하 장수로서, 쫓기는 도망자로서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가시는 것을 두려워했고, 지금 그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사울에게서 성령을 거두어가셨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불안한 구원이며 언제라도 우리가 잘못할 때 우리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구약시대에 사울에게 임하셔서 역사하신 것은, 그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물론, 사울은 다윗을 잡으려고 사무엘이 있는 라마나욧으로 갔다가 성령이 임하여 무아경에 빠져 벌거벗고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삼상 19:23-24). 그러나 이것은 모두 성령의 구원하시는 역사 또는 중생의 역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이 간구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다윗이 성령을 거두지 마시기를 구할 때 그는 성령이 아직 여전히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안에 계신 성령님을 거두지 말아주시길 간구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경우에 있어서는, 다윗의 간음과 살인의 범죄 조차도 다윗을 향한 은혜로운 견인을 위협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회복을 위해서 간구하는 세번째 내용은 12절인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가 범죄하였을 때, 그가 누리던 구원의 즐거움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고 다시는 누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죄악은 신자 안에 있는 구원의 즐거움을 앗아갑니다. 그리고 죄악이 우리 안에서 앗아가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 기쁨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원하는 심령을 간구합니다. 죄악은 얼마나 많은 은혜의 혜택들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얼마나 비참한 심령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지를 보십시오. 다윗은 그것을 절절이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회복되는 길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 없는 회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회복의 간구를 10절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가 회복에 선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2. 결심과 맹세(13-17)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두번째 단락으로 들어갑니다. 13-17절입니다. 이 단락은 참으로 회개하는 자의 결심과 맹세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고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면, 이런 삶을 살겠다고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13-15절을 보지요.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먼저 13절은 ‘그리하면’이라고 시작합니다. 이것은 10-12절에서 간구한대로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며, 주의 성령을 거두지 않으시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신다면, 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다윗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리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죄인들이 자신이 주께로 돌아온 것처럼 그들도 주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상처 입은 치료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하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위선자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다시 한 번 ‘피흘린 죄’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14). 피흘린 죄는 포괄적으로 죄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죄악의 형태들을 암시합니다. 앞에서 ‘주께만 범죄하여’(4)라고 말한 다윗은 자신의 죄악이 결국 우리야를 죽인 죄요, 사람을 해한 죄임을 고백하는 셈입니다. 주께서 자신을 그 죄에서 건져주실 때, 그는 자기의 입술로, 혀로 주의 의를 찬송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찬송 조차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5). 다윗은 위대한 시인이었고 음악가였고 하나님을 위한 찬송을 짓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입술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주를 찬송하고 전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바로 지금,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하고 전파해야 할 자신의 입술이 닫혔고 혀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윗이 16-17절에서 하는 고백은 놀라운데, 어쩌면 시편 51편에서도 백미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6절은 다윗이 모세 율법에서 살인죄와 간음죄를 속하는 제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 시대에 이런 죄를 고의로 범한 자들은 죽음의 징벌 외에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장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모세의 율법이 어떤 용서도 제공할 수 없는 두 개의 죄 즉, 살인죄와 간음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질 것은 죽음의 형벌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알았던 것은, 아무리 값비싼 희생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할지라도, 참회하는 마음—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없이 드려지는 모든 제사는 결국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는 제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옳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세 율법의 제사나 번제로가 아니라,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버린 항아리를 연상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여기 ‘통회하다’는 단어는 ‘부수다. 뭉개지다, 산산조각으로 으깨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쓴 책 가운데에는 『상한 심령으로 서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존 번연 생애의 마지막 작품인데, 시편 51:17을 본문으로 쓴 책이고 그 원제목은 [상한 심령의 탁월함 The Excellency of a Broken Heart] 입니다. 다윗이 알았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최고의 제물, 하나님께서 가장 탁월하게 여기시는 제물은 ‘상한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깨어지고 무너진 심령,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목말라하는 영혼,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에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의 상태야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최고의 제사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16-17절은 다윗이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너무나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는 영혼은 없을 것입니다. 죄인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사실 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는 우리가 지을 수 있는 그 어떤 죄보다도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덮지 못하시고 사하지 못하실 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비록 그것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일지라도,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자비하시고 긍휼에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그 죄악을 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미가서에는 이와 비슷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본문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
여기서는 상한 심령이라고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상한 심령이 낳는 열매, 곧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맏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보다(물론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를 받지 않으시지만) 값진 것이고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3. 교회의 회복을 구함(18-19)
정말 놀라운 것은, 이 시편의 마지막 종결 부분입니다. 18-19절입니다. 왜 제가 놀랍다고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먼저 18-19절을 보지요.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은 자신의 참회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공동체의 회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놀랍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악은 물론 왕의 죄악이기에 무겁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 개인의 죄로서도 그것이 한 개인의 죄로 끝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개인의 죄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그는 압니다. 그것은 다윗에게는 이스라엘 국가요 백성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것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경고한 바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b).” 아무리 작은 죄도 공동체를 해치게 되고 허물게 됩니다. 공동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렇습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고통을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사례를 아간의 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간은 여리고성이 하나님께 바쳐진 바 되었음에도, 탐욕에 눈이 어두어 여리고성에서 자기가 원하는 물품들을 몰래 취하여 감추어두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군대는 아이성의 전투에서 36명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 7:11을 보지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간이 범죄하였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이 범죄했고 그들이 언약을 어겼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진노하셨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라고 구합니다(18). 공동체의 평안과 번영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가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 예루살렘에 참된 예배가 회복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그 때에’는 언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회복시키시고 그가 회복된 자로 하나님께 구했던 삶을 살아가게 되면, 그때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과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회복될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 말씀은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이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입니까? 혹시 우리 개개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예배를 더럽히고 공동체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거룩한 성전입니다. 우리는 죄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적은 누룩이 온 교회를 더럽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세운다고 생각하면서 혹은 교회를 허무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무너지고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식하고 살아가십니까?

4. 회개는 시작이다.
우리는 다윗의 참회시인 시편 51편을 두 차례에 걸쳐 상고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한 후반부의 말씀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결론적 교훈을 얻습니다. 그것은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회개는 회복을 가져오고, 회복은 다시 순종을 낳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총을 간구한 다윗은 회복을 위해서 간구합니다. 그리고 회복될 때, 자신이 어떤 회복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게 될지를 말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용서의 결과만을 낳고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위대한 시작이 됩니다. 단 한 번의 시작이 아니라, 평생의 삶에서 범죄하고 넘어질 때마다 회개는 신자의 삶의 시작이 됩니다. 회개는 죄용서를 넘어 순종의 삶을 가져옵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가 주님을 만났을 때, 그리고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을 때, 그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복음서는 많은 내용을 생략하여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삭개오의 이 말 한 마디로, 그가 주님 앞에서 참된 회개로 나아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마현 그의 이 고백은 오직 회개로써 맺는 열매인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윤리 실종의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왜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회개 없는 기독교, 회개 없는 믿음을 말해왔고 그 자리에서 거듭남 없는 교회성장을 추구해온 열매일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크게 한국교회만의 문제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 자신의 문제이고 우리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회개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회개 없는 봉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회개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회개가 맺는 순종의 열매를 거두십시오. 회개의 은혜가 늘 범죄하고 넘어지기 쉬운 우리 삶의 회복의 시작이 되게 하십시오. 이런 복된 은혜로 우리 인생을 찾아오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을 맛보고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