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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2). 악인의 삶 대 의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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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52). 악인의 삶 대 의인의 삶

시편 52:1-9, 야고보서 3: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9-12-11

말씀내용
시편 52편은 악인들이 오만방자하게 득세하는 것을 목전에서 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려움 가운데 처해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갈 것을 권면하는 주의 말씀입니다. 어떤 시편들은 표제어를 통해 그 시편이 쓰여지게 된 상황을 설명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52편이 그중 하나입니다. 이 시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표제어는 사무엘상 22장 6절 이하의 상황을 가리킵니다. 다윗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점점 더 강박적이 되어가던 사울은 급기야 자기 신하들이 다윗과 내통하여 자기를 치려 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울의 목자장이었던 에돔 사람 도엑이 한 사건을 고발하게 됩니다.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놉으로 도피하던 다윗에게 음식과 골리앗의 칼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도엑은 신하들에 대한 사울의 의심이 사실이며, 다윗과 내통한 자가 바로 대제사장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사울이 자기 의심을 확증하도록 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놉의 제사장들을 모두 소집하고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다윗과의 공모죄를 뒤집어 씌워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85명의 제사장을 학살합니다. 제사장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호위병들이 두려워 감히 제사장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지 못하자, 사울은 도엑에게 명하여 제사장들을 죽이게 하고 도엑은 결국 제사장 85명을 학살하는 일을 집행하게 됩니다. 사울은 이외에도 놉에 있는 남녀, 아이들, 젖먹이들까지 그리고 소와 나귀와 양들까지 모두 죽이는 광기를 드러냅니다. 거기서 간신히 도피한 한 사람은,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었습니다.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 이르러 자초지종을 말하게 되었을 때, 다윗이 한 말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삼상 22:22-23).” 다윗으로서는 얼마나 황망한 일이었겠습니까? 이것이 시편 52편의 배경으로 사무엘서가 기록하는 정황입니다. 다윗은 그 때 이 시편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52편을 읽을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도엑이라는 악한 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엑과 같이 거짓으로 말하는 악한 자의 인생과 대비되는 의인의 인생을 또한 소개합니다. 악인의 삶과 의인의 삶의 특징은 어떻게 다른지를 성령의 영감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52편은 세 부분을 나눌 수 있습니다. 1-5절은 악인의 삶을 묘사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6-7절은 그런 악인의 삶을 비웃은 의인이 묘사되고, 8-9절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삶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그리고 의인의 삶은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를 보여줍니다.


1. 악인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을 만난다(1-5).
악인의 삶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필연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악인의 삶이 하나님의 심판을 만난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먼저 악인의 삶을 1-4절에서 묘사합니다.
1절은 ‘포악한 자여!’라고 시작합니다. 우리 말로는 그냥 “악인을 묘사하는구나” 생각하게 되지만, 히브리 말로는 이 말이 “너 위대한 영웅이여!’라고 읽혀질 수 있고 그렇게 읽히는 것이 마땅합니다. ‘포악한 자’는 위대한 영웅, 용감한 용사, 심지어 공동체에서 존경을 많이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다윗은 냉소적이고 반어적으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이 보통 자기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고 그런 영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를 향해서 다윗은 “너,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영웅이 된 자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지푸라기에 불과한 존재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떠들고 자랑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이미 자기를 높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하는 일을 먼저 이렇게 묘사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여기서 다윗이 정죄하는 악인의 모습은 대개 악인의 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보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악인이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한다’는 말을 반드시 사람들 앞에서 떠벌리는 것만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보여주는 악인의 특징의 초점은 자기 기만적인 자기 만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므로 기고만장하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절 하반절은 조금 의아해 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 혹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어서 말하는 대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한편 이런 악인을 즉사시키지 않으시고 참아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자들의 득세함 앞에서 무력한 경건한 주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다윗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억울하게 사울에게 죽임을 당한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온 집안을 생각할 때, 이런 억울한 학살 앞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언약적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면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도다”라는 이 고백은 정말 뛰어난 신앙 고백입니다. 그는 ‘항상’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가 평안할 때에는 존재하고 설명할 수 조차 없는 비극을 경험하고 있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습니다.
2절에서 다윗은 계속해서 악인을 고발하고 정죄합니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악인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에 있는 악한 마음을 먼저 말로써 행사하고 표출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날카로운 삭도—면도날—같아 거짓과 속임수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도엑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3절을 보지요.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 이것이 악인의 중심과 태도입니다. 이 말씀은 악인의 행동은 결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악인은 선보다 악을 사랑하는 의지적 선택으로부터 거짓을 말하여 사람들을 해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짓은 실수가 아닙니다. 도엑이 사울 왕의 신임을 얻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제사장들을 모함한 것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악인들은 언제나 선택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4절은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3절을 부연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것은 말로써 남을 해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모든 악인의 죄악은 말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도엑도 말로만 거짓을 행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칼을 들어 제사장 85명의 학살을 집행하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주목한 것은 설령, 악인들의 죄악이 실제 칼로써 누군가를 해쳤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떠나, 이미 그들은 말로써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도엑 같은 악인들을 향한 다윗의 고발장입니다.
5절은 그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다윗은 이런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의 심판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백합니다. 악인들이 기고만장하여 자신들을 속이고 제멋대로 떠들고 말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다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도 항상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당장 눈 앞에는 악인들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을 보지만 신자는 이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5절에 사용된 동사들은 점점 그 강세가 심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처음에는 영원히 멸하신다고 말합니다. 영원히 지속적으로 멸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악인을 붙잡아 그 장막에서 뽑아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땅에서 그 뿌리를 빼실 것입니다.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위대한 영웅’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5절을 가리켜 스펄전은 ‘하나님께서 악인의 장례식장에서 읽어주시는 추도사’라고 불렀습니다. 섬뜩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의인이 악인을 비웃는다(6-7).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의인은 득세하는 악인을 두려워하거나 그들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행위를 비웃을 수 있습니다. 6절입니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두려워 함은 악인들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물론 아닙니다. 의인들은 5절에 말씀한대로 악인들이 한 순간에 몰락하게 될 심판을 믿고 그것을 생각함으로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이로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을 비웃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우리의 눈 앞에 득세하고 호언장담하며 기고만장한 악인들이 있을지라도, 의인들은 결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웃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인들이 하는 말을 7절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이 말에서 우리는 하나의 언어 유희를 발견합니다. 1절에서는 악인을 향하여 ‘위대한 영웅이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사람은’이라고 말합니다. 그 영웅은 그냥 깨어지기 쉬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한 마디도 할 수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멸망당하고 장막에서 뽑히며 살아있는 땅에서 뿌리째 뽑힐 인간에 불과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은 자들입니다. ‘힘’은 요새, 성채, 안전한 장소, 피난처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와 숨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언제나 숨는 곳은 자신들이 모아놓은 재물의 풍부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재물의 풍성함을 믿고 산 자들이 악인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 악인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사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방식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은퇴자금을 모아놓고, 혹은 은퇴계획을 세워놓고 기뻐합니다. 자신의 은행 잔고를 보며 또는 자신의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것으로 즐거워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지난 주일의 설교를 기억하시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아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물질을 축적함이 아니라 세월이 흐를수록 사랑을 축적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물질을 많이 모으는 것이 신자들의 인생의 성패를 결정짓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든지 혹은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를 맡기셨든지 그 맡겨주신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부르심입니다. 다윗도 동일한 것을 성령의 영감으로 여기에 기록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그들은 남을 짓밟고 악을 행함으로 자기 위치를 공고히 하였습니다.


3. 감람나무 같은 의인의 삶 (8-9)
하지만, 의인의 삶은 다릅니다. 지금까지 악인의 죄악과 특성 그리고 그들의 비참한 결과를 주로 묘사했던 다윗은 이제 8-9절에서 의인의 삶을 묘사합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아마 의인을 묘사할 때 사용하고 싶은 이미지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령의 영감으로 그 중에서도 감람나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우리에게 감람나무는 생소하기에, 그 이미지가 드러내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감람나무는 극단적 날씨와 가뭄과 홍수를 가장 잘 견디는 나무라고 합니다. 의인들은 모든 어려움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결코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또한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오래 사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거의 천 년까지도 산다고 합니다. 악인들의 순간적인 번영에 비교할 때, 의인들의 번영은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감람나무는 그 열매와 기름으로 사람들과 짐승들에게 유용한 나무입니다. 한 그루가 내는 올리브유는 보통 20리터 이상인데 이것은 식용 뿐 아니라 의약품, 등유, 미용 등 다용도로 사용되는 유용한 기름입니다. 그래서 감람나무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롬 11:17-21; 11:24). 전체적으로 이 나무는 생명과 풍요를 상징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감람나무 보다 의인들을 비유하기 좋은 이미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돌보시고 기르신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집에 심긴 감람나무를 베거나 흔들 자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자기 장막에서 뿌리째 뽑힐 운명이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감람나무입니다. 또 이 나무는 ‘푸른’ 감람나무라고 묘사됩니다. 워낙 이 나무가 생명과 평안을 상징하는 나무인데, 여기서 ‘푸른’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 나무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기와 왕성한 번성을 공급받아 푸르디 푸른 나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의인의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안에 붙어있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라고 말했다는 점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의인은~같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요, 악인들과 구별된 자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의 반열에 든 자임을 확신합니다. 이 말은 다윗의 확신을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확신이 있습니까?
8절 하반절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1절에서 이미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눈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항상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다윗은 자기가 의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의인의 삶을 규정하는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악인은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합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에게 쫓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다윗을 도와준 대가로,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포함하여 제사장 85명이 무고하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도엑의 죽이는 독이 가득한 간사한 혀 때문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은 도망자요, 사울이 왕입니다. 이런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합니다. 그는 ‘영원히’ 의지한다고 고백합니다. 1절에서 ‘항상’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는 ‘영원히’ 의지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드리지요? 어떻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십니까? 몇 주 전, [마라와 엘림]이라는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신자는 마라라는 현실을 살아갈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인자하심, 자비와 선하심을 붙잡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붙잡습니까? 믿음이 그것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한다는 다윗의 고백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모든 점에서 다윗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슬픈 참극이 원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이런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습니다. 그 약속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언제나 모든 환경 속에서, 불리하고 힘든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끝으로 9절을 봅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다윗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장래의 심판을 현재로 가져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은, 이미 행하신 일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감사한다’는 표현은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개적인 성격을 가진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뒤에 ‘주의 성도 앞에서’라는 말이 있듯이, 다윗은 온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공적 예배의 상황을 상정하는 말입니다. 공적 예배에서 감사 찬송을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주의 이름을 선포한다고 말하지 않고, 사모한다고 말합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기다린다(wait on), 바란다(hope for)’는 말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여정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 약속을 의지하고 바라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고 사는 세상에서 함께 고난의 여정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이름을 의지하고 그 약속을 바라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가 사는 동안, 함께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