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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4). 교만한 자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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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4). 교만한 자들 앞에서

시편 94:1-23, 로마서 12:19, 요한계시록 6:9-1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7-26

말씀내용
정의가 억압받는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악한 통치자가 권력을 휘두를 때, 성도들은 어떻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역사 속에는 악인들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제멋대로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너무나 많았기에, 이런 질문은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시편 94편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고통이 깊으면 기도는 절절해 집니다. 이 기도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열왕들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선정을 베푼 왕들은 많지 않은 반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악행을 저지른 왕들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가 그러하다면, 이방 나라와 역사 속의 국가들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굳이 히틀러나 스탈린 같이 악명 높은 악한이 아니더라도, 세상 역사는 권력을 제 맘대로 휘둘러 사회적 약자들을 짓밟은 통치자들의 긴 목록을 제공합니다. 이 세상은 완벽한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 아니기에, 신자들은 이런 일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스펄전의 말입니다. “의인들은 지금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 겪어온 일이며,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이 고통받는 백성의 외침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 시대, 그리고 자고새처럼 산에 쫓겨 다니던 언약의 백성들의 시대를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정치적, 구조적 악에 대해서 무관심해도 된다는 말은아닙니다. 우리는 시편 94편을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역사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존 밀턴은 17세기 이탈리아 북부에서 개신교도들의 가족들을 모두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편 94편을 인용하여 이렇게 시작하는 기도문을 썼습니다.
주여, 주님의 학살당한 성도들에게 복수하소서.
차가운 알프스 산맥에 흩어져 누워....
어떤 점에서 도널드 윌리엄스가 시편 94편을 ‘진정한 해방신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리 과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정 급진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시편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1. 교만한 압제자들을 벌하소서(1-7; 롬 12:19; 시 146:6-9)
먼저 1-7절에서 시인은 교만한 압제자들을 벌해달라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습니다. 시인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두 번이나 부릅니다(1). 여기서 우리는 복수(revenge)와 보수(vengeance)의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초의 영어사전을 만들었다고 하는 새뮤얼 존슨 박사에 의하면, ‘복수(revenge)’는 감정적 행위로 상해 당한 것에 대한 것이라면, 보수(vengeance)는 공의적 행위로 범죄에 대하여 합법적으로 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이는 ‘보수하시는 하나님’ 곧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말하듯, 그것은 ‘교만한 자들에게 상응하는 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애쉬는 여기서 복수는 “증오로 가득한 우리의 뒤틀린 복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 12:19).”고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심은 우리는 완전한 공의의 관점에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공의로써 보응하실 수 있으십니다.
2절에서 시인은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실 것입니다. 시인이 1절에서 ‘빛을 비추어 주소서’라고 기도했고, 2절에서는 ‘일어나사’라고 기도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개입과 현현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불의와 고난의 상황을 영광스럽게 끝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3-7절은 교만한 압제자들에 대한 시인의 고발장입니다. 3절에서 ‘언제까지’ 허용하시겠냐고 하나님께 묻는데, 이 반복되는 표현에는 악인들의 압제가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시인의 비탄의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늘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우리가 바라는 때와는 너무나 다르고 느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개가를 부르고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데 자만합니다(3-4). 여기서 개가를 부르고 마구 지껄이는 행위는 모두 미완료로 쓰였는데 그 행위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악인들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멈추실 때까지는 지속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아무 제재 없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즐거워합니다. 이들은 주의 백성을 짓밟고 주의 소유된 백성을 곤고하게 하며(5), 사회의 약자들인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들을 압제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6). 이 악인들이 하는 짓을 동사로 주목해 보십시오. ‘짓밝으며..곤고하게 하며..죽이며..살해하며’입니다. 이 단어들은 악의 강렬함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소멸하거나 생활에 필수적인 것들을 멋대로 탈취하는데, 그 1차적 대상은 주의 백성이고, 2차적 대상은 폭력에 노출되도 어떤 외부적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들입니다. 법적으로 보호해줄 남편이 없는 과부, 외국인이기에 법적 적용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는 나그네와 아버지가 없어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무력한 고아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겠다고 율법에서 약속하신 대상들입니다.
악인은 이 모든 악행을 자행하면서도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확신합니다.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7).”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 못하며..알아차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여, 심판에 관심이 없으시거나 심판을 행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편 146:6–9).”


2. 교만한 압제자여, 생각하라 (8-15; 출 2:24-25; 히 12:5; 롬 8:28)
악하고 교만한 압제자들이 가진 확신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잘 드러냅니다. 그래서 시인은 8절에서 ‘어리석은 자들아, 무지한 자들아’라고 부르며, ‘생각하라’고 도전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표현은 ‘생각하라’인데, 이 히브리어 단어는 바로 앞절(7)에서 ‘알아차리다’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식별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이해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둔하고 멍청해서, 무지한 자들은 고집스러운 반역적 성향 때문에 자신들의 미약한 왕국을 건설하고는 마치 자기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시인은 이들에게 생각해보고 지혜롭고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도를 알고 계시고 그들의 생각이 허무함도 아십니다. 우상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말하지 못해도, 모든 만물과 인간 그리고 그들의 귀와 눈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어찌 듣지 못하며 보지 못하시겠느냐고 시인은 묻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애굽기 2:24–25).”
하나님은 뭇 백성을 징벌하시고,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며(10절), 인간의 생각이 허망함도 아십니다(11절). 악하고 교만한 압제자들이 아무리 꾀를 부리고 수많은 계획을 세울지라도 그 모든 것을 헛 것으로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소유하고 그것을 제멋대로 행사하는 존재라도, 그의 뜻대로 역사는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온전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고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 관점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교만한 악인의 압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눈만 뜨면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가 짓밟히고 죽임을 당하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무슨 위로가 있겠습니까? 12-15절은, 자신들을 악인들의 손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악행을 징벌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성도는 위로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위로를 얻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얻는 성도입니다(12).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가볍게 여기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합니다(히 12:5). 징계를 지혜롭게 받으며 징계와 함께 주시는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는 자는 복된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비록 고난의 상황을 견뎌내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배우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를 내적 평안으로 인도하고 심판의 날까지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고난을 받는 신자는 수업료를 내고 있는 것이고, 더 높고 더 나은 목적을 위한 훈련을 받고 있으며, 그가 겪는 모든 것이 그의 최고의 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외적 환경이 아무리 전반대일지라도 그는 복된 사람입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권면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비록 당장 악하고 교만한 압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지라도,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날을 위하여 악인들을 가두실 구덩이를 파고 계시다고 말합니다(13절). 이 시각적 상상을 통해 복 있는 성도는 현재의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성도의 위로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발견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14).”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변함 없는 신실하심을 보증하기에 성도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그 언약 안에서 성도는 언제나 그분의 소유입니다. 여러분은 불의하고 악한 권력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이런 위로를 경험하십니까? 칼빈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풍부한 위로의 근거를 제공하며 … 그 말씀을 정당하게 이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거나 절망과 낙담에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위로와 평안을 누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합니다. 15절입니다. “심판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따르리로다(15).” 정의로운 심판이 내려질 날, 의인들은 모든 선한 것을 누리는 수혜자들이 될 것입니다.


3. 보응의 날, 구원의 날 (16-23; 73:2; 왕하 21:1-18)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악인들에게는 보응의 날이 되겠지만, 의인들(믿는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와 위로를 구하면서 믿음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의지하고 바랄 대상, 원통함을 풀어 주실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행하는 자들을 칠까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16–17).” 16절의 탄원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17절에서 내 영혼이 침묵 속에 잠긴다는 표현은 죽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자기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신자의 삶은 정녕 이것을 경험하고 고백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신다면, 그 극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성도는 시인과 함께 이 고백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도우셨습니까?
18-19절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발이 미끄러진다는 표현은 고난의 시간에 안전과 확신이 흔들리는 상황을 말합니다. 교만하고 악한 압제자가 사회적 약자들을 죽이는 상황이 지속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제 때 행해진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 우리는 발이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일은 성도의 순례 여정에서 일어납니다. 또 시인은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를 언급합니다. 이렇게 의심과 절망에 휩싸이는 상태도 발이 미끄러지는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감사한 것은, 시인이 자신에게 이런 순간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러듯이, 자기의 약함을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삽도 똑같이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시편 73:2).” 아무리 성숙한 성도에게라도 이런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도우셨습니까?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18,19).” 시인을 붙들어 준 것은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위안이었습니다. 주의 위안은 주의 인자하심의 결과입니다. 종종 사람의 위로가 도움이 되고, 자신과 공감해주는 사람이 힘을 주기도 하지만, 우리 발이 미끄러지고 우리 속에 근심이 많을 때, 우리의 참된 도움은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위로 뿐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못 박듯이, 하나님께서 결코 방관하지 않으시고 악하고 교만한 압제자들에게 보응하실 것을 재차 확인하며 시를 마칩니다. 20절입니다.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20).” 여기서 재판장으로 번역된 말은 ‘권좌’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불의한 왕을 지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키드너는 이 불의한 폭군은 악한 므낫세 왕일 가능성을 제시합니다(왕하 21;1-18).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최장수 왕으로 55년을 다스린 우상숭배자였고 많은 선지자를 박해하였으며 이사야도 그가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회개하고 우상을 철폐하고 예배 회복을 위해 애쓴 것은 노년에 이르러서 였습니다. 그의 긴 통치 동안 경건한 성도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이 악한 권력자의 파괴적 통치는 하나님의 율례를 빙자해서 재난을 꾸미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의인의 영혼을 치고 무죄한 자를 정죄하여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그치지 않고 일어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신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시인처럼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그들의 죄악을 그들에게로 되돌리시며 그들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그들을 끊으시리로다(22–23).”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에 대한 확신 표명으로 시는 마칩니다. 성도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반복해서 말했듯이, 마지막 절에서는 ‘그들을 끊으시리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정의를 세우실 것이므로, 성도들은 모든 좌절과 분노와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악한 압제자들에게 보응하실 때, 성도들을 신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삿 9:56-57; 계 6:9-11; 합 2:4; 3:16-18)
교만한 자들 앞에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권세를 가졌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날마다 불의한 일들을 접해야 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부르짖는 소리는 그치지 않습니다. 이때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을 본문은 가르쳐줍니다.
첫째, 성도는 불의한 세상에서 단지 자신만의 억울함, 손해를 회복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만연한 불의, 불합리한 폭력의 현실에서 드리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더럽혀진 땅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이 불의한 땅에 임하기만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 사악함 가득한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의 손익을 놓고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성도의 시야는 세상을 향하여 넓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야로 세상을 보도록 눈이 열린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둘째,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응하시고 세우실 정의를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맥체인 캘린더에 따라 읽은 사사기에서도 이런 말씀을 읽습니다.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사사기 9:56–57).” 성도는 이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도가 복수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교만하고 악한 압제자들의 통치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좌절과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신원하시는 분,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 엎드려 빛을 비추어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순교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기도하는 내용을 듣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6:9–11).” 이 기도는 시인의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들 앞에서 더구나 그들이 권력을 가진 압제자들일 때,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박국에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사회의 영적, 도덕적 타락은 물론이거니와, 무자비한 바벨론 군대가 들어와 살해하고 겁탈하고 약탈하는 상황 속에서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박국 선지자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지막 고백을 통해서 보여주지 않습니까?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6–18).”
우리는 교만한 악인들이 권좌에 앉아 폭력을 행사할 때 조차, 믿음으로 살아가며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그들에게 보응하시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과 위로하심이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 영혼을 즐겁게 하심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 복있는 성도의 고귀한 자리, 부르심을 놓치지 말고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