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시편강해(2013) - (8). 위를 보고 사는 존재

시편강해(2013) - (8). 위를 보고 사는 존재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시편강해(2013) - (8). 위를 보고 사는 존재

시편 8:1-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3-12-13

말씀내용
1.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이 시의 주제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과연 인간이란 누구인가?”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으로부터 시작해야 옳겠지만, 저는 이 시편을 우리가 함께 상고하면서 먼저 던져야만 할 심각한 질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왜 이렇게 잘못 돌아가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 문제의 근원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위치를 착각한데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최초의 범죄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신들의 존재를 착각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자손인 우리 역시 본질적으로 그런 착각 속에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본성적으로 그러한 인간이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인간은 자신들의 존재를 너무나 높이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그 절정에 와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참 놀라운 아이러니가 잇습니다.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계관인 진화론은 인간의 존재를 가장 높인 것 같지만, 인간의 존재를 금수와 비교우위에 있는 존재로 가장 놀랍게 격하시킨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인간의 존재와 특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로써 설명함으로써 시작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진화론적 세계관은 인간을 짐승의 형상 하지만 매우 고상한, 진화된, 발전한 짐승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위치를 높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위치를 격하시킨 것입니까? 인간의 고통의 원인, 인간의 세계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성경의 지적은 바로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시편 8편은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2. ‘엘로힘’(5)은 천사인가, 하나님인가?
시편 8편은 분명히 창세기 1장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시입니다. 이 시편에서 아주 잘 알려진 구절은 4절과 5절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천사’라고 번역된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의미하지만, 때때로 천사와 같은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사용될 경우도 있는데 그 경우는 통치자, 재판장과 같은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엘로힘’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단어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이것이 천사와 같은 천상의 혹은 영적인 존재(피조물)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 뿐 아니라 많은 영역 성경들이 이 단어를 ‘천사’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주전 2세기 경에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인 70인경의 영향 때문입니다. 70인경은 엘로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분명하게 천사를 의미하는 ‘앙겔로스’라는 단어로 해석해서 번역했습니다. 두번째 이 단어의 의미를 천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히브리서 2:6 이하에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 역시 ‘앙겔로스’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당시 널리 알려진 70인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는 경우에, 성령의 영감 하에 그 구절을 분명하게 해석하여 인용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가져다 쓴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주도 하에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그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이 단어를 천사로 해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히브리서를 찾아보지요. 히브리서 2:6~9입니다.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자, 여기서 시편 8편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을 누구에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말씀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습니까? 그가 죽음이 없는 천사와 달리 죽어야 하는 인간이 되셨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으셔야만 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그리고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8편 말씀을 그대로 메시야적 예언의 시로 해석을 하여 인용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즉 비하를 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쓰게 하신 시편 8편의 말씀을 동일하신 성령님께서 히브리서 기자를 통하여 메시야적 시편으로 해석을 하신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편이 다윗에 의해서 쓰여졌을 때, 오직 그 의미 하나만을 가지고 쓰여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편을 읽어보면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주신 이 말씀이 일차적으로(성령님에 의해서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이 일어나지 않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광대한 우주 한 가운데서 인간이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고, 그래서 그를 찾아오시고 권고하시고 영광과 존귀를 입는 존재로 만들어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본문이 그리스도의 비하를 말하려고 한다면, 시편 8편 본문 자체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영예, 창조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영예를 말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엘로힘’을 우리는 하나님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인간이 천사보다 못한 열등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인상을 조금도 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천사는 성도를 섬기라고 있는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고(히 1:14). 바울 사도는 성도가 천사를 심판(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고전 6: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엡 3:10).” 헨리 멜빌(1854)이 한 말입니다. “타락한 사람을 위해서는 구세주가 나셨으나, 타락한 천사들을 위해서 구세주가 나셨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은 신비스런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비밀이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도 열등한 존재로 지음받은 것이 아닙니다. 영원 속에 들어가게 될 때에, 인간은 하나님, 천사, 그 아래의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5절이 말하는 ‘엘로힘’이 시편 8편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5절을 번역하면,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문제를 조금 길게 논증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시편 8편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관점을 가지고 이 시편을 우리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보며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1~2,9).
1절과 9절은 이 시의 시작과 마지막인데, 이 시의 주제를 잘 표현해줍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땅’과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과 그 선하심을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데, 여러분은 다윗이 이렇게 하는 것을 얼마나 공감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자연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자연의 조화와 모든 현상들, 그리고 여러분의 눈 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광활함, 웅장함, 기묘함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떤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것입니까? 토마스 찰머스 박사는 천문학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렇게 진실되게 말했습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울창한 숲에서 나뭇잎이 하나 떨어진다 해도, 숲의 영광에는 어떤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모두 소멸된다 해도 이 광활한 우주의 영광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다윗은 천문학을 몰랐음에도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자로 ‘자연’은 스스로 자(自)와 그럴 연(然)으로 이루어진 말로, 대단히 무신론적이고 비성경적인 개념을 전달합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보는 자연은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입니다. 모든 만물을 아무 생각도 없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로 그 용도와 쓰임새에 맞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도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존재하게 된 것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다윗은 매우 시적인 표현으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에 혹시 하늘을 의도적으로 쳐다보신 적이 있습니까? 존 파이퍼는 대학 시절 자신의 교수였던 클라이드 킬비(Clyde Kilby)의 결심문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첫번째와 마지막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이것입니다. “최소한 매일 한 번씩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양심을 가진 인식체인 내가 내 주위와 내 위의 놀랍도록 신비스러운 물체들과 더불어 우주 공간을 여행하는 한 행성 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마지막 열 한 번째는 이렇습니다. “나는 가끔 내가 어릴 때 가졌던 시각의 신선함을 뒤돌아보며 최소한 잠시 동안만이라도, 루이스 캐롤의 말처럼, ‘순수하고 맑은 표정과 경이감으로 꿈꾸는 눈을 가진 어린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는 인간이 너무나 쉽게 익숙해지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더 이상 놀라지 않습니다. 어릴 때, ‘와’하던 것이 점점 없어집니다. 모든 것이 다 ‘자연스럽고’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절이 이것을 지적합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2).” 성경은 우리에게 자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우주를 향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를 가르쳐줍니다. 로마서 1장은 자연 만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다윗은 지금 그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 충만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면서 감동하고 있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이 시편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입니다(4,10,12,18,21,25,31). 31절에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강조해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을 보시면서 감동하시고 이 모든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만족히 여기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때 그 ‘좋음’은 하나님의 속성인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를 바라보시면서 가지셨던 그 감동을 가지고 지금 말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9).”

4.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보며 인간의 작음을 생각하다(3~4).
다윗은 지금 이 자연 만물을 보면서, 하늘과 땅, 하늘에 베푸어두신 달과 별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생각합니다. 이 거대하고 웅장한 하늘과 세상 만물 속에서 과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작은가? 나는 얼마나 미물에 불과한 존재인가? 그것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4)”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닙니까? 인간의 참된 겸손은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식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보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표현에는 인간의 참된 겸손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생각하려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그가 창조하신 광대한 우주를 인식함으로써 일어나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이 미물에 불과한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생각하셨고(생각의 대상으로 정하셨고), 심지어 권고하셨다는 것입니다. 권고하셨다는 말은 방문하신다는 말입니다. 위대한 인간 세계의 지도자가 나를 방문해준다는 것만 해도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길텐데,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인간을 일부러 생각하시고 방문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다윗은 인간이 가지는 영광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믿음을 칭찬하셨던 백부장을 기억하십니까(마 8:8~10)? 그는 주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노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욥 7:17~18).” 이것이 바로 다윗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4절에 ‘사람’이라는 단어를 쓸 때, 히브리어로 ‘에노쉬’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은 다른 짐승과도 달라서 태어나서부터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생존조차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또 ‘인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벤아담’인데, ‘아담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자손을 이처럼 생각하시는 것은 어찐 은혜인가 하는 것이 다윗의 심정인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 미물인 인간에게 주신 영광을 인식하다(5~8).
파스칼(1623-1662)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사람은 왜 이처럼 모순된 존재인가! 장엄하면서도 왜소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타락했고, 고귀하면서도 천한 것이 사람인 것을!” 여기서 다윗은 파스칼처럼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인간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광이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인지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5~8절의 내용입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창조의 본문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합니다(창 1:26). 그 말씀이 그로 하여금 사람을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인간이 가지게 된 영광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본유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광입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고 섬기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는 한에 있어서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그는 또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신” 일을 기억합니다(6~9; 창 1:26~30). 하나님께서는 실로 인간을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창조하셨고 지으신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시고 다스리게 하시고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영화와 존귀로 관씌우신 것이 아닙니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광에 대하여 경탄하는 것입니다.

6. 반역하는 인간, 아담의 아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다윗이 보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창조주께서 만드신 자연과 우주의 광대함을 알고, 그 앞에서 자신을 봄으로써 겸손해진다면, 그리고 그런 미물에 불과한 자신에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영광과 존귀를 안다면, 지으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지위를 안다면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것입니까? 그러나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영광의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본래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간은 다른 모든 짐승들이 네 발로 땅을 보고 사는 것과 달리 유일하게 서서 걸으며 하늘을 보는 존재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그 영광을 보면서 살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창조된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위로 하나님을 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래로 땅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스려야 하는 존재들인 짐승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신들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싶어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화론으로 나타난 세계관입니다. 진화론의 문제는 인간의 모든 관점,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간이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왜곡시키고 인간을 교만으로 인도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그런 역사적인 인물을 한 사람 우리에게 극적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느부갓네살 2세(주전 605-562 통치)인데, 역사상의 신바벨론 제국을 건설한 대왕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단 4:30).” 이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그에게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31~32절입니다.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왕의 교만이 절정에 이르렀을 바로 그 때, 하나님은 그를 짐승처럼 낮추셨습니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느부갓네살은 큰 전쟁들을 치르고 바벨론으로 돌아온 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가 사망하기 얼마 전에 나타났다고 전해지는데, 아마 그가 사람에게서 쫓겨나 짐승처럼 지낸 시기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일종의 정신병에 걸려 자기 자신이 짐승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기한이 차서(‘일곱 때를 지나서’)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게 되자 그의 총명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34).” 그는 드디어 자신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동시에 총명이 돌아왔고 다시 왕위를 회복하였습니다(36).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은 느부갓네살에게서 조금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느부갓네살이 걸었던 길을 걷습니다. 자신을 짐승 세계에서 우월한 존재로 확인하고, 짐승과 비교하고 짐승을 바라보는 까닭에 인간은 점점 짐승처럼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와 현실이 많은 점에서 그것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다양한 정신적 질병들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고, 결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도리어 많아지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정상적인 창조 질서를 왜곡하고 뒤집어 놓고 싶어하는 반역의 심리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고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진화론이라는 세계관이 귀착할 수 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정상인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다윗처럼 보고, 다윗처럼 생각하고, 다윗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4절에서 말한 ‘인자’ 즉, 직역하면 ‘아담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담의 아들들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찾아오셨습니다.

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 8편을 인용하여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히브리서 2:6b~10을 봅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하나님께서는 반역적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주 예수님을 ‘천사’(하나님이 아니라)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보내셨다고 해석한 것이 정당해집니다. 주님은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죽으려고 오셨기 때문에 이 점에서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대로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잠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반역한 인간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다시 영광에 들어갈 권세를 얻었으며 다시 위를 향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예수를 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1에서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로써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닮아가는 존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다윗과 같이 9절의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아멘.

8. 은혜를 알려면 위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다윗이 경험한 것과 같은 은혜를 알려면, 여러분이 참으로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미물같은 인간에게 주신 영광과 존귀를 입어 살려면, 여러분은 위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세상의 헛된 영광을 입은 인간들이 아니라, 여러분을 잠깐 동안 우월하게 느끼게 만드는 개나 짐승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도 뚫어지게 응시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3).” 주님은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16).” 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40).” 인간이 열등한 짐승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함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한,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으로 인간을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2).”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다시 위를 보십시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히 3:1).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십시오(히 12:2). 이것이 인간이 자신을 아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알고, 창조주로부터 자기에게 부여된 영광과 존귀를 누리고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이런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에 당신을 계시하신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십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