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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2013) - (9).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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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2013) - (9).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가

시편 9:1-20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3-12-20

말씀내용
1.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에게 일어난 기이한 일 하나.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시편 9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일어난 기이한 현상 하나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듯 합니다. 이 시를 쓴 다윗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불의하게 자신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자들 앞에 있습니다(13). 원수들은 다윗의 피를 흘리려고 하고 있으며(12), 다윗은 거의 사망의 문에 이른 듯 합니다(13). 그들은 다윗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웅덩이(함정)를 팠고 그물을 쳤습니다(15). 다윗은 불의한 자들에게 억울하게 송사를 당하고 있습니다(4). 이것이 다윗이 이 시편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들입니다. 이것은 비단 다윗만의 상황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상황을 만납니다. 이것은 인생 중에서 경험하는 일들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로 이해할 수 없고, 신자가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한 묘사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마 5:11). 또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0:22).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했고 그 자신이 복음을 인하여 많은 고난을 감당했습니다(딤후 1:8). 많은 사람들은 여기까지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조차 여기까지만 알고 있는 것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이상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투옥된 영어의 몸으로 빌립보서를 쓰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빌 4:4).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씁니다(고후 6:10).” 예수님 자신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과 같이 실로 ‘슬픔의 사람’이셨지만(사 53:3), 사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을 온전히 아셨고 누리셨던 분이셨습니다. 이런 것은 예수님이나 바울과 같은 사도에게 제한되어 있는 삶의 경험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일어나는 기이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바로 이것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을 다윗이 이 시편에서 놀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여기 표현들을 보십시오. 그는 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하고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겠다고 말하며,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그의 결심입니다. 비록 지금 다윗이 처해 있는 형편은 조금 전에 소개한 것과 같은 답답한 상황이지만, 그 속에서 다윗은 감사하고 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이렇게 고백하고 실로 이렇게 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마귀가 낙심과 절망으로 집어넣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하시는 기이한 일입니다.

2. 시편 9편과 10편의 관계
이 시편을 우리가 조금 더 살펴 보기 전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9편과 10편의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두 시편은 본래 하나의 시편인가, 아니면 별개의 두 시편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시편은 각각 두 개의 시편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마는,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에서는 이 두 시편을 하나로 묶어서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라틴어 성경인 Vulgate역도 그 영향을 그대로 받았고, 그래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경은 8편까지는 개신교가 사용하는 시편과 같은 번호로 나가다가 여기서 달라지면서 148편까지 계속 그렇게 차이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두 시편이 본래 하나라고 주장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시편 1권(1~41편)에 있는 시편 중 1, 2편과 10편, 33편만 표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1~2편은 서론이라서 그렇다고 하면, 이것도 10편이 9편에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합니다. 세번째 근거는 사실 바로 앞의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주는데, 히브리 시 가운데 아크로스틱 시라는 것이 있는데, 각 절, 혹은 각 연의 첫 운을 히브리 알파벳의 순서를 따라서 붙여 써내려가는 방식입니다. 대표적으로 119편이 각 8절이 시작하는 첫 소절의 운을 히브리 알파벳 순서로 붙인 전형적인 아크로스틱 시에 속합니다. 어떤 시는 완전히 알파벳 전체를 완전히 순서대로 사용하지만 어떤 것은 불완전하게 알파벳을 붙인 것도 있습니다. 시편 119편 외에 37, 111, 112편은 완전한 형식의 아크로스틱 시이고, 9~10, 25, 34 그리고 145편은 부분적인 아크로스틱 시에 속합니다. 9~10편은, 9편에는 처음 11개의 알파벳을 사용하는데, ‘달렡’이 생략되었고, 10편에는 ‘라멭’으로 시작하지만 세 개의 알파벳이 생략되었고 두 개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9~10편이 하나의 불완전한 아크로스틱 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9편과 10편이 별도의 시라고 주장하는 견해의 근거도 분명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이 이 시편을 두 개로 분류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시편의 주제가 다르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근거입니다. 9편이 순수한 찬양이라면 10편은 애가입니다. 어쨋든 이것도 9편과 관련해서 학자들에게 많은 논란이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두 편의 시가 본래 두 개의 별도의 시라는 관점에서 이 말씀을 상고할 것입니다.

3. 다윗이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근거
시편 9편에서 다윗이 1~2절에 보여주듯이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1~2절을 읽으면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다윗은 이렇게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하고 혹은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다윗이 왜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합니까? 7~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다윗이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심판자로 공의로 세상 만민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재판정에 영원히 앉아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왜 다윗에게 소망을 주고 감사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며 하나님의 모든 기사를 전하게하고 찬송하게 하는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세상과 만민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감사가 되고, 즐거움이 되며, 찬송의 제목이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지금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만이 아닙니다. 그는 멀리 보고 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라봅니다. 모든 굽어진 것들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모든 불의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억울한 일들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판정을 피할 수 있는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건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는 그저 장래의 일에 대한 머릿속의 지식이거나 입술만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산 소망이고, 힘이고 격려입니다. 비록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불의한 비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재판정에 영원히 앉아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정을 변호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그는 압니다(4). 다윗은 자기가 이런 상황 속에서 어디로 피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그것이 9~10절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는 이 고백은 얼마나 놀라운 확신입니까?

4. 이런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여러분,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런 신앙의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물론 신자들에게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확신과 위로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난이 넘친 것 만큼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4~5).” 분명히 이것이야말로 성령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비밀이고 위로이고 확신입니다. 바울 사도는 또한 고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바울 사도는 ‘안다’ 그리고 ‘확신한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10절에서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이라고 말한 바로 그것입니다. 다니엘은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자는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고 말했습니다(단 11:32).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성도가 고난 중에서 이런 확신에 도달하게 되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로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확신은 내가 그저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은 성령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은혜지만, 자녀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순종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통해서 점점 더 이런 확신이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알겠습니까? 다윗이 이런 확신에 이른 것을 본문은 이렇게 제시합니다. 3~4절 그리고 15~16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3~4).”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15~16). 이 시편에서 이 부분은 다윗이 자신의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고백입니다. 신앙이 죽은 신앙이 되는 것은 이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채, 앉아서 하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고 공부하고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교리를 통해서 배운 지식은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순종을 통하여 경험되어야 합니다. 경험되지 않은 지식은 머릿 속의 지식에 불과하고 이런 지식은 결코 고난과 환난 속에서 힘있게 역사하시는 말씀의 능력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맛보게 하지 못합니다. 왜 신앙이 힘이 없습니까? 왜 신앙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살아있는 그리고 경험적인 지식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늘 배우지만 이런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지난 삶 속에서 얼마나 신실하셨는지, 얼마나 선하셨는지에 대한 여러분의 고백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이런 확신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 곤고한 형편 속에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전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성품과 행사를 묵상함(10,12, 13)
이런 확신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행사에 대한 다윗의 고백들이 절절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은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며 ‘환한 때의 요새’가 되심을 고백합니다(9). 실로 하나님은 다윗의 환난 때에 그러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또 하나님은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10). 12절에서는 ‘피흘림을 심문’하시며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12). 또 하나님은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13). 비록 성도가 사망의 문에 다다를 때가 있지만, 그때마다 신실하고 선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수많은 전쟁터에서 사망의 문에 이르렀던 다윗은 이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그런 하나님의 성품과 행사를 묵상하며 자신을 이 어둠과 고통에서 건져내실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6. 찬송하라는 권고(11,14)
이런 확신어린 고백은 결코 혼자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전염됩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적 지식과 확신이 가슴 안에 있을 때, 사람은 그것을 담아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해도 그 하나님만이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사 속에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자신들이 깨닫고 받은 복음 진리의 은혜를 전하기 위해서 생명을 대가를 지불한 것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11절에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자기 혼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모든 기이한 행사를 전하고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입니다(1~2). 14절에서도 다윗은 또 말합니다.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7. 다윗이 간구하는 것(13, 19~20)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힘을 어디서 얻습니까? 다윗은 13절과 19~20절에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 세 구절이 정확하게 말하면 간구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간구가 어떻게 힘있게 하나님께 올려지는가를 오늘 시편이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과거의 은혜의 경험,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지식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주어지는 놀라운 확신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힘이 없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한 한 가지 이유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구합니다(13). 비록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고, 불의한 송사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의가 하나님께 나아가 구할 근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7편을 상고할 때, 제가 언급한 내용과 생각해보십시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시 7:3~5).” 마치 자기가 무죄하니 자기의 의로움을 보시고 구원해 달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 상황, 사람들의 무고한 비난에 대한 설명이지,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근거로서의 자기의를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말씀이 시편에 종종 나오는데, 우리는 오늘 시편 9편에서 본 바와 같이,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다윗의 근본적인 태도와 함께 이런 구절들을 해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19~20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구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온전하게 한 점의 의혹도, 부정도 없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소망입니까? 이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어떻게 은밀한 죄악을 행하거나 남을 해하거나 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소망은 성도들을 이 땅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아가고 싶은 열망을 만들어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다윗은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 뿐인줄 알게 하소서”라고 구합니다(20). 여기서 ‘인생’이라는 말은 앞서 8편에서 ‘사람이 무엇이관대’라고 할 때 사용되었던 같은 단어 ‘에노쉬’입니다. 이 말은 깨어지고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질그릇 같은 인간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다윗의 기도가 무슨 말입니까?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꺽어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기가 하나님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고, 단지 나라의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주장이 그것을 입증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 주님 저들로 자기들이 오직 질그릇같은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8. 성도는 불의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성도가 이 불의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답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과 같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억울함을 하나님께 가져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바라보고 그 소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고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며,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겠다고 결심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힘이 있기 위해서, 우리는 참으로 자기의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배우고 알고 순종함으로 깨달아 체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런 은혜의 수단들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세월과 함께 견고해지게 하시고 다윗이나 바울 사도나 우리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과 같은 자리에 서게 하시고 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을 소망으로 감사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