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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2013) - (10). 실천적 무신론자들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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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2013) - (10). 실천적 무신론자들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시편 10:1-1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3-12-27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드러내줍니다. 그들은 이론적 무신론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그 믿음이 그들의 삶에 조금도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력한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구원하는 믿음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4절에서 그들이 하는 말이 바로 실천적 무신론을 잘 보여줍니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이 구절과 14:1 그리고 53:1을 비교해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이 구절들은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에 쓰여진 시편이지만, 성령님께서는 다른 모든 말씀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시대에나 적실성 있는 메시지로 이 본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오늘 우리 주변에도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이런 주변의 사람들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다윗의 고소장(1)
이 시편을 쓴 시인(아마도 다윗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표제에서 밝히고 있지는 않다)은 지금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 주변의 사람들이 드러내는 삶의 자세와 방식을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없는 사상으로부터 나오는 삶의 방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겪게 되는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변에서 그토록 교만하고 악하게 행하는 사람들을 보지만, 그들에게 아무 심판도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께 이제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2. 고소의 내용?고소하는 죄목들(2~11)
다윗이 고소하는 내용은 2절부터 11절까지 계속됩니다. 여기서 다윗이 고소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의 죄목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교만함입니다. 2절에서 ‘악한 자가 교만하여’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은 악한 자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3절에서는 ‘마음의 소욕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마음의 소욕을 입에 내기도 부끄러운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도리어 자랑합니다. 4절에서는 그들이 ‘교만한 얼굴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그 심사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악인은 교만을 그 얼굴에 드러냅니다. 다윗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그들은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미래의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힘도 없는 인간이 이런 것을 호언장담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두 번째 악인의 특징은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억누른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그들은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라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억압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는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전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짓밟고 그 위에서 성공과 성취를 구가하려고 하는 의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가 고소하는 이 악인의 악함은 처음에는 생각 속에서 잉태되고 그 다음에는 말로써 표현되며, 행동으로 결실을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8~10절에서 그는 이렇게 살고 행동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그가 거하기를 좋아하는 곳은 ‘향촌 유벽한 곳’ 즉, 한적하고 으슥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보는 사람만 없으면 언제라도 다른 무죄한 사람을 죽이고 외로운 자를 엿보다가 넘어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 웅크리고 있는 사자같고, 사냥꾼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외로운 자’라고 한 것은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무나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로 악인의 특징은 하나님께 대하여 담대합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3절에서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한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은 이런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4).” 결국 그는 겉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의 사상에는, 그의 생각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마음으로 하는 생각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11).” 이런 생각이 있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악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성공입니다. 5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라고 말합니다. 시인이 보기에 그는 ‘언제든지’ 견고합니다. 형통하다는 말입니다. NLT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그들은 성공한다(they succeed in everything they do).” 그가 손대는 사업은 다 성공하고, 망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경건하여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시인은 그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볼만큼 눈이 좋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존재임을 생각하고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힘없는 사람들을 다 대적하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6).”

3. 다윗의 탄원(12~18)
다윗은 자신이 고소하는 악인들에 대한 죄목들을 밝힌 후에 이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일어나서 악인들에게 압제를 당하는 가련하고 불쌍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12). 다윗은 악인이 하나님이 감찰치 않으신다고 말하도록 허용하시지 말라고 간구합니다(13). 다윗은 비록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만, 그가 알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14).” 그는 분명하게 악인들의 사상과 말을 반박합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의 손을 갚으려 하신다’는 사실과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는 압니다. 비록 하나님의 심판이 당장에 그 악인들의 삶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압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믿음인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고소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계셨으며 당신의 공의로 갚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다윗은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다윗의 심령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의로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마음이 이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상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신앙에 대해서 별다른 칭찬을 하고 있지 않지만, 성령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그 사람이 분명한 의인(믿는 자)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8).” 그래서 다윗은 그들의 팔을 꺾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더 이상 교만한 팔로 악을 행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기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좋은 소식이고 희망이 됩니다. 이것을 다윗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16).” 다윗은 언젠가 세상에 속한 악인들이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대합니다.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8).”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승리의 외침으로 이 탄원을 마칩니다.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4. 적용
A. 이 기도를 공감하는가?
여러분께서는 이 시편을 쓰고 기도하는 다윗의 심정을 아시겠습니까? 만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미 악한 자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깊이 고민하셔야 합니다. 시편 전체는 이미 1편에서 그 서론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 복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자, 신자와 불신자로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여러분이 다윗과 공감하여 이 기도를 여러분의 기도로 삼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신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지라도, 마음과 삶으로는 실천적 무신론자로서 살아가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판의 날이 올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마음의 동기를 감찰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그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만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여러분의 오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에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참된 구원 얻는 신앙일 수 없는 것입니다.

B. 성도들이 악인들의 타깃이다.
사자가 웅크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혹은 사냥꾼이 그물이나 덫을 쳐놓고 사냥감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단이 언제나 노리는 것은 바로 성도 자신이라는 사실을 본문은 가르쳐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래서 성도들은 근신하고 깨어있을 것을 권고 받습니다. 다니엘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일심으로 단결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끌어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불경건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자리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프란시스 퀄스가 쓴 시는 이점에서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더해줍니다.

너를 쫓는 자가 그 손으로 행하는 것은
네가 부할 때에도 덫을 놓고,
가난할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명성을 얻을 때에도 덫을 놓고,
수치를 당할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높아진 때에도 덫을 놓고,
낮아진 때에도 덫을 놓네.
너의 침실에도 너를 살피는 덫을 놓고,
활동하는 중에도 덫을 놓으며
네 생각에도 덫을 놓고, 네 말에도 덫을 놓는다네.
네가 침묵할 때에도 덫을 놓고,
소동을 일으킬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절제하는 중에도 덫을 놓고,
헌신하고 있을 때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확신 중에 있을 때에도 덫을 놓고,
의심하고 있을 때에도 덫을 놓네.
네 마음에도 덫을 놓고, 네 행동에도 덫을 놓으며
네 머리 위에도 덫을 놓고, 발 아래에도 덫을 놓으며
네가 질병 가운데 있을 때에도 덫을 놓고,
네가 죽을 때에도 덫을 놓는다네.
오, 주여! 당신의 종들을 지키시고,
우리를 모든 원수들에게서 보호하소서.

우리는 얼마나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겠습니까? 원수가 우리를 언제나 넘어뜨리려고 사자처럼 웅크리고 있다면 우리가 틈을 제공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C. 겸손한 자를 들으시는 하나님(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17)”라고 다윗은 자기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감사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 기댈 곳이 없는 연약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심지어 입을 열어 기도할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으로 표현되지 않아도 그의 소원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저희 마음을 예비하신다’고 한 것은 그의 마음을 강하고 견고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연약한 자의 마음을 붙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귀를 기울여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신 줄을 알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것이 지금 당장에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는 더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알기에 그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악한 상황 가운데 처하거나 그런 일들을 대면하든지, 그리고 주변에서 많은 실천적 무신론자들을 만나든지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의로우신 판단과 손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든지, 겸손한 자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는 심령을 견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