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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1). 전능자의 그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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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1). 전능자의 그늘 아래

시편 91:1-16, 누가복음 21:16-18, 히브리서 1:1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5-17

말씀내용
저는 시편 91편을 읽을 때, 자동으로 떠오르는 책이 있습니다. 1956년 에쿠아도르에서 순교한 짐 엘리엇의 전기《전능자의 그늘》입니다. 남편의 전기를 쓴 엘리자벳 엘리엇은 이 책의 제목을 시편 91:1에서 가져왔습니다. 아우카 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그들의 창에 찔려 다섯 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죽었고, 29세의 짐 엘리엇은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자벳 엘리엇은 남 편의 삶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삶이었다고 증거합니다. 비록 29세의 젊은 나이에 날아드는 창에 찔려 죽었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수고와 슬픔 뿐인 세상을 사는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우리 삶에는 두려움과 불안함이 실재합니다. 지진과 쓰나미 같은 천재지변이 있는가 하면, 원 전 오염수의 문제나 건축물의 붕괴 등 인재 사고들이 존재하고, 이외에도 질병이나 교통사고, 강 도 사고 등 많은 우발적 사건들이 우리 인생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눈에 보이는 일상적 범주 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재앙들은 그리스도인을 피해가지 않으며, 성경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모든 일들을 결코 만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일은 내 인생에서 일어날 개연성과 임의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어떤 일을 합니까?
여러분이 91편을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이 시편은 위험을 당했을 때를 위한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1편은 질병과 상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 시편입니다. 91편을 구조를 보면, 1-2절에서 확신하는 원리를 말하고, 3-13절에서는 그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 하고 14-16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상기함으로 마치는 내용입니다.


1. 확신: 하나님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 (1-2)
91편은 1-2절에서 답부터 말하고 시작합니다. 불안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은 물론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지만 성도는 이 속에서 평안과 안전함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가? 시인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1-2절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1–2).”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확신을 표명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
아야 할 핵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안전이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입니다. 누가 이 안전을 누리는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그냥 신자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본문은 하나님 안에서 안전을 누리는 사 람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로 이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합니까? 전능자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과 당신만 아는 그 은밀한 곳이 어디인 지 알고 있습니까? 여기서 은밀한 곳은 하나님의 성소인 성전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도들은 성전 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건한 성도는 언제나 예배자로서 하나님의 현존 안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거주하고 산다는 표현은 영속성과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때때로, 그렇게 하는게 아니 라 아예 거기서 사는 것처럼 산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세상의 혼란과 위험으 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떨어진 안전한 장소입니다.
이 표현은 매튜 헨리가 지적했듯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는 모든 사람은 그분의 보호
아래서 끊임없이 안전하며, 따라서 항상 거룩한 평온과 마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
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도 “신자들은 하나님의 보호가 얼마나 풍성한 범위까지 미치는지 경험하 는 만큼 그의 그늘 아래 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과 전능자의 그늘 아래는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 아래 산다는 의미입니
다. 좀 뼈아프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스펄전은 이 구절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약속 된 축복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 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내적 성소와 속죄소를 바라보겠지만, 모두가 지성소(가장 거룩한 곳) 에 거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그곳으로 달려가고 가끔 다가가기를 즐기겠지만, 습관적으 로 신비한 임재 안에 거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짐 엘리엇의 이야기로 잠깐 가보면, 그가 대학시절에 쓴 일기들은 그가 지존자의 은밀
한 곳과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던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비록 그는 아우카 족의 창 끝으로부터 건짐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보호하셨고 죽임을 당하던 그 순간에도 그를 지키 셨습니다. 적어도 남편의 전기를 쓴 엘리자벳 엘리엇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2절은 우리가 습관적으로(형식적으로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면 모든 고 난과 시련 속에서 필요한 위로를 누릴 수 있는 정도가 훨씬 높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을 지존자(엘룐, the Most High), 전능자(샤다이, the Almighty), 주(야웨),
하나님(엘로힘)이라고 부르는데, 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몰아넣는 원수들 과 위협들은 한없이 작아지고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2. 적용: 자신에게 원리를 적용하고 격려함(3-13; 신 32:11; 눅 21:16-18; 마 26:53; 히 1:14; 마 4:5-6,11)
이어지는 3-13절에서 시인은 자기가 표명한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자신을 격려합니
다. 이것이 매일 우리가 삶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1-2절에서 원리를 말할 때, ‘나’라는 1인칭 단수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3-13절에서는 ‘너’라는 2인칭 단수가 사용됩니다. 시인이 자기 자 신에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적용하는 원리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피난 처로 삼은 자들을 천사들의 손에 맡겨 모든 위험으로부터 건지시므로 어떤 위험도 두려워할 필요 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위험과 파괴적일 수 있는 고통과 사건들의 목록이
등장합니다. 새 사냥꾼의 올무, 심한 전염병(3), 밤에 찾아오는 공포, 낮에 날아드는 화살(5) 어두 울 때 퍼지는 전염병, 발을 때 닥쳐오는 재앙(6), 이 재앙(7), 화, 재앙(10), 사자와 독사, 젊은 사 자와 뱀(13), 환난(15)입니다. 이 목록을 다루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안전하고 보호 를 받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과 공격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거 나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우리는 강하든 약하든 그 앞에서 무기력할 수 밖에 없고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이 목록은, 보이지 않는 원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 시합니다. 욥과 세 친구의 눈에 띄지 않는 사탄의 존재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먼저 3절은 신자들이 절대로 새 사냥꾼의 올무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거나 심한 전염병에 걸 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은 마치 어미 새가 하듯, 날 개 깃으로 덮으시고 그 날개 아래 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4; 신 32:11 참조). 그 날개는 보드 랍지만 동시에 방패와 손방패처럼 견고한 전신갑주와 같이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방패가 되시나니’라고 할 때, 진실함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속성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5-6절입니다.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5–6).” 여기서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는 단순미래를 가리키는 말인데,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는 하나님의 진실함을 믿는 믿음의 결과로 주 어지는 것임과(4) 동시에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신실한 자들은 절대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말 아야 한다는 금지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 두려움의 실체가 비록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 드는 화살’이며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일지라도 말입니다. 이 표현들 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악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한 밤 중에 두려움이 엄습했던 적이나, 벌건 대낮 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을 의식해본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사도 바울이 ‘악한 자의 모 든 불화살’을 언급했을 때(엡 6:16) 이 구절을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경건한 성도는 이 모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원리를 시인은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7-8절입니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 이 하지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7–8).” 천 명, 만 명이 옆에서 쓰러져가도, 경건한 성도는 그 모든 위험을 당하면서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습니 다. “네 옆에서 다 죽어도 너는 괜찮아”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시인은 이 약속을 자신에게 적 용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 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 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21:16–18).”
이 말이 이해되십니까?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히고 죽기도 할 것인데 그래도 너희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질병이나 사고나 박해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런 재앙들을 겪지 않 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성도들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재앙 으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자들은 오직 악인들이라고 8절은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지존자의 은밀한 곳과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9-10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 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9–10).” 스펄전은 자신에 게 이 말씀이 얼마나 즉각적이고도 강력한 위로가 되었는지 자신의 경험을 언급합니다. 1854년, 그가 런던에 온 지 거의 1년쯤 되었을 때, 콜레라가 발병하여 많은 교인들이 고생을 겪었고 죽임 을 당했습니다. 병자 심방은 끝이 없었고, 거의 매일 장례식을 인도해야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지 쳤고 마음도 약해졌습니다. 자신도 주위 사람들처럼 병에 걸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짐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져, 거의 주저앉을 지경이 되었던 어느 날, 슬픈 마음으로 장례식에서 돌 아오던 스펄전은 도버 거리의 한 제화점 창문에 붙어 있는 종이에 쓰여진 글을 보게 됩니다. 거 기에는 굵은 글씨로 91편 9-10절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 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 지 못하리니(9–10).” 이 말씀은 즉각적으로 스펄전의 마음에 영향을 미쳤고, 그는 안도감과 기쁨 과 함께 불멸의 힘을 얻은 듯 느꼈습니다. 이 일 후, 그는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병자들을 심방하 기 시작했고, 악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으며, 어떠한 해도 입지 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에게 이런 일을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성도들을 보호하라고 천사들에게 맡기신 일이라고 설명
합니다. 11-12절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11–12).”
모든 성도에게는 각각 수호천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명하여 성도들을 지키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모든 길,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명하여 그 들을 보호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도들이 이기적 목적을 위해 천사를 부릴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잡히실 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53).”고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험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맡기신 보이지 않는 천사들의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 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브리서 1:14).”고 말한 것을 기억하 십시오. 특별히 12절은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용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도전하고 천사가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마 4:5-6). 주님은 자기 증명을 위해서 이 구절이나 천사를 동원하지 않으셨고 하나님 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사탄을 대적하신 후에, 천사들이 수종드는 것을 받으셨습니다(마 4:11). 결국 주님은 사탄을 발로 밟으심으로써 13절의 성취를 보셨습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13).” 성도는 자신들을 넘어뜨리려는 모든 위험과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결국 그들을 발로 밟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하나님 안에 숨는 자는 안전하다는 1-2절의 단순한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함
으로써 은혜를 누립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14-16)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상기함으로 시를 마무리합니다.


3. 약속: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생각함 (14-16)
14-16절에서 하나님은 시인을 보호하심으로써 그의 믿음에 보답하실 것을 약속(맹세)하십니
다. 14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라고 했듯이, 이제 화자는 하나님입니다. 14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14).” 경건한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묘사된 사람은 1절 에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약 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를 건지리라…내가 그를 높이리라”입니다.
이어지는 15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가 환난 당할 때에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경건한 성도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
다. 그가 환난 당할 때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고 하시는 약속 말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환난을 당한 성도들은 주님의 이 약속을 통해 얼마나 큰 위로를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 리라 하시도다(16).” 구약에서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우리는 영 생을 약속받고 이 땅에서가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성도의 만족은 이 세상에서 더 많은 날을 갈망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임재와 공급에 있고, 하늘의 영광을 갈망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젊어서 죽든 늙어서 죽든 만족하고 떠날 수 있으며, 무덤 너머, 주님의 재림 때 가장 만족스러운 영원한 삶이 기다리는 것을 알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4. 교훈과 적용 (롬 8:37-39)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시인이 고백하듯이, 우리 삶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끊이질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이런 삶에서 어떤 일을 합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비록 예기치 못한 위험과 불화살이 날아들 지라도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고 평안과 안전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매여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비록 모든 일이 일어 날지라도, 결코 그것이 재앙으로 우리 장막에 미치지 못합니다. 천사들을 명하여 당신의 경건한 성도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천 명이 왼쪽에서, 만 명이 오른쪽에서 엎드러져도 하나님은 당신의 성도를 지키십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 때문에 고난의 일상을 살아가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 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7–39).”
그러나 마치기 전에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91편의 핵심이 있습니다. 누가 이 사랑을
누립니까? 누가 이런 두려움과 불안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평안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 까?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모든 성도의 구원을 지키십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풍성함과 깊이를 누가 누릴 수 있습니까?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물어야지요. 나 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살아가는가? 나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가? 그것은 나의 습관적인 패턴인가? 물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전염병으로 죽거나 적의 음모로 고통받 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습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러한 위험으 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스펄전의 말을 다시 인용함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기에 약속된 축복은 모 든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의 모든 자녀는 내적 성소와 속죄소를 바라보지만, 모두가 가장 거룩한 곳에 거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그곳으로 달려가고 가끔 접근하는 것을 즐기지만, 습관적으로 신비한 임재 안에 거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