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내가 사모하는 말씀 - (06). 자유하게 하는 말씀

내가 사모하는 말씀 - (06). 자유하게 하는 말씀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내가 사모하는 말씀 - (06). 자유하게 하는 말씀

시편 119:41-48, 요한복음 8:31-32, 고린도후서 3: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5-18

말씀내용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히브리어 알파벳 와우(ו)로 시작하는 구절들입니다. 알파벳 와우(ו)는 ‘그리고, 그래서, 그러면’과 같은 의미의 접속사인데, 개역개정역에서는 그 번역이 많이 생략되었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이 날 자유롭게 한다고?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는 바는, 설교 제목이 암시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45절에서 시인은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45).”라고 고백합니다. 이 질문으로 시작해보지요. 어떻게 이 시인은 자기가 구하는 하나님의 법도들이 자기를 자유롭게 걸어가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법도’라는 표현은 시편 119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덟 표현 중 히브리어 ‘피쿠딤’(21회 사용)인데, 이것은 권위를 가진 인물이 지시한 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사용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 즉 언약 백성을 돌보고 발전시키는 일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말이 중요하지요.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 이 말은 직역하면, 넓은 길로 행한다는 말입니다. 좁은 길로 가려면 자유로운 행보가 어렵습니다. 반면 넓은 길에서는 편안하고 자유롭게 행할 수 있지요. 지금 시인은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에게 주어지고 깨달아지면 자기는 넓은 대로로 행하는 것처럼 더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더 자유로워집니까? 그것을 경험하셨나요? 여러분은 이 시인처럼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바로 이 질문으로 오늘 본문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42절에서 시인이 “내가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지금 비방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구무언입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우리 자신의 처지와 상황 때문에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처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는 처신과 행보가 자유롭지 못하기에 자유롭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것이며, 시인은 그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묵상하고 순종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입니다.


2. 헤세드를 구함(41-42; 시 11:3; 느 4:3; 말 2:17; 3:14-15; 벧후 3:4; 마 27:43; 5:11-12; 벧전 2:23)
먼저 41-42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인자하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읽는데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은혜로우신 성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인이 ‘주의 헤세드’를 구한다는 말은 단지 “지금 형편이 어려우니 저를 이 상황에서 건져주세요”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하고 언약하신 대로 그 언약의 사랑을 지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상황은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근거 없이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언약하신 관계가 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있으니 그것을 신실하게 이루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인자하심은 복수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인자하심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더 강조하거나 하나님이 드러내고 약속하셨던 많은 사랑의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어디서 하나님의 이런 속성과 인자하신 행위들을 발견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매일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은 이 성경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 약속과 그 행위들을 발견하는 보고임을 경험하십니까? 그래서 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과 즐거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47-48절에서 시인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는 주의 계명들을 즐거워하고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말합니다.
그 출발점이 무엇입니까? 주의 헤세드입니다. 시인이 주의 말씀에서 헤세드를 찾았다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붙들고 그것을 성취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시인이 구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이거나 주관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그는 실제적 구원, 비방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유구무언인 상황으로부터 건져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42절에서 말한대로,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에게는 하나님의 헤세드의 성취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 시인을 비방할까요? 비방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비방하는 것이 시인의 믿음이라면(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방하는 자들이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멀리 있는 자들이 아니라, 가까운 가족이고 친구이며 직장의 동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뿐 아니라,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받은 조롱과 멸시와 비웃음을 많이 만납니다. 몇 가지 제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만 하더라도 이런 말씀들입니다. 사람들은 의인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시편 11:3).” 암몬 사람 도비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헤미야 4:3).” 말라기 선지자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조롱하다 못해 하나님을 비웃은 패역한 백성들의 말을 꾸짖습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말라기 2:17)…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말라기 3:14–15).” 베드로 사도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지적했습니다.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베드로후서 3:4).” 끝으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자신을 조롱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마태복음 27:43).”
이 긴 비방과 조롱의 역사를 보십니까? 이런 비방과 조롱은 지금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자들은 이런 조롱과 멸시와 비웃음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1–12).” 시인도 비방과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대답할 말을 원했고 그것을 하나님의 헤세드에 근거해서 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비웃음과 조롱을 대면할 때,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자신을 부탁하셨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베드로전서 2:23).” 그리고 주님의 믿음은 헛되지 않아서, 부활의 날에 온 우주 앞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물론 우리도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의 날에 만천하에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고 딸임을 증명하고 선포할 것입니다. 비록 때로는 이 땅에서 우리가 헤세드의 실현을 원수들 앞에서 확인하지 못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 중에서 당신의 헤세드를 충분하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3. 인내와 순종(43-44; 막 13:13)
시인이 정말 갈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43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주셔서, 언제나 그 진리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기를 시인은 갈망합니다. 헛된 말, 거짓말, 남의 허물을 들추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않고 그 진리의 말씀만 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방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만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라고 할 때, ‘규례(מִשְׁפָּט)’는 일반적으로 재판관의 결정, 판단을 의미하고 하나님께 사용될 때에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을 가리킵니다. 자, 시인의 말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내가 주의 규례(심판)를 바랐음이니이다.” 어떻게 시인은 자신의 모든 것, 마음의 생각과 뜻을 정확하게 아시고 그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날 하나님의 판단(심판)을 바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고 형벌을 다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멀리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주의 규례를 바란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헤세드에 대한 시인의 신앙이고 은혜에 대한 시인의 확신입니다.
이 믿음이 시인을 어디로 데려갑니까? 언약의 하나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은 언제나 순종으로 인도합니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지키리이다 영원히 지키리이다(44).” 이 짧은 고백이 가지는 강력한 충격을 감지하십니까? 항상 그리고 영원히 지키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입니까? 때때로, 가능한 시간에, 종종 순종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항상 그리고 영원히 순종하겠다는 태도는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맛보고 바라고 확신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이 고백은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가복음 13:13).” 끝까지 견디는 것은 곧 항상 그리고 영원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4. 자유하게 하는 말씀(45-46; 시 19:7-11; 요 18:33-38; 19:8-11; 행 24:25)
이제 본문의 중요 구절로 들어왔습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45).” 지금 시인의 상황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도리어 조심스럽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를 비방하는 자들이 비난할 거리를 얻기 위해서 틈을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처했던 환경을 생각하게 합니다. 비록 시인은 길따름이로서 좁은 문, 좁은 길로 조심스레 행하고 있지만, 그 길은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헤세드, 그리고 그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간다면, 비방하는 자들 앞에서 자기의 옳음을 입증 받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상주심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비록 사슬에 매여 있는 것 같을지라도, 그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법도, 주의 말씀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윗의 이 고백을 기억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편 19:7–11).”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유롭게 걸어간다는 것은 본래 넓은 길로 걸어간다는 말입니다. 이 넓은 길은 왕의 대로입니다. 여기 두 개의 시선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길을 가리켜 위험한 길, 바보들이 가는 길이라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길을 왕의 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의 길을 보는 자들도 이 길이 왕의 대로라고 말합니다. 왕의 대로를 걷는 자는 위풍당당하고 자유롭게 그 길을 활보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풍성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암시합니다. 좁디 좁은 십자가의 길이 왕의 대로임을 시인은 압니다. 주의 말씀에 붙들릴 때 우리는 자유롭게 그 길을 걸어갑니다.
자유로움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46절입니다. “또 왕들 앞에서 주의 교훈들을 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겠사오며.” 뭇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말하는 것도 때로는 두려운데, 왕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실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왕의 대로를 걷는 자유로움은 왕들 앞에서 주의 교훈을 말할 용기를 제공합니다. 자신이 수치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46절에서 그 확신을 표명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요 18:33-38; 19:8-11). 사도 바울도 사슬에 매인 죄수의 신분으로 총독과 왕들 앞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였지만, 그는 주눅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담대히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전했습니다(행 24:25).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와 대주교와 제후와 귀족들 앞에 서서, 자신의 책에서 주장한 모든 내용을 철회할 것을 요구당했던 때입니다. 그는 두 가지를 요구 받았습니다.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그대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그대는 이 책들에서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첫번째 질문에 루터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책들임을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질문에는 하루의 여유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그 왕들의 법정에서 그는 그 유명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있습니다. 저를 도우소서, 아멘.”
시인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영혼은 이렇게 심지어 왕들의 법정에서도 두려움을 넘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왕의 대로를 걷는 자유로움입니다.


5. 내가 사랑하는 말씀(47-48)
이제 47-48절은 앞에서 보았듯이, 시인이 두 차례 반복해서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을 학문적으로, 그저 지적 만족을 얻기 위해 사랑하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것은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시인은 그 말씀에서 주의 헤세드를 만나고, 자유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주님 자신을 만난 것입니다. 사실상, 시편 119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든 표현들은 주님 자신으로 바꾸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시인은 그 말씀 속에서 그분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게 그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기만 하면, 사슬에 매여 있어도 자유를 누리게 하는 말씀인 것을 그는 맛보았습니다. 그 말씀은 십자가의 좁은 길도 왕의 대로로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고백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씀을 즐거워하고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묵상합니다.


6. 십자가의 길, 왕의 대로 (요 8:31-32,36; 고후 3:17)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한 말씀이 제 뇌리를 맴돌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1–32).”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 주님은 바로 오늘 이 시편의 구절을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말씀이시기에 주님은 바로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한복음 8:36).”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사랑하게 하시며, 그 말씀에 항상 그리고 영원히 순종하여 살고자 하는 욕망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기만 한다면, 여러분이 서 있는, 그리고 여러분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비록 좁고 협착한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그 말씀은 그 길을 넓은 왕의 대로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함과 위풍당당함으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