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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7). 고난 중의 위로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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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07). 고난 중의 위로와 노래

시편 119:49-56, 이사야 62:6-7, 시편 59:16-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6-01

말씀내용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답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것이 더 대답하기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중 다수(?)는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거나 묵상하거나 암송하거나 또는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행하는 일은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시인의 대답입니다.

1. 시인의 상황과 시의 분위기(딤후 3:12; 시 23:1)
오늘 본문 49-56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자인(ז)’ 으로 시작하는 여덟 절입니다. 시인은 이 짧은 본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고난 중에 있고(50), 교만한 자들의 조롱을 심히 받고 있으며(51),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에게 둘러 쌓여 있고(53), 나그네된 상황이며(54), 어두운 밤입니다(55).
그 고난은 교만한 자들의 심한 조롱이었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박해를 받는다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였지만(딤후 3:12), 이 일은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진리를 양보한 자들에 의해 극단주의자, 꽉 막힌 사람이라는 조롱을 받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고 그들은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입니다(53).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밤’이라는 은유로 묘사합니다(55).
하지만 놀랍게도 본문이 가지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긍정적이고 희망적입니다. 49절에서는 소망을 말했고 50,52절에서는 위로를 말했으며 54절에서는 노래를 언급합니다. 또 56절에서는 ‘내 소유’를 말하는데, 이는 겉으로 보는 상황과는 달리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는 말씀을 생각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살펴보는 우리의 관심은 시인이 어떻게 자기가 처해있는 어두운 환경에서 이런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고백을 하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런 고백을 하고 고난의 밤 한 가운데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놓여 있고, 적대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삶에서 경험하는 영적 삶의 실재가 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합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우리 자신의 대답을 생각해야 합니다.

2. 믿음과 기억하는 일 (49,52,55; 사 62:6-7; 30:18; 히 5:8; 합 2:3)
49절은 ‘기억하소서’라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본문에서 기억하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핵심 개념입니다. 49절에서는 하나님께 기억해달라고 요청하고, 52절과 55절에서는 시인 자신이 하나님의 옛 규례들과 주의 이름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다양한 방식, 다양한 언어로 표현되고 설명되지만, 그 중에 중요한 개념이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명령을 언제나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 기억을 머리에서 잠시라도 제거한다면 범죄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존재인지 기억할 것을 언제나 요구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억의 장치들을 제공하십니다. 가령, 유월절이나 칠칠절, 장막절과 같은 절기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는 장치들입니다. 안식일은 매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치였습니다. 오늘날 성례로 주어진 세례와 성찬도 기억을 위해 주신 장치들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은혜의 수단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기억할 수 있는 뇌를 주셨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합니다. 치매가 슬픈 병인 것은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과거의 은혜를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런데 49절에서 시인은 자기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억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중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라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것을 보면 시인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의 안정성을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지금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약속이 무효화된 것이 아님을 시인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상하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연하셔서 당신의 자녀들이 괴로움 속에서 이 기도를 하게 하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셔서 결코 당신이 하신 말씀을 잊지 않으시는 신실한 분이 아니십니까? 시인은 하나님께 그렇게 하시는 큰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라는 고백에 드러나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약속을 지연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이사야 62:6–7).” 신실하셔서 결코 약속하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왜 당신으로 하여금 기억하시도록 상기시킬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하십니까? 이것은 환난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을 붙잡음으로써 믿음과 소망으로 인내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루어 주시길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고난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둠으로써 우리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이사야 30:18).”
이어서 시인은 자기가 기억한다고 두 차례 고백합니다. 주의 옛 규례들을 기억했다는 것이 첫번째입니다(52).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구원 사건들을 기억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두번째 고백은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라는 말입니다(55). 주의 이름은 언약의 이름, 야웨(여호와)를 가리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신자가 언약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피력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억하는 믿음의 행위는 시인 자신에게 어떤 일을 했습니까? 첫째는 위로를 경험한 것입니다(52).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는 표현은 주의 옛 규례를 기억함으로 위로를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시인은 주의 법을 지켰다고 말합니다(55).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서 소망을 갖게 하셔서 순종을 배우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심지어 주님께서도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브리서 5:8).”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소망을 가지는 방식으로 참된 순종을 배웁니다. 편하고 만사가 잘 될 때야,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진짜 순종은 고난 중에서 배워집니다. 고난 중에서 주의 약속에 근거하여 소망을 품을 때, 우리는 참된 순종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순종은 고난 중에서 약속을 기억하고 소망을 가짐으로써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하박국 2:3).” 그래서 결국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 중에서 취하는 가장 일차적인 태도는 하나님께 ‘기억하소서’라고 구하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칼빈의 말입니다. “설령 불행이 우리를 마지막까지 억압하고 우리가 마치 죽음에 처해진 듯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포기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안다면, 이 한가지—말씀을 기억하소서—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3. 고난 중의 위로 (50; 삼하 16:10-12)
하나님께 약속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한 시인은 이제 그 약속이 바로 자신에게는 고난 중의 위로라고 50절에서 고백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사람의 천 마디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가 성도에게는 더 큰 위로가 됩니다. 성도는 주의 말씀이 절망과 낙담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살리는 경험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알고 있습니까?
독일 루터파 목사였던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1892-1984)는 나찌 치하에서 9년 간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던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썼습니다. “길고 외로웠던 독방 생활을 할 때, 그후 다카우 강제수용소에서 마지막 4년을 지낼 때 성경은 내게 어떤 의미였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내 모든 것이었다. 위로, 힘, 소망, 인도하심, 낮의 주인, 밤의 친구, 굶주림에서 지켜준 양식, 영혼을 새롭게 회복시켜주는 생명수였다. ‘고독한 감금 생활’이 더이상 고독하지 않게 해주었다.”
이 고백은 50절의 고백을 잘 설명해줍니다. 고난은 우리 신앙의 시금석 역할을 합니다. 참된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 비록 흔들리기는 하지만 결국 이런 고백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거짓 신앙은 고난 속에서 주의 법을 떠나거나(51) 주의 율법을 버림으로써(53) 반응합니다. 칼빈의 말입니다. “우리가 참패 하고 멸망 당한 듯 보이는 곳에서 확고한 용기와 불굴의 의연함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 커다란 불명예를 돌려 드리는 것이다. ..이점에서 사람들이 역경 중에 품는 모든 불신은 신성모독과 같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나님께는 그분을 거짓말장이라고 비난하고 신실하게 여기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이 교만한 자들의 조롱 속에서도 주의 법을 떠나지 않은 것은(51) 그 말씀의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때 자기가 ‘주의 법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다윗의 삶에서 한 번 생각해보지요.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나 다윗이 황급하게 궁을 뒤로 하고 기드론 시내를 지나 도피할 때, 도망가는 다윗을 향해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나와 저주와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반응이 ‘주의 법을 떠나지 않음’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삼하 16:10–12).” 다윗의 이 태도가 주의 법, 주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주의 말씀을 통한 위로를 깊이 경험합니다.

4. 나그네 된 집에서 부르는 노래 (54,55; 창 47:9; 시 137:4; 59:16-17; 57:7-11)
우리는 시인의 또 하나 아름다운 고백을 만나는데, 54절입니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편 119:54).” 왕궁에서 내 노래가 되었다고 하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그네 된 집에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신자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주인이 아닌 임시 거주자, 거류자로 살아가는 정체성입니다. 나그네 된 집은 종종 눈물과 괴로움의 장소입니다. 야곱은 바로 앞에 섰을 때 정확하게 이 단어를 사용하여 말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세기 47:9).” 야곱은 나그네 삶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바벨론 포로기에 유다 백성이 나그네 된 땅에서는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한 말도 기억합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편 137:4).” 정말 그런 밤에는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것입니까?
55절에서 ‘밤’은 어둠과 두려움의 시간입니다. 저는 ‘밤’이라는 단어가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읽을 때, 대학 시절에 읽었던 엘리 비젤(Elie Wiesel)의 『밤』이 생각납니다. 15세에 나찌의 강제수용소에 가족과 함께 끌려갔던 그가 쓴 자전적 소설입니다. 그는 이렇게 그 밤을 묘사했습니다. “나는 수용소에서의 그 첫날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내 삶이 일곱 겹으로 봉해진 하나의 긴 밤으로 되어버린 그날 밤, 수용소에서 맞은 첫날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연기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몸뚱이가 고요한 하늘 아래 연기로 화해버린 어린이들의 얼굴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내 믿음을 영원히 불살라버린 그 불꽃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살고자 하는 마음을 영원히 앗아간 밤의 침묵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느님과 나의 영혼을 살해하고 내 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그때, 그 순간들을 나는 결코 잊지 않으리라. 하나님만큼 오래 산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결코 잊지 않으리라..”
엘리 비젤에게는 그 밤이 자신의 신앙을 소멸시켰고 하나님이 교수형에 달린 밤이었지만, 본문에서 시인은 그 밤에도 주의 율례가 자신의 노래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의 밤에도 성도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망과(49) 말씀이 주는 기쁨 때문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편에는 그런 노래가 적지 않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부른 노래 두 곳을 찾아봅시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편 59:16–17).”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집으로 사람을 보냈을 때 지은 시인데, 그는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쫓겨 굴에 숨었을 때 했던 고백도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편 57:7–11).” 쫓기는 상황에서 했을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고백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의 말씀은 고난 중에서도 성도의 노래가 됩니다.
흑인영가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로 끌려와 고통 속에서 살던 흑인들의 노래였습니다. 흑인영가의 가사 중 많은 것이 그 슬픔 많은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실 밝은 날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는 것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그네된 집에서도 성도의 노래가 됩니다.

5. 거룩한 분노(53; 민 25:11-13; 행 17:16)
하지만 본문은 주의 말씀이 그에게 행한 한 가지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53절입니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시편 119:53).”
‘맹렬한 분노’는 오래 전에는 ‘공포, 두려움’으로 번역되었지만, 사실 이 히브리 단어의 의미는 끓어오르는 분노, 격렬한 감정의 고조(열)을 의미합니다. 시인의 이 반응은 악인들이 주의 율법을 버린 것에 반응이었습니다. 이 반응은 비느하스의 열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알브올 사건의 대배교 사건에서 부끄러움 없이 음행을 행하던 자들을 죽였던 그 열심 말입니다(민 25:11-13).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함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던 일도 비슷한 반응이었습니다(행 17:16).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고 그분의 말씀이 현저하게 무시당하고 있으며 세계가 죄로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도 성도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느끼고 살아가거나 웃을 수는 없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누군가 공중 앞에서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를 근거 없이 모욕할 때,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로운 분노 중에도 우리는 늘 자기의라는 죄를 경계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진심에는 언제나 죄성이 섞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분노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의 애통함과 회개가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6. 나의 소유(56)
마지막 절인 56절입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편 119:56).” 여기서 ‘이것’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데렉 키드너는 이것이 54절에서 너무나 잘 묘사한 바, ‘내 노래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고난 중에 위로를 누리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밤 중에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시인은 자기의 소유, 재산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래에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기대를 피력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게 주어졌고 존재하는 생명을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행한 일 때문에 얻은 보상이 아닙니다.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은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고난 중의 위로와 한 밤 중에 부르는 노래를 만들어내는 것을 경험하고 누리고 소유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합니까? 이것이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이길 바랍니다.
저는 나찌 치하의 어두운 밤에 디트리히 본회퍼가 감옥에서 지어 불렀던 노래를 읽어드림으로써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선한 능력으로]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1944년 성탄절에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써서 약혼자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담겼던 시입니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지나간 허물 어둠의 날들이
무겁게 내 영혼 짓 눌러도
오 주여 우릴 외면치 마시고
약속의 구원을 이루소서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주께서 밝히신 작은 촛불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르네
그 빛에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온 누리에 비추게 하소서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저 가슴 벅찬 노래 들리네
다시 하나가 되게 이끄소서
당신의 빛이 빛나는 이 밤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