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시편강해 - (84). 향수

시편강해 - (84). 향수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시편강해 - (84). 향수

시편 84:1-12, 시편 42, 43, 히브리서 11:9-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7-28

말씀내용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사람이 가진 본능입니다. 자연에도 이런 귀소본능을 가진 것들이 있습니다. 연어는 하천에서 태어나 바다로 2만 km나 나가 살다가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물살을 거슬러 올라와 알을 낳고 일주일 안에 죽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에게도 이런 본능을 주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피조물인 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태어난 존재인지를 압니까? 그리고 거기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이 만들어두신 빈 공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조금만 정직하게 자기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이 돌아갈 본향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분명하게 자신이 돌아갈 고향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회심을 통해서입니다. 어거스틴은 회심한 후에 쓴 고백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주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하여 지으셨나이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안식할 수 없나이다.” 이것은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찾은 사람의 고백이고, 모든 신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오늘 우리가 상고할 시편 84편을 설명하면서, “모든 삶은 집을 향한 갈망이고 여정이다.”라고 말합니다. 시편 84편은 바로 집을 향한 갈망과 여정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시편입니다.


1. 84편의 배경과 구조
84편은 시편의 제3권에 속한 고라 자손의 두번째 시편모음을 시작하는 시편입니다. 고라 자손의 첫번째 시편모음은 제2권에 속한 42-49편이었고, 두번째 시편모음이 제3권에 있는 84,85,87,88편입니다. 고라 자손의 첫번째 시편모음에 나타나는 주제는 하나님의 지상 거처인 시온의 성전에서 느끼는 기쁨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면, 42-43편은 하나님의 집을 향한 갈망과 그곳에서 누리는 행복을 묘사합니다. 제가 시편 42-43편을 두 차례 강해하면서, 한 번은 그 제목을 [영혼의 노스탤지어]라고 한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주제가 오늘 시편에도 고스란히 녹아져 있기에 오늘은 설교 제목을 [향수]라고 했습니다.
84편에는 [고라 자손의 시]라는 표제어가 있습니다. 고라 자손은 솔로몬 시대에 성전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레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는 회막에서 문지기 역할을 했고(대상 9:17-22) 성전 건축 후에는 예배 인도자와(대상 6:16-47) 성전 찬양대(대하 20:19)로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어떤 상황이 이 시를 낳았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어떤 학자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도피하게 되었을 때, 그를 수행한 고라 자손이 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주의 장막—성소를 향한 갈망을 표현한 시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기에 쓰여진 시라고 생각합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 붙잡혀와서, 옛 고토 예루살렘의 성전에 돌아가고픈 마음을 표현한 시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특별한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들이 일년에 세 번 큰 명절(유월절, 칠칠절 또는 맥추절,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순례 행렬을 염두에 둔 시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정황이 어찌 되었든지, 이 시편은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갈망이 그 핵심입니다.
84편은 ‘셀라’를 중심으로 세 연(1-4, 5-8, 9-12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셀라는 정확히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일종의 음악용어인데, 적어도 ‘잠깐 쉼’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세 연은 각각 “복이 있다”라는 표현을 가집니다. 첫째와 셋째 연은 끝에서(4,12절), 둘째 연은 시작할 때(5절) “복이 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행복하다’고 읽을 수 있고, 지복(至福)의 개념을 의미합니다. 더 없는 최고의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84편은 세 번에 걸친 “복이 있다”는 표현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4,5,12).


2. 갈망하는 신자의 행복 (1-4; 시 42:4; 43:4)
앞에서 잠깐 말했듯이, 사람이 회심할 때 자기 진짜 고향이 어디인지를 알게 됩니다. 리처드 필립스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 집을 찾았다는 의미다. 당신의 갈망은 그분을 알고 그분을 섬김으로써, 그리고 그분의 면전에서 예배하고 살아감으로써,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부르짖음으로써 만족된다.” 이 말이 옳다면, 향수,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갈망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마음을 절절이 표현한 시편 84편이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84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시편 84:1).” 데렉 키드너는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는 연애시의 언어라고 설명합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연인을 향해 표현하는 시어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의 장막’을 향해 그런 마음을 품습니다. 이것은 단지 성전이라는 건물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는 그 장막을 사랑합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4번 사용하고 있습니다(1,3,8,12).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능력에 초점을 맞춘 하나님의 성호입니다. 지상의 모든 세력 위에 존재하는 힘을 가지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모든 군대는 그분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그분의 의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고백이 여기에 깔려있습니다. 만일 성전이 있는 시온으로 갈 수 없게 만드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제거하시고 성도의 순례 여정을 이끌어 그곳에 이끌어 들이실 것이라는 고백이 이 성호를 네 번이나 부르는 시인의 마음에 나타납니다. 주의 장막이 이 시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는지는, 시편 42-43편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시편 42: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편 43:4).” 시인이 가진 향수를 잘 보여주는 표현들입니다.
2절은 시인이 거의 향수병 혹은 상사병에 걸릴 지경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편 84:2).” 여기서 ‘내 영혼, 내 마음과 내 육체’라는 표현은(개역개정역에는 ‘내 육체’ 대신 ‘육체’라고 번역됨) 예배하는 사람으로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가지는 시인의 개인적 친밀함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성전은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표현됩니다. 시인은 성전을 너무나 사모한 나머지 풀이 마르듯이 쇠약해졌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기를 애타게 갈망함으로 인해 영혼이 수척해졌습니다.
이제 시인의 부러움은 성전으로 자유롭게 날아가 성전 처마에 깃들일 수 있는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합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시편 84:3).” 비천한 새들도 하나님의 성소에 날아가 거할 수 있지만, 자신은 지금 고달픈 순례의 여정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4절로 첫 연을 마무리합니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84:4).” 첫번째 복의 선포입니다. “누가 행복한 자인가? 그는 주의 집에 사는 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서 항상 주를 찬송할 것입니다. 시인이 처음으로 말하는 ‘행복 선언’은 희구적 행복선언입니다. 내가 이제 성전에 이르게 될 때에, 나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보여주는 갈망은 성도가 가지는 당연한 갈망입니다. 그리고 시인이 선언하는 행복은 성도가 온전한 의미에서 장차 아버지 집에 이르게 될 때 누리게 될 행복입니다.


3. 순례하는 신자의 행복(5-9; 창 12:2-3)
두번째 연은 시온을 향하여 순례의 여정에 있는 성도가 누리는 행복을 말합니다. 5절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편 84:5).” 본질적으로 성도의 삶은 순례의 여정입니다. 이것을 존 번연은 그 유명한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순례자의 눈에 아직 시온의 대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선명합니다. 신자는 믿음의 눈으로 시온의 대로를 바라보고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주님께로부터 얻습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이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이 가야하는 하늘의 목적지, 그 본향을 알고 그 본향을 향해서 걸어가며, 그 길을 감당할 힘을 주께로부터 얻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지만 이 땅에 자신의 목적지를 삼고 자기 힘을 의지하여 사는 자는 결코 이 행복을 누릴 수 없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라는 표현은 성도에 대한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묘사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시온의 대로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로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걸어가십니까?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행복합니다!
이제 그 행복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6절입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시편 84:6).” 눈물 골짜기는 히브리어의 발음을 따라 종종 ‘바카 골짜기’로 번역이 되는데, 이것이 지명이라면 그 구체적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카는 건조한 땅에서 자라는 포플러나무나 발삼나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삼하 5:23-24에서 뽕나무로 번역). 이 단어가 울음, 탄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해서 눈물 골짜기로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표현은 순례의 여정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는 말이 아닙니까? 성도의 천로역정이 어찌 눈물 골짜기를 지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이 말 하나만 가지고도, 하늘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 인생이 겪는 수많은 사건들을 표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순례의 여정이 행복한 이유는 하반절에서 설명됩니다.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여기서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는 ‘그곳을 샘으로 만들 것이며’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NASB). 순례의 여정에서 성도는 눈물의 골짜기를 샘으로 바꾸는 삶을 살아갑니다. 가령, 한 성도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삶 자체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질병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것이 눈물 골짜기를 샘으로 바꾼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고칠 수 없는 질병의 고통이 가볍거나 사소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눈물 골짜기, 맞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순례 여정은 그 눈물 골짜기도 샘으로 만드는 신비한 은혜를 경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사람은 이 세상에 구속적인 변혁(redemptive transformation)을 일으키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들을 붙잡는 일을 통해서만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잔 헌트(Susan Hunt)는 True Woman 에서 말합니다. “슬픔을 통한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약속에 던지게 하는 것이다.(The intent of sorrow is to toss us onto God’s promises.)” 저는 앨런 로스의 말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시인의 마음 속에 있는) 그 길은 외롭고 슬픔에 찬 계곡을 통과하여 메마르고 먼지 날릴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 길을 사랑한다. 순례자의 무리는 희망에 가득 차 길에서 경험한 시련과 어려움을 잊어버린다. 희망은 바람 부는 거친 곳을 살아있는 샘으로 바꾸어준다.” 이것이 성도가 순례 여정에서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눈물 골짜기를 샘으로 바꾸는 것 뿐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른 비를 주셔서 그곳을 축복으로 덮어 주실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은 결코 눈물 골짜기 같은 인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가는 곳에서 하나님은 이른 비를 내려 그 저주의 땅을 촉촉히 적셔 주실 것입니다. 성도가 정말 이런 존재라면, 누구든지 우리를 가까이 하는 자들은 그 복을 옆에서 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천로역정을 걷는 성도들의 삶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2–3).”
이런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성도는 힘을 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편 84:7).” 여기서 말하는 힘은 물리적 힘이 아닙니다. 크리스토퍼 애쉬의 말입니다. “비록 몸과 마음이 약해질지라도, 우리 내면은 시온으로 가는 내내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워질 것이다.” ‘힘을 얻고 더 얻어’라는 말은 직역하면 ‘힘에서 힘으로(from strength to strength)’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시작하여 그 힘으로 진행하고 그 힘으로 마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순례 여정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 힘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게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힘을 의식하고 살아가십니까?
우리는 두번째 연과 세번째 연이 걸쳐있는 8-9절에서 이 시편에서 유일한 기도를 보게 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시편 84:8–9).” 갑자기 시인의 기도는 기름 부으신 자를 향하는데, 기름 부으신 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입니다. 우리는 물론 여기서 다윗 왕이나 특정 왕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메시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순례 여정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여정입니다. 왜 시인은 갑자기 메시아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크리스토퍼 애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모든 복은 하나님이 메시아 즉 그 안에 모든 신령한 복이 있는 분에게(엡 1:3) 내리시는 복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성도가 누리는 모든 복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번째 연은 주께 힘을 얻어 순례의 여정을 걷는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을 말했습니다.


4. 주를 의지하는 신자의 행복(10-12)
이제 세번째 연입니다(세번째 연은 9-12절이지만, 9절은 8절과 함께 설명을 했습니다). 세번째 연은 주를 믿는 자가 누리는 행복을 묘사합니다. 10절은 시인의 고백의 절정을 보여주는 강렬한 표현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편 84:10).” 이제 순례자는 드디어 성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누리는 은혜와 기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순례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어떤 다른 곳에서의 천 날 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또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성전 문지기로 번역된 말은 역대상 26:1,12에서 언급하는 상당한 지위를 가진 성전 문지기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성전 문지방에 서 있는 사람’ 혹은 더 천하게 ‘거지 처럼 성전 문지방에 누워있는 사람’ 같은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성전에서 아무리 천하고 낮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악인의 장막에서 호사를 누리며 보내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편 84:11).” 하나님을 해와 방패라고 부릅니다. 해처럼 생명과 빛과 에너지와 기쁨의 근원이 되실 뿐 아니라, 방패처럼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간의 모든 순례 여정에서 하나님은 해와 방패가 되어 주셨다는 것을 시인은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와 영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자가 오늘 하나님을 갈망하는 은혜를 누린다면, 그는 장래에도 하나님을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정직하게 (순례의 길을)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다.”
그리고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편 84:12).”라고 끝을 맺습니다. 주를 신뢰하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이 시편에 적절한 결론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행복은 믿음으로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입니다.


5. 교훈과 적용 (고전 3:16; 6:19; 행 2:42; 히 11:9-10, 14-16; 요 14:5-6)
84편은 하나님의 집을 향한 시인의 향수를 보여주면서, 신자는 결국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순례자들이며, 이 순례자들은 그 아버지 집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갈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한편 신약시대에 그 향수는 집합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성전인(고전 3:16; 6:19)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에 상응합니다. 정말 자신의 본향이 하늘에 있음을 안다면, 그가 깊이 갈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라면, 그는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하늘 본향에 대한 향수와 교회와 형제를 향한 사랑은 절대적으로 같이 갑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지만, 특별히 당신의 백성이 모여 예배하는 장소에서 당신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교회는 순례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순례자들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들의 고향은 오직 이 땅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주의 힘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들만이 순례자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고 교제를 나누고 기도하기 위해 모이기에 힘썼습니다(행 2:42).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앞에서 그들 순례자들의 모임은 그들 모두에게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순례 여정에서 성도가 주께로부터 ‘힘을 얻고 더 얻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교회로 모이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 궁극적인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을 더해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거하는 약속의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9-10, 14–16).”
이것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준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을 만족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물질적인 복들입니까? 세상에서 즐길 만큼 즐기고 살면 행복한 것입니까?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켜 줄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 안에 만들어 놓으신 그 구멍을 채우실 만큼 충분히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에 시온의 대로를 더 선명하게 더 크게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다 순례자입니다. 돌아갈 본향을 똑바로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한 길,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우리 마음에 시온의 대로는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5–6).” 그리스도께서 본향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눈물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를 따라 걸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순례 여정을 행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