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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8). 어둠과 절망 속에서 드리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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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8). 어둠과 절망 속에서 드리는 기도

시편 88:1-18, 마태복음 27:46, 베드로전서 4:12-1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10-20

말씀내용
우리는 오늘 시편 전체에서 가장 슬프고 어둡고 음울한 시편을 보려고 합니다. 데렉 키드너는 “시편에서 이 보다 더 슬픈 기도는 없다”고 말했고, 제임스 보이스는 시편 88편의 제목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붙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슬픔과 절망으로 시작되는 시편들은 마칠 즈음에는 소망과 기쁨의 회복을 보여주는데, 이 시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편의 제목을 [어둠과 절망 속에서 드리는 기도]라고 붙였습니다. 이 시편은 끝까지 어둠과 절망이 지속됩니다. 시편은 많은 성도들에게 기도와 찬송의 모범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 시편으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가? 이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이 질문을 마음에 가지고,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88편이 언제 쓰여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이 국가적 재난을 배경으로 한 애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표제어는 이 시편의 기자가 에스라인 헤만이라고 밝힙니다. 그는 아마 고라 자손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라인 헤만은 솔로몬 시대의 현자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열왕기상 4:31).” 헤만은 아마 육체의 질병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병은 나병과 같이 의료적으로 치유가 거의 어려운 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고 묵상할 때, 관망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실어서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때, 시편은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찬송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겁기는 하지만 이 시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깊은 침체 또는 버림 받았다고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이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 시인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9절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아뢰며 비통한 심정으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10-12절에서 시인은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에 도전을 합니다. 그리고 13-18절에서 그는 계속 끈질기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 끝없는 고난 속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기도 (1-9; 욘 2:3; 욥 30:1)
먼저 1-9절은 신자가 끝이 없다고 느껴지는 고난 속에 처해 있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기도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말 자체가 좀 절망적으로 들릴지라도 말입니다. 1절을 보지요.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시편 88:1).” 이 시편 전체에서 유일한 긍정적 표현입니다. 시인은 언약의 성호인 ‘여호와’로 하나님을 부르고,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자기가 구원해달라고 기도할 근거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과 그가 그 언약에 기대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바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믿음의 신호가 마치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매우 약할지라도,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믿음을 살짝 볼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이 기도에 표출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야로’ 부르짖습니다. 문자적으로 ‘낮과 밤’이라는 말인데, 항상 하루 종일 부르짖는다는 말입니다. 2절은 그의 간절함과 절박함을 잘 보여줍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시편 88:2).” 헤만은 끊임없는 슬픔 속에서 그 영혼의 짐을 하나님을 향해서 배출합니다.
3-6절은 자기 상황에 대한 묘사인데, 중심 이미지는 ‘스올, 무덤, 죽음’입니다. 3절입니다.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시편 88:3).” 시인은 내적으로 영혼에 재난이 가득하고 외적으로는 생명이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그는 마치 암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것처럼, 날마다 새로운 약함과 더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그가 슬픔에 파묻히기 보다는 혹은 슬픔에 파묻히면서도, 자신의 괴로움을 하나님을 향해 배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4-5절입니다.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시편 88:4–5).” ‘무덤에 내려가는 자’는 죽어가는 자이고 조만간 생명이 끝날 자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힘 없는 용사’는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힘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같다는 말은 자신이 마치 전쟁터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 없는 주검들과 같이 여겨졌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던져진’이라는 말은 본래 ‘자유로운, 놓아주는, 풀려난, 세금이 면제된’이라는 뜻인데,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지상적 결박인 생명에서 풀려나 죽게 되었다는 반어적 의미로 보입니다. 사실, 죽어서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잊어버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자가 과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참된 믿음을 소유한 신자의 고백일 수 있는가 말입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는 신자들이 이런 비참한 죽음을 당할 수 있으면 당한 바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초기 교회와 종교개혁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 개별적 사례들은 무수합니다.
6절에서는 시인의 논지가 좀 더 강해집니다.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6절의 주어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웅덩이는 무덤을, 어둠은 죽은 자들의 상태를, 음침한 곳은 돌아올 수 없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지금 시인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우리 인생에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습니다. 욥도 헤만과 같이, 자기에게 오는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기인한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보통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지만, 이 경우에서 보듯이 도리어 신자들이 고난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라고 물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플러머(William Plummer)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경건한 지성에게는, 환난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안심이 되는 일이다. 환난들은 하나님이 방탕하게 마음대로 하시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잘못도 행하지 않으시면서 나에게 고난을 주실 수 있으시다.”
7절에서도 사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합니다.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시편 88:7).”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와 흡사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요나 2:3).”파도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엄청난 고난과 외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8절입니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시편 88:8).” 친구들이 멀리 떠나가고 시인은 홀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이 시인을 에워쌉니다. 욥도 친구들이 고난 속에 있는 자신을 떠나는 경험을 했습니다(욥 30:1). 나아가 시인은 친구들에게 가증스러운 존재로 회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갇힌 존재, 고립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헤만이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요? 9절입니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시편 88:9).” 눈이 쇠하였다는 것은 그가 모든 건강을 다 잃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시인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뿐입니다. 그래서 이 순간에도 그는 ‘매일’ 주를 부르고 두 손을 들어 주께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도전 (10-12; 마 27:46)
10-12절은 시인이 하나님의 지혜에 도전하는 수사학적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들은 시인의 불만이 절정에 치닫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시간이 길어졌을 때, 욥이 보여주었던 태도를 상기시켜 줍니다. 10-12절을 읽어보지요.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시편 88:10–12).”
기이한 일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그리고 기적과 공의는 모두 하나님께서 시인을 고통에서 건져 주시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 주신다면 죽기 전에 하셔야지 죽은 다음에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절망적 심정으로 시인은 도전합니다. 시인에게는 죽음 이후의 부활 소망을 모르거나 없었던 것일까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구약 시대에는 죽음 이후의 부활 소망이 없었거나 희미했다고 설명하지만, 이런 설명으로 본문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도 않고 적실하지도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이름을 높이려면 죽기 전에 그 구원이 임해야 한다는 시인의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는 이런 설명들과 비교할 수 없는 기독교 복음의 가장 심오한 진리로 우리를 데려가는 지점이 있습니다. 시인이 절망의 한계점에서 자신이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는 지점에서, 그는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을 향해 조금의 의심도 없이 외치셨던 주님을 만납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 27:46).” 시인은 이 절망의 자리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으신 주님과 만납니다. 그리고 마음을 실어 이 시편을 읽고 묵상하며 자신의 기도로 삼는 모든 성도들이 이 자리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절망의 느낌 가운데 있는 신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헤만이 10-12절에서 말한 것처럼 불경하게 들리는 도발적 언사로 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상하고 찢긴 마음을 책망하면서 그들의 말을 교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로써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을 표현해 주는 것이 최선일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계신 주님을 친구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과는 달리, 때로는 겸손한 침묵이 비통해하는 신자들을 위한 최고의 조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 (13-18; 창 32:24-32)
13-14절에서 시인은 계속 기도합니다. 사실, 이것이 놀랍습니다. 시인의 기도의 내용만 보면, 1절을 제외하면 신앙의 요소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끈질기게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연약하지만 참된 믿음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편 88:13–14).”
다시 헤만은 ‘여호와’라는 언약의 성호를 부릅니다. 여기서 ‘아침에’라는 말은 회복의 희망을 암시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고통과 번민 속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침에도 여전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렉 키드너는 “시인은 씨름하는 야곱 만큼이나 끈질기다”고 말합니다(창 32:24-32). 하지만, 야곱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기도에 대한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14절이 응답받지 못하는 시인의 좌절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편 88:14).” 우리는 이 좌절어린 불평 조차 시인의 믿음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이 이토록 좌절하는 것은, 그의 고통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왔기 때문입니다. 15절입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시편 88:15).” 당황하였다는 표현은 시인이 느끼는 좌절과 무기력함, 심란함을 잘 보여줍니다.
16-17절입니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시편 88:16–17).” 16-17절은 시인에게 임한 두려움의 결과를 표현합니다. 비록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대어 끈질기게 기도하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난과 고통에 짓눌림 당한 것 뿐입니다. 시인은 패배감과 고독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우리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마지막 구절에서 무언가 반전이 일어나기를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18절입니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시편 88:18).”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외로움을 토로합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셨고 돌아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친구는 흑암 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88편의 마지막 단어가 ‘흑암’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입니다. 오래도록 자기 삶에 함께 했던 그 흑암이 이제는 친밀하고 편안한 친구처럼 되었습니다. 헤만의 기도는 이렇게 흑암 속에서 끝납니다.


4. 교훈과 적용 (롬 8:22f; 욥 1:10; 시 46:10; 벧전 4:12-13; 롬 8:36-39)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시편이 아닙니까? 제가 앞에서 던졌던 질문을 기억하시지요? 우리는 이 시편을 어떻게 우리의 기도에 사용할 수 있습니까? 이 시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 하고자 하심입니까? 제임스 보이스의 말입니다. “88편은 성숙한 신자들도 이런 절망의 순간에 이를 만큼 문제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점에서 우리는 시편에 88편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성숙한 신자는 결코 이 시인이 빠진 것과 같이 심각하고 깊은 영적 침체에 이르지 않는다는 헛된 믿음에 머물지 않게 해줍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삶에 대해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오해를 함으로써,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보다는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영 돌아서려는 좌절의 유혹에 빠지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절망적 요인들, 치명적 질병, 시간 안에서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있을지라도,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문은 가르쳐줍니다. 데렉 키드너는 이 시편을 통해서 얻는 유익을 네 가지로 말하는데, 저는 이 내용에 조금 살을 붙여 설명함으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첫째, 이 시편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지상의 몫으로 받는 것이 풀려나지 않는 고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대부분의 시편에서 우리가 보는 해피 엔딩은 보너스로 받아들여야지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우리가 얻을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주지 않으시고 보류하심은, 하나님이 힘이 없으셔서 패배하셨다는 뜻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이 패배를 불쾌하게 여기신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둘째, 이 시편은 고통 가운데서 내는 신음 소리를 통해, 현재의 질서(세상)를 최종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고 교훈합니다(롬 8:22이하).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넘어서는 소망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사실, 2천년의 교회사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고통과 슬픔을 해결하지 못한 채 연약함 속에서 인생을 마쳤다는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19세기 미국의 장로교 목사요 저술가였던 제임스 쏜웰(James Henley Thornwell, 1812-1862)의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1859년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전에 목회를 했던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콜롬비아로 서둘러 가야 했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깊이 교제를 하던 딸 내니(Nannie)의 결혼 주례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도착한 쏜웰을 맞이한 것은 아름다운 예비 신부인 딸이 아니라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딸이었습니다. 배달된 웨딩드레스는 그녀의 수의가 될 것이었습니다. 결혼을 축하하려는 사람들은 속속 도착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결혼식의 하객이 아니라 장례식의 조문객이 될 것이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쏜웰의 전기를 쓴 벤자민 몰갠 팔머(Benjamin Morgan Palmer)는 “딸이 결혼 서약을 해야 했던 날이 조금 지나, 흰 장갑을 끼고 그녀의 영구차를 끌고 무덤으로 이끌었던 사람들은 곧 다른 장면에서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해야 했다.”고 썼습니다. 그녀는 지금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로 준비되었네”라고 새겨진 평판이 놓여진 콜롬비아의 엘름우드 묘지에 누워있습니다. 쏜웰은 이후 시편 88편의 슬픔과 흑암을 경험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물론 신약성경의 은혜와 부활 소망의 메시지를 믿는 신실한 목사였지만, 이것이 딸을 잃은 슬픔으로부터 쏜웰을 건져주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전기의 한 대목입니다. “그 상한 아버지는 결코 그 슬픔으로부터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이때로부터 그의 건강은 점차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슬픔이 그의 얼굴에 깃들었다. 은혜는 날마다 점점 더 달콤해졌고 부드러웠다. 그것은 그가 먼저 간 딸을 위에서 만나기 위해 원숙해지고(죽음이 가까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데렉 키드너가 말하는 세번째 교훈입니다. 시인은 욥이 그랬듯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흑암 속에서 그리고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기도를 완성합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라고 욥의 신앙에 대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욥기 1:10).” 사탄의 이 말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물론 ‘그렇다’입니다. 참 신앙은 이유가 있고 까닭이 있어서 그 조건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에는 시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더 큰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는 것을 겸손하게 배웁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편 46:10).” 우리는 우리 같이 선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놀라기 보다, 도리어 우리 죄를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죽게 하실 만큼, 오만한 죄인들인 우리에게 모든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놀라야 합니다. 시인이 사라지지 않는 고통 속에서 절망감을 느끼면서도 끈질기게 언약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에게 최선이고 최고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이런 슬픔과 고난이 우리의 몫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불시험을 당하는 일을 이상하게 여기기 보다는 도리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날에 우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실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벧전 4:12-13). 그리고 지난 주일에 들었던 주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비록 종일 도살 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당할지라도, 넉넉히 이기는 자들입니다(롬 8:36-3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슬픔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기는 자들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아멘! 우리 삶의 자리가 지금 어떠하든지, 삼위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