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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9). 돌무더기 위에서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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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79). 돌무더기 위에서 울다

시편 79:1-1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5-05

말씀내용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소위 돌무더기 위에 앉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울되 하나님 앞에서 울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울 것인가? 어떻게 울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오늘 시편 79편을 상고할 때 우리가 던지게 되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시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돌무더기 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울며 부르는 노래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1. 79편의 성격과 구조
시편 79편의 내용은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와 대살륙이 일어났던 주전 586년의 사건과 깊이 연관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사건 외에도, 이스라엘 역사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게 굴욕을 당하고 수치를 입은 사건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그런 사건들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74편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관련된 시편임을 보았는데, 79편과의 차이가 있다면 74편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초점을 둔 것에 비해, 79편은 예루살렘 거리들에서 백성들에게 일어난 살육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입니다. 데렉 키드너는 이 시편의 기록방식을 볼 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기도라기 보다, 예루살렘에 남겨진 생존자들의 기도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79편은 우울과 놀라움이 가득하지만, 절망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79편은 탄식—기도—찬송, 세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1-4절은 대적들이 행한 파괴로 인해 탄식이고 5-12절은 돌무더기 위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13절은 감사와 찬양의 내용입니다.


2. 탄식 (1-4; 출 15:17; 렘 7:33; 겔 35:15)
79편은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라는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친 영향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유대 말기 백성들의 신앙은 온전하거나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참화 속에서 남은 자들을 통해 언약 백성의 신앙을 회복시키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때, 우리는 현재의 코로나 팬데믹 상황도 조금은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4절의 탄식은 과연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시편 79:1).”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어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자들은 ‘이방 나라들’입니다. 그들이 한 짓은 단순히 유다를 침범하고 예루살렘을 파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 ‘주의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기업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출 15;17). 예루살렘은 ‘주의 기업의 땅’입니다. 또 그들이 더럽힌 성전은 단순히 많은 신전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이신 ‘주의 성전’입니다. 그들은 성전 기구들을 훼손하고 약탈하고 결국에는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도발했습니다. 이것이 ‘주의 기업의 땅’과 ‘주의 성전’이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입니다.
2-3절은 그들이 당한 일을 더 설명합니다. “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시편 79:2–3).” 예루살렘에서는 무시무시한 살육이 일어났습니다. 보통 절기 때가 되면 예루살렘 성전 주변은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의 피로 인해 땅이 젖을 정도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제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피로 땅이 젖었습니다.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다”고 표현할 만큼 말입니다.
또 침략자들은 살육한 시신들을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예레미야 7:33).” 고대의 정복자들은 주검들을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함으로써 죽은 자들에게 치욕을 더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온 나라가 모멸과 굴욕과 수치와 고통을 당했습니다. 시인은 이런 일을 당한 주검들을 ‘주의 종들의 시체’, ‘주의 성도들의 육체’라고 표현합니다. 살육을 당한 자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는 히브리말로 ‘하시드’인데 헤세드, 주의 언약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시인이 강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시인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행해진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시편 79:4).” 수치를 당한 것은 비단 죽은 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웃 나라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고 ‘에워싼 자’들에게 조소와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에돔과 같은 인근 나라들이 유다가 멸망 당할 때 동정을 하기는 커녕 즐거워했던 일을 지적하는 것입니다(참조, 겔 35:15). 이방 나라들(1), 우리 이웃과 우리를 에워싼 자(4)들이 다 유다의 대적이 되었고, 하나님의 대적이 되었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3. 기도 (5-12; 벧전 3:9-12; 마 6:9; 단 9:17-19; 계 6:10)
여기까지는 돌무더기 위에서의 탄식이고 울음입니다. 이제 5절부터 12절까지 간구로서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5절은 앞의 탄식과 뒤의 기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시편 79:5).” 시인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진노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히’라는 말은 최상급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과도하게 노하시리이까”라는 말입니다. 진노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두려움과 절망이 서려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시인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주의 질투’라는 표현은 원인과 결과를 함의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질투를 불붙게 할만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이때 주의 백성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입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원수, 하나님의 대적들을 다루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시편 79:6–7).” 원수들은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입니다. 특별히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경외하지도 않는 자들입니다. ‘주의 노’는 5절의 주의 질투’처럼 원인과 결과를 함의하는 말입니다. 즉, 원수들이 하나님의 노가 쏟아 부어질 만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쏟으소서’라는 말도 원수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피를 물 같이 흐르게 하였듯이(3) 하나님께서 무서운 심판을 퍼부어 주시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으셔야 할 이유는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그의 거처는 주의 기업이고 소유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침범한 것입니다.
칼빈은 시편주석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이런 기도를 특정 대상과 관련해 드릴 수 있는가? 그의 대답입니다. “공적인 성격으로 둘러 쌓인 사람들이 아니면, 개인적 고려사항들을 온전히 제쳐놓고 교회의 안녕 만을 생각하고 그것에 깊이 연관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기도할 수는 없다.”(Calvin, Commentaries, 5:288. Phillips, R. D. (2020). Psalms 73–106.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Phillips, R. D. (2020). Psalms 73–106.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 85).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에서 재인용.)
우리는 이런 경우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경고하되, 복수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베드로전서 3:9–12).”
이제 시인은 자신들의 죄악을 용서해주시기를 구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편 79:8–9).” 이 모든 참화의 원인은 그들의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땅이 황폐해졌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백성은 살육을 당했습니다. 생존자들은 죄책감과 슬픔에 망연자실해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련함입니다. 시인이 구하는 것은 주의 긍휼입니다. 그들은 받아 마땅한 진노와 형벌을 받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여기서 긍휼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은혜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라면, 긍휼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마땅히 받을 것은 저주와 형벌과 진노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더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의 긍휼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마땅히 더 받아야 하지만, 이제는 그 진노를 우리에게서 그치시고, 원수들에게 갚아 달라는 것입니다.
9절은 ‘도우시며…건지시며…사하소서’라는 구체적인 간구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시인이 주장하는 간구의 근거를 보십시오.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그리고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듯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기도입니다(마 6:9). 시인은 자기들이 당한 수치와 굴욕을 주목하기 보다, 하나님의 이름에 가해진 수치와 오염을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멸하시고 그 언약 백성을 다시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시켜 주신다면, 세상은 다시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기도는 포로 생활이 70년이면 마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깨달은 다니엘이 드린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다니엘 9:17–19).” 죄인인 우리가 자기 의로움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제 좀 더 담대하게 나아가 구합니다.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시편 79:10).” 이방나라들이 묻는 질문의 요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무기력하고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방 나라들이 이런 말을 감히 할 수 없으며 그런 자랑을 하는 것 조차 허락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부탁합니다. 이 기도는 요한계시록에서 순교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요한계시록 6:10).” 물론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이 일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순교자들과는 다른 상황임에는 분명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수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11절입니다.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시편 79:11).” 자신들의 가련한 처지는 ‘갇힌 자’와 ‘죽이기로 정해진 자’라는 표현에 묻어납니다. 이들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주의 크신 능력’ 밖에는 없습니다.
간구의 마지막인 12절에서 시인은 율법의 규정을 드러냅니다.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시편 79:12).” 그들의 행위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것이기에, 율법의 동해복수법을 적용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7배, 즉 완전한 갚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감사와 찬송 (13; 시 84:5-7)
79편은 13절의 감사와 찬송으로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편 79:13).” 시인은 자기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이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지금까지 시인으로 하여금 기도를 포기하지 않게 만든 요인이라는 것을 넌지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에 대한 확신이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라고 찬송과 감사의 고백을 표명합니다. 비록 79편은 돌무더기 위에서의 탄식으로 시작했지만, 이와 같은 감사와 찬송의 고백으로 마치게 됩니다. 이것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결국 성도는 그 길은 시온의 대로였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편 84:5–7).”


5. 교훈과 적용 (롬 8:32-39; 왕하 19:28)
79편 말씀을 맺으면서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돌무더기 위에서 어떻게 울고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편을 통해 여러분에게 무엇을 교훈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 속에서 겪은 참화는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으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게 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시인은 그토록 담대하게 대적들에게 진노를 쏟아 복수해달라고 구할 수 있었습니까? 그 비밀은 정체성 인식입니다. 주의 기업의 땅, 주의 성전(1), 주의 종들의 시체, 주의 성도들의 육체(2), 주의 종들(10), 그리고 13절에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라는 표현들이 시인의 정체성 인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들의 불충함에도 불구하고 끊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 자신들이 성도, 즉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고 있는 자들이라는 확신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물러서지 않고 기도하게 만든 요소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날마다 환난 속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확신을 심어주려고 성령의 영감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2–39).”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심지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헌신하시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변호하실 것이기에 신자들은 그분의 계시된 성품과 계획에 맞추어 행동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악한 자들의 핍박으로 고통 당할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고 당신의 이름을 변호하시기를 호소하면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의 기도에 힘을 더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만 들으시는 게 아닙니다. 데렉 키드너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세 가지 음성의 어조가 이 시편에 나온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고통 받는 백성의 한숨 소리입니다. 기도 조차 할 수 없을 때, 자녀들이 내쉬는 한숨 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신음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대적들의 조롱 소리를 들으십니다. 대적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10). 하나님은 언제나 대적들의 비아냥과 조롱을 다 듣고 계십니다. 랍사게가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떠든 교만한 말들을 다 들으셨고 그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왕하 19:28). 세번째로 백성의 찬양 소리를 들으십니다. 13절에서 시인이 드린 찬송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상황에서 기도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함으로 징계를 받는다면, 그 고난 속에서 우리는 주저 말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편 79:9).”라고 말입니다.
리처드 필립스는 말합니다. “시편 79편은 오늘날에도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에 낭독되고 있다. 여전히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슬퍼하며 재건을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보내심으로 당신의 긍휼과 능력과 신실함을 가장 은혜스럽게 보여주셨다.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모든 죄악을 사하심으로 이미 응답된 이 기도를 유대인들이 아직도 드리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1서 2:1–2).””(Phillips, R. D. (2020). Psalms 73–106. (R. D. Phillips, P. G. Ryken, & I. M. Duguid, Eds.) (p. 91).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