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출애굽기 강해 (42) - 십계명(10) 탐심(1)

권별 강해설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출애굽기 강해 (42) - 십계명(10) 탐심(1)

출애굽기 20:17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1-07-22

말씀내용
<십계명(10): 탐심(1)> 출 20:17



1. 과소평가되는 계명/죄악
우리는 이제 십계명의 마지막 열번째 계명에 왔습니다.

A. 십계명의 이상한 결말?
그런데 이 계명을 읽어보면 그 앞선 계명들에 비해서 조금은 시시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로 축소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 별 것 아니군”이라고 생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용두사미 같은 느낌 말입니다. 그러나 앨 몰러가 지적했듯이 이 마지막 계명은 십계명의 첫번째 계명과 함께 마치 책들의 양끝에 책들이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북엔드(bookend)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5과 골로새서 3:5에서 말씀한대로 탐심이 우상숭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첫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는 계명과 동일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계명 안에 나머지 모든 계명이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탐심이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거짓증거들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이 마지막 계명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계명이 아니고 여기 언급되는 탐심의 죄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죄인 것입니다.

i. 크리소스톰
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고 당대 최고의 설교가였던 크리소스톰은 탐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죄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탐욕의 죄다. 보라. 육체적인 색욕은 일시적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탐욕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탐욕은 결코 잠자지 않는다. 탐욕은 육체적인 색욕을 이기는 유일한 죄다.” 실로 무섭지 않습니까?

ii. 마틴 루터: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을 위한 계명”
그런데 마틴 루터가 이 계명에 대해서 한 말도 매우 정곡을 찌르는 바가 있습니다. 그는 이 마지막 계명을 가리켜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을 위한 계명”이라고 말했는데 앞선 계명들에서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바로 이 계명에 다다르게 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 사도가 그렇게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롬 7:7~8).

B. 인간의 첫번째 범죄: “탐스럽기도 한지라.”
이 계명이 금하는 바, 탐심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최고의 사건은 바로 인류 최초의 사람들의 범죄입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그때 하와가 원했던 것은 그 과일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하나님의 어떤 것?지혜?을 가지기를 원했고 그것을 잘못된 방식?계명을 어김으로써 소유하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첫 범죄는 바로 이 열번째 계명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첫 범죄인 만큼, 그 후손들인 우리들에게도 결코 녹녹한 사항이 아닌 것입니다.

C. 환경: 소비주의(Consumerism)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은 더더욱 우리의 탐심을 자극하는 환경, 인류 역사가 경험한 최고의 탐심 자극, 탐욕 중심의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옛날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탐심이 많고 탐욕스럽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 죄인이기에 동일합니다. 다만, 우리의 탐심을 자극하는 환경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자본주의, 물질주의에 의해서 형성된 소비주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i. 상업 광고: 새롭고 더 편리한 것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탐심은 광고를 성공하게 만드는 힘이다.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상업광고의 시대가 열렸고 지금은 컴퓨터와 온갖 스마트폰을 통해서도 이런 광고들을 접하게 됩니다. 일단 시각적으로 사람의 탐심을 자극한다는 것은 과거 청각에만 의지하던 것에 비하면 거의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아마 2D에서 3D로 그리고 4D로 경험하게 하려고 애들을 쓸 것입니다. 그 상업 광고가 하는 말들도 역시 우리 탐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한 때 “부자 되세요”라로 말하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가만히 잘 살고 있다가도 이 말을 들으면 왠지 불만이 생기고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새롭고 더 편리한 것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탐심은 광고를 성공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이간에게 욕구가 없다면 이런 광고가 통할 수 없겠지요. 잘 살다가도, 광고에서 새로 나온 모델을 보게 되면 갑자기 불행해집니다. 그것을 사야만 행복할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됩니다. 조금 과정하자면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ii. 성경적 관점: American dream과 새마을운동의 본질은 탐심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거 미국 이민의 열풍을 불러온 소위 아메리칸 드림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그 본질이 탐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삶, 그런데 그것이 어떤 면에서 좋은 삶이었습니까? 더 나은 교육, 더 나은 직업, 더 나은 수입...뭐,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까? 박정희 대통령 때 새마을 운동을 생각해보십시오. 새마을 노래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무엇입니까?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였습니다. 근본적으로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런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 인간의 열심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운동들이 추구한 것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저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풍부함에 있느니라.”

iii. 타락한 세상의 본질: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풍부함에 있다.”(참고, 눅 12:15)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세상의 본질이고, 타락한 세상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우리의 삶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하는 것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메시지를 들을 것인가? 어떤 메시지를 듣고 사는가?

2. 탐심의 문제: “미국의 영?”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좋은 조건으로 미국에 거주할 기회를 얻었지만 한국으로 들어간 한 형제가 미국에 대해서 말하면서 자기가 그 결정을 할 때 자신과 아내를 힘들게 했던 것은 ‘미국의 영’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단지 미국에만 있는 영은 아니지만, 미국 처럼 탐욕을 부추기는 나라와 사회는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영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자는 역사상 오늘날의 미국 처럼 탐욕을 부추기는 나라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지적했는데 공감합니다. 그 형제가 말한 미국의 영은 바로 탐욕이고, 이것이 거의 종교적 수준의 위협이기에 영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논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A. 이야기(신약)
성경에는 이 탐심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습니다.

i. 유산분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동생(눅 12:13~14)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주님께 와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형이 부모의 유산을 동생 것까지 다 독식해버린 모양입니다. 주님이 형에게 말해서 나누라고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시면서 그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왜 거절하셨을까요? 아마 이 청년은 정말 억울했고, 정직해보이는데 말입니다. 이 질문을 남겨두고 우리는 이어지는 또 하나의 비유를 주님께로부터 듣게 됩니다.

ii. 어리석은 부자(눅 12:16~21)
그것은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큰 수확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수확이 컸던지 그 많은 수확을 저장할 창고가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크게 지을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세상으로 볼 때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큼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가가 이어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궁리하고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자신의 탐심을 채울 수 있는 것 물질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iii. 두 이야기를 연결시키는 다리(눅 12:15):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청년 그리고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나온 이 부자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공통점이 있기는 합니까? 유산을 동생과 나누지 않고 혼자 먹어버린 형과 부자의 공통점은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이 두 이야기를 이어주는 말씀이 15절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두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탐심입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에 대한 주님의 해설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주님은 그 옳아보이는 청년에게서 탐심을 보셨고 그 탐심을 인하여 주님은 그 청년의 요구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 탐심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부자의 문제 또한 탐심이었습니다. 탐심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B. 이야기(구약): 거머리와 두 딸(잠 30:15~16)
구약 성경의 잠언에는 이와 관련된 아주 재미있는 유머가 있습니다. 거머리와 두 딸의 이야기입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거머리가 두 개의 빨판을 가지고 하나는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게 하고 다른 하나로는 피를 빨아대는 모습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어리석음의 절정입니다. 왜 이것이 탐심에 관한 이야기인가는 16절의 설명에서 분명해집니다.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로써 잠언 기자는 만족이 없는 탐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3. 탐심은 죄의 뿌리이고 그 결국은 죽음이다(약 1:14~15; 4:1~2a).
성경이 탐심의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다루는가 하는 것을 조금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탐심은 죄의 뿌리이자, 그 결국은 죽음입니다. 여러분은 탐심이 죄의 뿌리라는 말을 들으시면서 혹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구절을 기억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딤전 6:10). 그러나 이 구절의 전체를 읽어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돈을 탐하는 것에 대한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이제 야고보서를 보겠습니다.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여기 욕심이라고 쓰여진 말이 바로 탐심이라는 말과 일치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은 탐심 때문에 시험(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탐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게 되면 죽음을 낳는 것입니다. 즉 탐심은 죄의 뿌리이고 그 결국은 죽음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서 4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1~2a).” 같은 논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이것을 충분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A. 아간(수 7:21)
첫째는 아간의 경우입니다. 아간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일부 물품들을 훔친 사람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을 정복하지 못하고 패하고 맙니다. 제비를 뽑아서 아간의 죄악이 드러나자, 아간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 7:21).” 그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도록 유혹한 것은 탐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최후는 죽음이었습니다.

B.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1~11)
신약 성경에는 이 사건과 짝을 이루는 사건이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에 소개됩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이어 은혜를 충만히 경험하던 예루살렘 교회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로서 예수님을 믿게 된 거의 만여명에 이르는 신자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사도들의 발 아래 가져왔고 모두가 그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때 바나바라고 하는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은혜를 받아서 자기 토지를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에게 드렸습니다. 그의 됨됨이 자체가 워낙 훌륭했던터라 사도들이 그에게 새 이름을 바나바라고 붙여줄 정도였는데, 그가 이런 재산을 처분해서 교회에 드렸을 때 아마 사람들이 그를 매우 인정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라 불리우는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한 부부가 자기들도 이런 명성을 얻고 싶었던지 재산을 팔아서 사도 베드로의 발 아래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바치기 전에 그들의 마음 속에 일어났을 탐심이었습니다. 그것은 먼저는 명성에 대한 탐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재물을 판 뒤에는 재물에 대한 탐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성령을 속인 것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탐심이 만들어낸 죽음입니다.

C. 아합과 나봇(왕상 21):탐심이 거짓증거, 살인, 도둑질을 초래하였다.
또 하나, 이 탐심과 관련하여 상고할 이야기는 아합과 나봇의 이야기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은 사마리아에 있는 자기 궁궐에서 인접한 이스르엘에 있는 한 포도원이 왜 그렇게 맘에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 포도원의 주인은 나봇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나봇에게 값을 충분히 지불할테니 포도원을 넘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봇은 이 땅의 경계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기 때문에 왕일지라도 팔 수 있는게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나봇에게 이것은 신앙의 문제였고 아합에게도 그래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 속에 일어난 탐심이라는 것이 인간을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아합은 마치 떼를 쓰는 어린 아이처럼 식음을 전폐하고 들어눕습니다. 그의 딸 아달랴와 함께 구약 역사 최악의 여인으로 꼽히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꾀를 냅니다. 결국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 나봇의 동네 장로와 귀족들이 나봇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거짓증거를 하게 하여 돌로 쳐죽이게 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없는 그 포도원을 남편 아합에게 넘겨줍니다. 이 일 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이들에게 보내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형벌을 선고하십니다. 이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합의 탐심은 마땅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한 것이었습니다. 이 탐심은 거짓증거를 하게 했고, 살인을 하게 했으며, 마지막으로 도둑질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합의 집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이 일을 조작한 이세벨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하셨고 그의 피를 개들이 핥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D. 다윗(삼하 11~12)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싶은 인물은 다윗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다윗도 탐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장수의 아내를 취했고 완전 범죄를 저지르려고 하다가 결국은 그 남편인 자기의 장수 우리야를 죽이도록 살인 교사를 하게 됩니다. 우리야를 죽이기 위해서는 또 요압의 거짓이 요구되었습니다. 아합의 경우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아합은 왕일지라도 포도원을 힘으로 빼앗지는 않았으나, 다윗은 이미 빼앗은 후에 일을 덮으려고 하는 더 치졸하고 비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둘은 다 탐심에서 시작하여 거짓, 살인, 도둑질을 저질렀습니다. 다윗에게도 하나님께서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생애에 내내 따라다닌 슬픔이자 고통이었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선고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 12:10~11).” 탐심이 일으킨 비참한 결과입니다.

탐심은 힘이 있거나 없거나, 재물이 많거나 적거나 모든 인간이 가진 문제입니다. 힘이 있으면 있는 만큼 그 책임으로 인하여 두려운 문제이고, 힘이 없으면 없는 것으로 인한 위험이 적지 않습니다. 잠언 기자의 기도가 얼마나 현실적인 기도입니까? “(8)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

4. 그러나 소망이 있다(삼하 12:13; 시 51).
이런 탐심에서 누가 과연 자유할 수 있습니까? 열번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명령에서 여러분은 자유하십니까? 우리는 다 계명을 범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탐심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다윗이 얻어 누렸던 소망이요, 은혜입니다. 다윗은 아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고 그보다 더 치졸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인정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사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합도 선지자 엘리야의 심판의 말씀을 듣고는 회개를 한 것 처럼 보입니다. 아합은 선지자의 말을 들었을 때,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웠고 풀이 죽어 다녔다”고 했습니다(왕상 21:27). 하나님께서는 그의 겸비함을 보셨고 그래서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심판을 내리셨습니다(왕상 21:29). 아합의 태도는 분명히 겸비함이었지만, 그것이 곧 회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 아합에 대해서 나온 표현들을 다윗의 태도와 비교해보십시오. 다윗도 역시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삼하 12:16~17). 특별히 죽게 되리라고 선고받은 그 아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태도는 이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의 기도는 시편 51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외적인 제사로 자기의 죄를 사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시 51:16). 그래서 그는 주의 인자와 은혜와 긍휼을 구합니다(시 51:1). 그가 알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시 51:17). 상한 심령, broken heart 입니다. 오늘날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탐심에 대하여 일일이 선지자를 보내어 지적하시고 형벌을 선고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이미 다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합도, 다윗도 십계명을 알았고 이 열번째 계명을 알았습니다. 아간도 알았습니다. 우리들도 십계명을 알고 탐심에 대한 열번째 계명도 압니다. 하지만 이들 중에 회개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탐심의 문제를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까짓게 뭐냐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탐심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탐심의 문제를 인하여 마음을 찢기는 커녕, 옷도 찢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돌아보게 하시고 다윗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