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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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45) - 목마르신 생수의 근원 그리스도

요한복음 19:28-2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2-12-23

말씀내용
<목마르신 생수의 근원 그리스도> 요 19:28~29


1.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그리스도(히 2:17)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일곱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다섯번째 말씀에 해당됩니다. “내가 목마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일생에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놓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 주님은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셨을 때, 우리처럼 피곤하셨고 배가 주리셨으며 목이 마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목마른 인생이 경험하는 그 목마름을 똑같이 경험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온전한 한 인간으로써 그것을 겪으셨습니다.

A. ‘마라’ 같은 인생(출 15:22~27; 룻 1:20)
인생을 성경에 있는 한 단어로 설명하라면 저는 ‘마라’라는 단어를 선택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왔을 때 문제는 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삼일 길을 가서야 발견한 물은 먹지 못할 쓴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마라입니다. 쓰다는 뜻입니다. 실망하고 지친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고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지시하셨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쓴 물이 달게 변하여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에 던져져서 물을 달게 변화시킨 나무는 아무 나무가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무였으며,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마라’라는 단어를 룻기에서도 봅니다. 사사 시대에 흉년이 들어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의 가족 네 식구는 모압 땅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거기서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도 다 죽고, 나오미는 과부가 되어 두 며느리와 함께 남겨졌습니다. 그나마 며느리들도 다 모압 여인들이었습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떠났었지만 다 망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굳이 시어머니를 따라 오겠다는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왔다’고 말하자, 나오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고 말합니다(룻 1:20).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즐거움입니다. 마라는 앞에서 보았듯이, ‘괴롭다, 쓰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어떻게 나오미를 축복하셨는지를 룻기 전체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타락한 이후에 인간이 겪는 삶의 실존을 ‘마라’라는 단어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마라를 어떤 인간이 겪은 마라보다 더 철저하게 겪고 계셨던 것을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2. 반석이신 그리스도
사실, 인간이 겪는 목마름의 문제는 한 번쯤 겪고 지나는 문제가 아니라 사는 동안에 무수히 반복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물로는 완전히 해갈될 수도, 채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A. “내가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출 17:6).”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한 것은 물과 목마름의 문제였습니다. 마라의 사건이 출애굽기 15장의 일이었다면, 17장에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은 물의 문제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들은 또 모세를 원망하면서 그와 싸우려 들고 심지어는 돌로 칠 기세였습니다. 모세는 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 17:5~6).”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지팡이로 반석을 쳤고 반석이 깨지면서 백성들이 마실 만큼 어마어마한 물이 거기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시 105:41).”

B.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지금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 말씀을 해석하면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했습니다(고전 10:4). 조금 전 읽은 출애굽기의 본문을 잘 보십시오.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반석 위에 모세를 대하여 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육체를 가지고 거기 서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기 의도하신 것은 반석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이런 근거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영감으로 이 반석에 서신 분은 그리스도시며,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반석이 문제가 아니라,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물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백성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준 것은 어떤 특이하고도 기적적인 반석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C.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39; 4:13~14).”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초막절에 큰 소리로 백성들에게 외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셨던 분께서 십자가에서 “나는 목마르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막절에 주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설명이 7:39에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여기 ‘영광을 받는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당신 자신의 몸이 깨어짐으로써 저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심으로써 그들의 영적인 목마름, 곧 물이나, 돈이나, 명예나, 어떤 쾌락으로도 해갈되지 않는 영적인 목마름을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것들로 만족을 얻을 생각이라면, 세상의 것들에 대한 목마름을 채워 볼 생각이라면 교회로 올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약속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은 인간 실존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결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해갈될 수 없는 목마름을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3.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다(렘 2:19)
그렇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속임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 목마름의 진상을 보지 못한 채, 뭔가 ‘이런 것, 저런 것’만 채워지면 목마름이 없어질 것이라는 자기 기만입니다. 이런 자기 기만의 뿌리에는 속이는 자, 마귀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속임이 아니라 진상을, 실재를,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기 기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만입니다. 문제는 돈도, 성공도, 외모의 아름다움도, 쾌락도, 원만한 가정이나 관계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목마른 존재들입니다. 이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목마르다고 느끼는데, 그 원인이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이런 여타의 것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렘 2:19).”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통렬한 지적입니다. 여기서 ‘마라’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또 사용되었습니다.

A. 헛된 수고를 그치라(렘 2:13; 사 55:1~2).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헛된 수고를 그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 일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목마른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그들은 웅덩이를 열심히 팠습니다. 왜 웅덩이를 팠겠습니까? 물을 얻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그들이 파는 웅덩이는 물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물을 담아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때론 물이 나옵니다. 잠깐의 짜릿한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는 것이지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우물이 물을 담아둘 수 없기 때문에 한 번 물맛을 보고 나면 다시는 쓸 수 없는 우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우물을 파야 하지요. 이것이 헛된 수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이 행한 일을 악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런 수고는 헛된 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1~2).” 여러분은 혹시 헛된 수고를 하면서 사시지는 않습니까? 그 일은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만 해갈되고,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십자가에서 모든 예언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시 69:21; 22:14,15; 69:3,4 참고, 시 32:4)
우리는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예수님은 정신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처음부터 운명하시기까지 하셨던 말씀들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정신은 아주 명료했고 기억력도 전혀 손상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들, 아직 성취되지 않고 남아있는 예언을 생각하고 계셨고 그것을 마지막까지 완전하게 성취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주 전에도 우리가 잠깐 살폈지만, 28절에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라고 한 말씀의 의미는 창세기에서 구약 성경 전체의 메시아 예언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과 제자 요한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확인하셨다는 뜻입니다. 한 성경학자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창세기부터 말라기에 이르는 모든 말씀을 생각하고 계셨다고 말할 정도로 주님은 철저하게 당신께 대한 예언을 십자가 상에서 하시는 모든 말씀들을 통하여 이루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편에 이르러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한 가지, 마지막 한 가지를 주님께서 주목하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하여 여러 시편의 구절들을 연결시킬 수 있지만, 특별히 시편 69:21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주님은 앞서 쓸개 탄 포도주를 드렸을 때 그것을 거절하고 받지 않으셨습니다(마 27:34; 막 15:23). 마태복음에서는 ‘쓸개 탄 포도주’라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몰약을 탄 포도주’라고 했는데, 쓸개라는 말은 쓴 것들을 총칭해서 사용되곤 했던 예로 보건대, 정확하게는 몰약을 탄 포도주로서 십자가에 달린 죄수를 위한 자비의 행위로 베풀어진 것입니다. 마약 성분의 힘으로 진통의 효과가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통에 대해서 무감각한 상태로 십자가를 감당하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 신 포도주는 받으셨습니다. 아마 이것은 옆에 있는 로마 군인들이 자기들이 먹던 싸구려 포도주를 해융 곧 스폰지에 묻혀서 예수님의 입술에 대주었을 것인데, 이 군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목이 마르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시편의 예언이 이 군인들을 통하여 성취되게 하신 것입니다.

A. 지옥의 고통, 진노의 잔을 목마르도록 들이키신 그리스도(눅 16:24)
주님의 목마름은 기본적으로 죄인의 고통스러운 실존을 온전하게 겪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속에서 부자가 지옥에 떨어진 후, 아브라함에게 한 부탁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부탁합니다(눅 16:24). 지옥의 고통을 주님께서는 목마름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주님의 이 목마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진노의 잔을 바닥까지 비울 만큼 주님은 목이 마르셨다.” 주님의 목마름은 지옥의 목마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맛보아야 할 지옥의 목마름을 주님께서 대신 겪으시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겪지 않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B. 영적 갈망에 목마르신 그리스도(사 53:11; 히 12:2)
그러나 더 깊은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갈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이 수고가 종결되기를 바라시는 갈망이 있으셨습니다. 이것은 ‘빨리 고통을 끝내버리자’가 아니라, 이 수고를 완전하게 성취하심으로써 당신의 수고한 열매를 보고 기뻐하기를 갈망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사 53:11).”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지나 아버지와 복된 교제를 회복하실 것에 대한 복된 갈망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이 갈망을 지니심으로 십자가를 견디셨다고 썼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자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5. 갈보리에서 터진 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적 목마름을 완전하게 경험하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갈보리에서 타락한 인간의 실존적 목마름을 해갈시켜줄 수 있는 샘이 터졌습니다.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시 105:41).”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 샘이 터졌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 목마르심으로써 그 샘이 터졌습니다. 주님의 몸이 반석이 깨어지듯이,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상하고 깨짐으로써 그 샘이 터졌습니다. 크룸마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충분히 깊이 판다면, 우리는 거기 갈보리 위에 우리를 위해서 열려진 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으로부터 솟아나오는 넘치는 생명수를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 생명수 샘을 찾으셨습니까? 언제든지 마실 수 있고, 채움을 받을 수 있는 그 터진 샘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셨습니까? 우리로 그 샘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게 하시려고 친히 생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서 목마름의 자리로 나가신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마 5:6; 롬 4:5; 계 22:17)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성령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말하고,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신 것은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인간은 다 주리고 목마른 실존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에 주리고 목마른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영혼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역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데 그 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의 의 소위 ‘자기의’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옳고, 자기가 괜찮고 착하며, 자기가 바른 것을 드러내려고 하고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주림과 목마름에 대해서 주님은 아무 약속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저주의 말씀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화를 면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 가면을 쓰고 영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자기의에 만족하려는 삶의 기만을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의, 만인에게서 버림을 받고 오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나타나기를 원하는 자입니다. 만일 자기의 행위로 의로움을 가질 수 있다면 그는 결코 의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그런 의가 없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리고 자기의를 쌓아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이루신 의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롬 4:5). 성경의 맨 마지막에는 이런 은혜로운 초청이 있습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부르고 만족스러운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목마른 자들을 위한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주리고 목마르고, 실패하고 채워지지 않는 답답함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아십시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고 주림이며, 목마름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이것 저것만 주어지면 궁극적으로 채워질 수 있는 목마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갈보리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수를 맛보게 해달라고, 그것으로 내 목마른 인생을 해갈시켜달라고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은혜로 적셔주시기를 구합시다. 목마른 인생 속에서 갈보리의 샘에서 터져 나온 생명수로 적심을 받는 은혜를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