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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79) - 그리스도의 증인

요한복음 12:9-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7-10

말씀내용
본문은 계속 나사로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이 식사 자리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함께 했습니다. 이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과 또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몰려들었습니다. 식탁은 시몬의 집 안에 차려졌겠지만, 수많은 인파가 그 문 앞에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1. 불안한 사람들: 대제사장/관원들
본문은 이제 장면을 바꾸어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예루살렘의 당국자들, 지금 예수님과 나사로 사건으로 인하여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대제사장과 관원들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10절은 대제사장들이라고만 언급되었는데, 이렇게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사용되는 것은 공회를 구성하는 대제사장 가문들, 저명한 대제사장의 문중들과 함께 다스리는 대제사장들과 과거의 대제사장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행 4:6). 여기에 성전을 관리하던 책임자들과 경비 대장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이들은 대개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나사로 사건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위협은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나사로 사건의 소식을 듣게 되자 결정한 것은 예수를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참을대로 참았고 이대로 두다가는 큰 일이 나겠으니 그를 죽이자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들이 오늘 베다니의 저녁 식사를 보면서 내어놓는 또 하나의 대책은 나사로까지 죽여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의 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두 발로 걸어다니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부활의 증거요, 그를 살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존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하는 방식입니다. 그저 자기들을 불편하게 하는 증거를 찾아서 인멸하는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하는 방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것인지 생각 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방식을 나중에는 그대로 로마가 받아들였고 기독교 생명의 증거를 없애랴고 그 많은 신자들을 잡아 죽였지만, 그 증거는 그렇게 뿌리뽑히지 않았고 계속해서 번져가기만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2. 나사로, 역사상 최초의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증거
나사로는 어떤 면에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최초의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등장한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이 너무나 정확하게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1).” 그는 그리스도의 탁월한 증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증인이라는 말 보다는 증거라는 말이 그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증인은 자신이 목격한 것을 진술하는 사람이라면, 증거는 말하지 않더라도 증거 자체가 이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거는 그 자체가 설명입니다. 나사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대화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지금 크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잘못된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는 주님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이제는 나사로까지 죽여야만 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적대감이 나사로에게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최초의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삶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A. 나사로의 증인 자격 요건
나사로가 이런 증거와 증인으로서 가지는 자격 요건이 무엇입니까? 그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까? 단순하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i. 죽었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다.
첫째는 그가 죽었다가 나흘만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다는 사실입니다. 죽었다가 살았다는 것,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주재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도 아니고, 절름발이가 일어선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죽은 자가 나흘이 되어 거의 썩어가고 있을 때, 예수님의 말 한 마디로 살아난 것입니다.

ii.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12:2)
둘째는 그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12장 2절에서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는 지금 주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고 주님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경험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엉뚱하게 인생을 낭비하고 살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실, 주님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했다는 것이 나사로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기사입니다. 이로써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된 자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아더 핑크가 강조하듯이). 그가 살아난 후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는 것,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두번째 자격 요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마 28:20).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리스도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입니다.

B. 그리스도인의 증인 자격 요건
나사로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가지는 자격 요건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어떻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격을 가지게 되는지 아십니까? 제자훈련과정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증거로 만드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오하며 본질적인 일이 필요합니다.

i. 증인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과 회심으로 태어난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첫번째 자격 요건은 나사로에게와 마찬가지로 그가 분명한 거듭남, 분명한 회심을 했는가 입니다. 즉, 그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선언합니다(엡 2:1). 모든 그리스도인도 다 죽은 자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신 사람들입니다(골 2:13; 엡 2:5).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거듭났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거듭남은 주님께서 직접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표현입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난다’, 혹은 ‘다시 난다’는 뜻입니다. 다시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설령, 그가 어떤 전도의 내용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증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말은 자신이 겪고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거듭남, 분명한 회심이라는 사건 자체가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드는 사건이 되는 것이지, 훈련시키고 가르쳐서 증인이 되게 만들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사실상 그 내용이 옳다고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위증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증인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과 회심이라는 사건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확실히 회심한 사람입니까?

ii.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분명한 증인으로 만든다.
두번째로 무엇이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만드는가? 나사로에게와 마찬가지로, 다시 살아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고 알려준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살려주신 다른 두 사람,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젊은 아들의 이후의 이야기를 전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 나사로만 딱 한 부분,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기록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사람은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였기 때문에 도저히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살아난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되었기에, 그 표시로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에게만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다시 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이 되는 진리입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성도는 주님을 더 알아가게 되고 주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증인이 치루는 대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하루 아침에 당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보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유대인들은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많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대제사장들에게는 불편한 수준을 넘어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사로를 죽여야만 되겠다고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은 증인은 대가를 지불한다는 사실입니다.

A. 그리스도인은 (원하든/원치 않든) 세상에 위협적 존재다.
사실 나사로가 위협적 존재가 된 것은 사회적, 종교적 이유가 섞여있는 문제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유대 사회에서의 독점적인 특권과 신분을 유지하는데 나사로의 존재는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관리하고 독점권을 얻고 있던 성전에서의 수입은 유대 사회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유대 사회는 예수라는 인물과 그가 살린 나사로로 인하여 심하게 흔들리고 있기에 그들은 사회적인 위협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과 대제사장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교리에 있어서도 위협을 느꼈습니다. 나사로가 있는 한, 그들의 가르침이 설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오늘 현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우 적실성이 있는 교훈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증거/증인은 세상에 위협적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에 위협적 존재가 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위협이 된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존재 때문에 또는 여러분이 가진 신앙 때문에 여러분이 위협이 된 적이 있으십니까? 위협이라는 표현이 지나치다면, 부담스러운 존재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불신자들이 여러분을 진정한 한편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B. 미움과 비난을 받을 준비를 하라(마 5:11~12; 요 15:18~21).
증인은 치룰 대가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 하나가 미움과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마태복음 5:11~1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그것은 성도에게는 훈장이요, 복입니다. 요한복음 15장으로 가면 주님은 그것을 장차 증인이 되어야 할 제자들에게 좀 더 설명해주십니다.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요 15:18~21).” 세상이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밉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미우면 자식도 밉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 식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속했다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주님을 미워했듯이 증인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기 때문에 미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복음을 말하지 않고 그냥 잠잠하게 살기로 작정하셨다면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분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면 말할수록 사람들은 여러분을 미워하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거듭난 하나님 자녀들이 증인으로서 치룰 대가입니다.

C. 증인은 증거 때문에 죽는다(계 6:9).
그저 증인이 치룰 대가가 미움과 비난 정도라면 좀 해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진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증인은 증거 때문에 죽는다 혹은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이후의 삶에 대해서 본문 외에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가 대제사장들의 음모대로 잡혀 죽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증인들의 이야기를 사도행전에서 읽습니다. 먼저 일곱 집사 중 스데반이 증거를 인하여 순교했고(행 7), 제자들 중에는 제일 먼저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순교했습니다(행 12:2). 사실상 모든 주님의 제자들이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계 6:9).” 순교자들이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을 때(행 1:8)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사실상 나를 위한 순교자가 되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증인은 그 가진 증거 때문에 죽습니다. 실제로, 어떤 강도 살인 사건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증거로 인하여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증거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4. “내 증인, 내 순교자가 되리라.”
증인이 되는 것, 아니 그리스도의 증거가 되는 것에 대하여 한 두 가지 정리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A. 말(증언)이나 성숙한 신앙(증인) 이전에 증거(존재)다.
복음 전도 훈련을 받은 적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분들을 봅니다. 또는 아직 제 신앙이 미약해서라고 하는 핑계도 듣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드립니다. 말이나 성숙한 신앙 이전에 중요한 것은 증거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 나사로처럼 산 증거입니다. 죽었다가 산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정리된 증언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성숙한 신앙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서 말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데 있어서 나사로가 무엇을 했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어있었고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시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소망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다시 산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는 Monergism(하나님의 단독적 역사)이라고 말합니다. 살아난 사람은, 살아난 사건 자체가 곧 증거입니다. 그는 말로써 하기 전에 이미 말하고 있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앗시시의 프란시스가 전도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필요하면 말도 사용해라.” 다시 살아난 사람들에게는 증거 자체로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B. 말(증언)과 성숙한 신앙(증인)이 수반된다.
그렇다고 해서 말이나 성숙한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도 필요하고, 성숙한 신앙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죽었다가 다시 산 사건에 부속하는 것이고 따라오는 것들입니다. 증거가 없는 말과 성숙한 신앙의 됨됨이는 거짓일 뿐입니다. 어떻게 말(증언)을 준비할 수 있고 어떻게 성숙한 신앙을 지닌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나사로가 주님과 함께 먹고 교제하듯이,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고서 이 두 가지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점점 더 깊이 깨달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지식이 정확하고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은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깨달아가면서 자기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점점 더 알아가게 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는 증인의 말을 구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은 어떻게 갖추어집니까?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길 밖에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 가장 탁월한 믿음의 본과 경건의 능력을 갖추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주님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던 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이,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는 능력있는 증인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의 성숙을 얻어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저는 오늘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많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의 이름을 아십니까? 오늘 나사로를 보면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맞닥드려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증인입니까? 여러분은 죽었다가 산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 분들입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증거로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마땅히 치룰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것을 각오하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게 하셨듯이, 저와 여러분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역사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상급이요, 면류관이요, 기쁨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