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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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2013) - (20). 매일 전쟁을 시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

시편 20:1-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4-05-09

말씀내용
1. 제왕시(Royal psalms)와 제의(liturgy)를 위한 시
20편과 21편은 시편의 분류상 제왕시라고 부릅니다. 제왕시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에 대한 시편들입니다. 그 왕들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을 의미할 수 있지만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오늘과 다음 주에 우리가 상고할 시편 20편과 21편은 지상의 왕과 관련된 제왕시입니다. 20편은 이제 전쟁에 나가는 왕과 군인들을 위한 백성들의 기도라고 할 수 있고 21편은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20편의 마지막 절과 21편의 첫 절은 연결이 됩니다. 20편 9절이 승리에 대한 간구이고 21편 1절은 응답하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20편은 제의를 위한 시였을 것으로 봅니다. 많은 시들이 그렇지만,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의식 가운데서 함께 교창을 했던 시였던 것 같습니다. 일단 이 시에서 ‘우리’라는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대개는 ‘나’라는 단수 대명사를 사용했는데 여기서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은 모두가 함께 교창을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의 교대가 나옵니다. 1~5절은 왕을 대신하여 백성들이 말하는 것이고, 6~8절은 개인이 하는 말입니다. 6절에서 갑자기 화자가 단수 대명사인 ‘나’로 바뀌어 ‘내가 아노니’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것은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9절은 다시 주어가 ‘우리’로 바뀌면서 전체 백성들의 화답이 이어집니다. 사실 개역개정역 성경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한계가 여기 있는데, 왕을 위해서 백성이 기도하는데 ‘너’라고 표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은 ‘너’를 ‘임금’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조금 더 이 기도의 상황을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전쟁이 일상이었던 삶
여기서 우리가 하나 이해해야 할 고대의 상황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전쟁은 먼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이웃 국가들과의 전쟁을 경험해야 했고, 그들은 언제라도 전쟁 통에 죽거나 포로로 붙잡혀갈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서가 수많은 전쟁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고 것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20편을 읽을 때, 하나님 앞에 그들의 왕과 군대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기도가 매우 절박한 기도였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더구나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살아서 돌아올는지 알지 못하는 왕과 군인들에게 있어서야 이 기도는 얼마나 더 절박했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상황과는 너무나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인 듯이 느껴지는 이 시편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사실은 우리도 매일 전쟁을 치르지 않습니까?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전쟁을 치르는 군인들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엄연히 마귀와 대적해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의 현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이 전쟁을 마주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이라는 시간을 사는 동안, 우리는 승리를 할 수 있을지 스스로 물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절박함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 시편은 우리가 매일 전쟁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이 전쟁에 임해야 합니까? “나는 하루의 전쟁도 승리할 자신이 없다. 나의 본성만이 살아 활개칠 뿐이다. 내 본성이 하나님의 은혜에 충분히 적심을 받지 못하면 나는 나의 죄악되고 악한 본성만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이 아닐까요? 우리는 어떻게 마귀를 대적해서 이길 힘을 스스로 안에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의 대적은 마귀와 세상 그리고 육체가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이 시편과 같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이 시편을 읽어야 하고, 이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을 수 있습니다.
3. 왕을 위한 기도(1~5)
이 시편은 백성들이 왕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1절부터 5절이 그 내용입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A. 위정자를 위한 기도가 아님
먼저 이 부분의 기도의 성격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2).” 하지만 이 본문은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안위는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전쟁에 나가시는 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달려있다는 이야기입니다.
B. 환난 날(1)
전쟁은 한 나라의 존폐가 달려있고 수 많은 사람의 생사가 걸려 있는 너무나 심각한 일입니다. 그것을 시인은 ‘환난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환난 날은 우리의 수입에 큰 영향을 미칠만한 일이 생겼거나 건강에 이상 징후가 생겼거나 혹은 자녀들의 삶에, 혹은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소중한 사람들의 삶에 혹은 그들과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들입니다. 나 자신의 삶의 안위에 어떤 심각한 상태가 발생했을 때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마귀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깨우시기 위해서 우리의 안위가 깨어지는 것 같은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는 말미에 다시 한 번 그들이 마귀를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들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말합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0~12).” 베드로 사도도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에게 이렇게 경각심을 줍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a).”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이 말씀을 알면서도 영적 전쟁이 실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날의 교회의 형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가 그렇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편의 이 기도에 동의하고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시편을 쓴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환난 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나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서 그런 믿음의 용기를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 많은 전쟁에서 이런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환난’에서 자기를 건지실 뿐 아니라, 자기를 높이 드시는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알기 때문이니다.
C. 성소에서 승패가 결정된다(2~3)
2절과 3절은 특이합니다.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왜 제가 특이하다고 말씀 드리는가 하면, 전쟁에 나가는 왕을 위한 이 기도에서 ‘전쟁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라고 표현하면 이상하지 않을 텐데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2절과 3절에서 언급되는 단어들은 성소, 시온, 소제, 번제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소가 있는 곳입니다. 모두가 다 제사와 관련된 말들입니다. 비록 전쟁에 나가서 전쟁터에서 싸움을 하겠지만, 그 승패가 결정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기던 성소라는 사실은 본문은 놀랍게 보여줍니다. 작고한 선교학자 폴 히버트는 영적 전쟁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최고의 무기는 거룩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거룩함의 중심에는 도덕이 아니라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경외함이 가장 분명하게 경험되고 표현되는 자리입니다. 이 점에서 예배가 무너진다면, 그 사람의 도덕도, 삶도 무너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았고 전쟁을 나가는 왕을 위한 기도에서 이것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되신 우리 주님께서도 극한의 고난과 십자가를 마주 하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 한곳에 엎드려 이마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격렬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승리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기로 결정하셨을 때 결정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이미 뱀의 머리를 짓밟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중요하고 사소한 일들, 우리의 모든 영적 싸움의 승패는 그 싸움의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기도의 골방, 우리 자신의 예배의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D.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4~5).”
세상에 이것보다 더 듣기 좋은 이야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다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시기를 바란다니 말입니다. 액자에 써서 침대에서 일어날 때 잘 보이는 벽에 걸어둘 만한 말씀입니다. 눈을 떴을 때 이 말씀을 읽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겠습니까? 우리는 다 이런 것을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소원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바램도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가 바로 성소와 시온에서 소제와 번제를 드린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련한 길로 행할 때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예배자가 되려고 하기 보다는 승리자와 성공자가 되기를 구하는 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분주합니다. 이기기 위해서 전략을 세우고 궁리하고 연습하고 조언을 구하고 회의를 해댑니다. 그러느라고 늘 우리에게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잠시 잠깐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조차도 우리의 머릿속은 싸움에 대한 생각과 궁리로 가득 차서 제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조차 못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어리석은 자의 길입니다. 4~5절은 성소와 시온에서 그가 드린 소제와 번제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께서 왕에게 승리를 주신 것을 알기에 백성들은 왕이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둘 것을 알고 왕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제사장의 확신(6~8)
백성들의 기도에 대해서 이제 제사장이 화답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6절에는 주어가 ‘나’라는 단수 대명사로 전환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 제사장이라고 단정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가 백성들의 기도에 대해서 확신을 주는 부분이라고 보는 것은 합당합니다. 그렇다면 그 역할을 할 사람은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6절에서 그는 ‘내가 아노니’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메시아이고 이 문맥에서는 왕입니다. 더 나아가 제사장이 안다고 선포하는 것은 “그의 오른 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이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신실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런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8).” 전쟁을 치르는 왕과 군대 그리고 백성은 계산을 먼저 할 것입니다.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수학 계산입니다. 아군의 병력과 적군의 병력을 계산하면 절대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 승패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은 전쟁을 수학 계산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언제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제사장이 8절에서 하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전쟁을 수학계산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렸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너무나 자주 우리는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외모를 의지하고 지식을 의지하고 그리고 명예를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이런 것들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어가시기도 하십니다. 이런 것들이 있어서도 아니고 없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이것이 우리가 영적 전쟁을 싸우는 방식입니다. 이 근거 위에서 제사장은 다시 한 번 승리의 확신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8).”
5. 믿음의 기도(9)
제사장의 말이 마치자, 온 백성들은 다시 한 번 더 큰 확신을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합창으로 이 시편은 마칩니다.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9).” 이것은 믿음의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야고보서는 말씀합니다(약 5:15~16). 그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조급함과 두려움은 이 확신 속에서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가 아니라 승리를 확신하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기도를 경험하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성령님께서는 이 기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환난 날에 두려움 속에서 우리가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했는데, 어느 새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놀라운 확신을 주시고 두려움을 물리치시고 기쁨과 확신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영적 전쟁의 승패는 우리의 골방에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예배에서 결정됩니다.
6.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
우리는 이 시편에서 정말 놀라운 복음을 듣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왕은 다윗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승리를 쟁취하셨습니다. 주님은 마귀의 머리를 짓밟으셨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히브리서 기자는 씁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 2:14).”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고전 15:26).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알아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서 싸우셨고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혜사 성령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사 성령의 능력으로 이 싸움을 싸우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할 때 이 싸움에 대한 교훈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8~19).” ‘모든 기도와 간구’를 그는 부탁합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모든 성도들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또 권면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는 ‘여러 성도’입니다. 원문에 이것은 ‘모든 성도’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넓은 범위를 의미한 것일까요? 먼저는 여러분이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은 개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살아가던 모든 개인주의를 깨뜨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 개인은 그 지체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싸움입니다. 개인 플레이는 금물입니다. 또 모든 성도는 우리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모든 선교사님들, 주의 종들, 모든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일단 그들의 소식을 듣고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또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멀리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소식을 들을 때 그들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에서 고통 당하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응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실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 외에 우리가 기도해야 할 두 번째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자신입니다. 사도는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말씀을 주사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도록 그리고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말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위해서 기도했듯이,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맡은 주의 종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가 성도들의 기도를 필요로 했다면 오늘날 목사들은 얼마나 더 기도가 필요한 존재들이겠습니까? 실로 우리는 전쟁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의 신상에 어떤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환난 날이 아니라고 착각하기 마십시오.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이고 전쟁의 날입니다. 우리는 병거나 말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찬송할 것입니다. 우리의 골방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터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함께 싸우십시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함께 나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