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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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1, 사랑하는 교회에게) - (4). 진리의 칼을 들어라

요한계시록 2:12-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1-02-20

말씀내용
1. 넓은 마음을 가진 버가모 교회 vs. 배교하는 교회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버가모 교회들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매우 인상적인 교회입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가 주장하고 옹호하는 많은 견해들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낙태에 대한 관대한 견해, 동성애를 포용하는 관용, 여성의 권익 옹호 등 많은 면에서 약자들의 편에 서 약자들을 대변해주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해서도 형제 사랑의 차원을 이야기하면서 화해의 몸짓을 보여줍니다. 텔레비전 토론에 나와서도 그들은 정말 멋있게 아무도 비판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펼치지도 않으면서 모든 사람들을 품어줄 만한 넓은 관용을 표현하곤 합니다. 사회는 이런 교회에 찬사를 보내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교회가 뭔가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런 버가모 교회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미국의 주류 교단들은 대개가 이런 버가모 교회의 자리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멀리 있는 남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잘못 읽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런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사랑하는 교회에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또 우리 자신이 얼마든지, 이런 자리에 있기도 하다는 것을 주님은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2. 충성된 증인이 있었다.
우리가 이런 버가모 교회와 같은 교회를 보게 되면, 그건 교회도 아니다 라고 단정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이렇게 모두를 끌어안는 관용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버가모 교회에도 충성된 증인이 있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의 이름은 안디바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그 신앙을 고백하다가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

3. 교회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에서 살아간다.
물론 안디바가 믿음 때문에 순교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버가모 교회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 그들이 사는 세상이 얼마나 교회에 대해서 적대적인 세상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매우 충격적으로 들릴만한 말을 사용하십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데라.”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안디바가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언급하십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곳은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A. 버가모 시,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
버가모를 주님께서 특별하게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이 버가모가 무슨 이상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 도시는 여느 로마 제국의 도시들과 같은 도시였습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거대도시였고 오래도록 이 아시아 지역의 수도 역할을 해왔던 도시였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는데 장서가 20만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요즘같이 책을 출판하는 시대가 아니고 모든 책은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필사해야 했던 시대에 20만권이라면 그 규모는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서관만큼이나 버가모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버가모 용지라고 알려진 양피지로 이것이 파피루스에 대한 대체 용지가 되게 됩니다. 여기까지만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버가모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라고 할 만큼 종교적 열심이 특출했습니다. 이 말은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도 서머나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년에 한 번은 황제의 신전에 와서 “가이사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죽임을 당한 것은 이 황제 숭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제우스 신전이 버가모 시의 뒤편 원뿔 모양의 언덕 위에 높이 37m, 넓이 34m 크기로 세워져 있어서 온 시가지를 굽어보는 형태였다고 합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이 제우스 신전을 염두에 두고 사단의 보좌가 있다고 말씀을 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단지 이런 형태의 건축물 때문에 버가모가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셨을까요? 버가모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들이 섬기는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였습니다. 이 신은 치유의 신으로 알려져서 수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으려고 이 신전으로 몰려왔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구주라고 불리웠기에 오직 한 분의 구주 그리스도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별히 혐오스러운 거짓 종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은 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약국 표시에서 보시는 뱀이 바로 이 뱀입니다. 병자들은 치유를 위해서 신전 안에서 하루를 자야 하는데, 이때 신전 안에 풀어놓은 뱀들이 지나가면서 병자들의 몸을 스치게 되면 그것이 자기들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생각했고 병이 나았다고 느꼈습니다. 이 뱀 때문에 더더욱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는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노골적으로 뱀으로 상징되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은 그야말로 성경이 상징하는 뱀, 곧 사단이라고 이해되기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주님께서는 사단의 위가 있는데라고 하셨으리라고 봅니다.

B.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단의 보좌가 있는데서 살아간다.
이것이 단지 고대 버가모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버가모 교회의 주소는 물론 버가모였는데, 주님은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 교회의 주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비단 버가모 교회만 처해있던 상황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가 처해있는 주소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통 불신자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늘 소수자로 살아오면서 억울하고 힘든 일들을 당하던 그리스도인들이 때론 기독교 정권을 가지게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되면 꼭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 역사의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세상을 통치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단이 왕노릇하는 세상에 우리는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단의 정권은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셔야 무너집니다. 우리가 기독교 대통령을 뽑아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비기독교, 심지어 반기독교적인 세상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부르심이라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쉽게 세상을 살아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주장하려고 하면 할수록 고난과 배척과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할수록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소수자로 믿음을 가지고 살려면, 억울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고 가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알아줍니까?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C. 심판자는 세상이 아니라 주님이시다.
이런 주님의 관점을 견지한다면 우리 교회가, 신자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정치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여론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백성들의 심판대에 서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도 그래야 합니까? 교회도 결국은 세상 사람들의 심판을 의식하고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가 세상의 심판을 좋은 점수로 받아야 교회가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까? 기업체들이 고객을 무서워하듯이, 교회가 교인들을 의식하고, 세상이라는 잠재 교인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세상에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는 것일까요? 앞서 언급한 많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 주류 교단들이 앞장 서서 동성애를 끌어안는 모습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우리 시대의 교회들, 혹은 우리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마 5:16), 베드로 사도도 그렇게 말씀했습니다(벧전 2:12).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궁극적으로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판단과 평가를 잘 받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세상은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기에 교회를 싫어했고 싫어하고 있으며 싫어할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너무나 많은 교회가 이 점에서 실패했고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하는 말들을 신경 쓰는 것이 우리의 주요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정작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것은 마지막에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견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작 우리 자신, 우리 교회를 어떻게 여기실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시라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가 놓친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 사회의 기준으로 보자면 넓은 마음을 가진 관용적인 교회였지만, 주님의 눈에는 배교하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4. 진리가 무너지면 기독교의 사랑은 다원주의적 관용으로 변질된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의 순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버가모 교회 안에는 심각한 배교가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황제 숭배와 같은 도전과 위협 앞에서는 단호하게 죽음을 선택할 만큼 믿음을 붙잡았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책망하시는 두어가지를 들어보십시오. 교회 안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사실상 이 둘은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은 이미 에베소 교회에 들어온 이단이었습니다. 이들의 핵심 교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셨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정욕을 따라서 살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은 변함이 없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들은 은혜와 자유를 방종과 성적 음행의 자유로 가르쳤습니다(갈 5:1; 롬 6:1; 유4). 주님은 이들의 가르침을 구약 시대의 발람의 교훈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발람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도록 모압 왕 발락의 사주를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시자, 나중에 그는 돈을 위하여 모압 왕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넘어뜨릴 계책을 주게 됩니다. 그것은 모압의 여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음행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제사의식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계략은 적중했고 이스라엘 중에는 엄청난 음행과 우상 제사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모압 여자들이 바알을 섬기는 제사를 행하는데 거기에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청했습니다. 바알 제사는 그 자체가 먹고 마시고 성행위까지 포함되어 있었기에 참석한 이스라엘 남자들은 함께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고 심지어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랜 광야 세월과 전쟁에 지친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모압의 친절은 매우 의외였을 것이고 그들은 긴장을 풀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발람의 꾀에 빠진 이유였습니다.

자, 이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셨습니까?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일로인하여 백성의 두령들이 책임을 지도록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목매어 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 음행과 우상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해결방법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여기에는 사랑도 용서도 관용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백성,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하신 하나님의 백성을 음행과 우상숭배로 무너지게 하는 일에 대해서 취하신 방법은 이 일에 참여한 자들을 심판하여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버가모 교회가 겪고 있는 일이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교회가 경험한 이 일과 똑 같은 일이라고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발람이 옛 이스라엘과 맺은 관계는 니골라 당이 새 이스라엘인 교회와 맺은 관계와 비슷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버가모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버가모 교회는 이런 일들을 용납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니골라 당은 그 당시에 사회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고 그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기준을 들이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사회적 통념의 잣대를 가지고 들어와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문란한 성적 윤리를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주전 1세기 로마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창녀와 연애하는 것을 절대 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엄히 부정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자의 말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 세대에 허용된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관습과 전통에서도 어긋난 사상을 갖고 있는 자입니다.” 도대체 그의 선조들이 어떻게 말했길래 그렇습니까? 주전 4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말입니다. “우리는 쾌락의 도구로 창녀를 인정하며 잠자리를 위하여 첩제도을 인정한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아이를 가지며 집안을 돌보기 위해 부인을 둔다.” 이런 것이 그 당시 사회의 분위기였고 소위 기준이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이 하등의 사회적 지탄을 받을만한 윤리적 탈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들어온 교인들 안에도 이런 일들이 버젓이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굴 살인한 일도 아닙니다. 그저 사회에서 행해지는 관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니골라 당은 단지 세상의 표준을 교회에 들이댔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까? 아마 버가모 교인들은 사랑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아니, 이들이 다 우리 형제들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만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라고 말했을지 모릅니다. 또는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당신 자신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친히 임하사 그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은 이것을 그냥 지나가시지 않습니다. 민수기 25장에서처럼 하나님은 교회의 음행과 우상숭배를 크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자”고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너무나 진리의 말씀으로 분별하고 이단을 허용하지 않았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첫 사랑을 잃은 것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버가모 교회는 그런 에베소 교회와 정반대의 경우라고 생각하기 쉽겠지요. 버가모 교회는 진리의 칼은 녹슬었지만, 사랑은 풍성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진리가 무너지면 기독교의 사랑은 다원주의적 관용으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적 관용이란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세상 기준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것처럼, 이런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일각에서는 당장 사랑이 없다고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진리의 기준을 떠났기에 사랑도 기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즉 버가모 교회가 말하는 사랑은 사실상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5. 진리가 무너지면 경건(윤리)도 무너진다.
진리가 무너지면 사랑만 변질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무너지면 경건도 무너집니다. 윤리도 무너집니다. 언제나 성경적으로 바른 방식은 진리가 먼저 오고 경건이 그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너지면, 경건과 윤리, 삶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 우리의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그 말씀의 칼날이 둔해지면 질수록 우리의 삶은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으로 무장시켜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살아있을 때입니다. 버가모 교인들의 삶이 음행과 우상숭배로 무너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지면, 즉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와 깊이와 진리성이 약화되고 무너지면, 따라오는 것은 목사들의 삶의 타락이고 교인들의 삶의 타락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양날 선 검과 같은 말씀이 우리의 죄성을 찔러 죽이지 못한다면, 우리의 죄성은 버젓이 고개를 들고 교회 안에서 행세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진리가 무너지면 경건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6. 우리 교회에 진리의 칼을 들어라.
오늘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이 말씀이 결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십시오. 오늘날 조국교회의 현실을 보십시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버린 모습이 아닙니까? 교회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돈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목회자들의 성적 탈선은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닙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교회와 사회를 구분 지을 수 있는 윤리적 기준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젊은이들만이 혼전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이제 이런 문제는 다루지조차 못하는 실정입니다. 동성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음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예배의 소중함의 기준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의 가르침과 기준은 세상의 가르침과 기준으로 대치되어 버렸고, 목사들 자신도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입니다. 저는 일반적인 조국의 교회나 미주의 이민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 자신이 목회하는 우리 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복음의 진리를 선포해야 하는 강단이 약화되고 무너진 결과일 뿐입니다. 강단에서 온전하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백성도 없습니다. 교회는 그저 천박하고 냄새 나는 인간들의 시장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아니라 참여자들이 합의하여 원하는대로 이끌려가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사랑은 더 이상 성경의 하나님이 무섭게 선언하시고 십자가에 그 아들을 못박아 죽이시는 그런 사랑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그냥 받아주자’ 식의 관용이거나 ‘왜 교회에서 관계 상할 일 있어?’ 또는 ‘좋은게 좋은 것 아니야?’하는 태도들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버가모 교회가 취했던 태도였습니다.

주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에게 주시는 권고입니까?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라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하라고 하시는 대상은 이런 자들을 사랑의 이름으로 받아줌으로써 진리를 타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힌 자들, 곧 교회 전체를 향해서 주시는 주님의 엄중한 권고인 것입니다. 지금 사랑하는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주님의 입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의 칼을 들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임하실 때 그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워, 그들을 치실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칼을 들어 싸우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초기에 금송아지를 섬겼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편에 설 자들은 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이 앞으로 나왔고 모세는 금송아지를 섬긴 자들을 칼로 죽이라고 명했고 레위인들은 그날에 삼천명의 형제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40여년이 지나 광야 생활의 막바지에 왔을 때, 바로 발람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 우상숭배와 음행에 참여한 자들을 죽이라고 하셨을 때 두려움 없이 백주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미디안 여자와 음행을 하던 자를 창으로 찔러 죽인 비느하스의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하나님은 놀랍게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버가모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내 편에서 서서 진리의 칼을 들어 싸울 자는 나오라”고 도전합니다. 누가 나갈 것입니다. 누가 비느하스의 자리에, 레위인들의 자리에 설 것입니까? 이것은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무서운 명령을 버가모 교회에 주십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경계와 기준이 희미한 시대에 사단의 보좌가 있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 교회를 향해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주시는 주님의 도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실 것입니까?

여기서도 이기는 자에게 영광의 약속을 주십니다.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법궤 안에 감추어져있던 만나를 가리키지만,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먹이시겠다는 천국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상의 제물이라는 세상 쾌락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주님 자신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흰돌은 여러 해석이 있는데,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던 흰돌을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흰돌에 쓰여진 새 이름은 그것을 받는 자 밖에는 알 자가 없다고 했는데, 3:12에 의하면 그것은 승리하신 주님의 이름일 것입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께서 오늘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셨던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선포되고, 그 말씀의 권위로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회의 기준과 통념들이 사회에서 용인된다는 이유로 교회 안에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의 칭찬과 인정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세상의 인정이 아니라, 바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평가와 인정입니다. 마지막 날, 저와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감추었던 만나를 받아누리고, 주님의 귀하신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흰돌을 받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