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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 (20). 제롬

김형익 / 교리강의 / 2025-04-27

말씀내용
20강 제롬 (Jerome)

“솔직하게 고백하거니와 나는 격정과 분노에 쉽사리 마음을 빼앗긴다. 나는 그 따위 신성 모독적 인사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줄 수 없다.” (제롬)

4세기의 흥미로운 인물, 제롬(347-420)
1. 수도사 안토니(251-356)처럼 성스러운 인격도 아니고, 아타나시우스(296-373)처럼 명철한 신학적 통찰력도 아니며, 암브로즈(340-397)와 같은 용기와 신념도 아니고, 크리소스톰(349-407)과 같이 설교에 뛰어난 인물도 아닌 제롬은 세상과 자신에 대하여 끊임없이 벌였던 내면적 투쟁으로 인해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2. 성품: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럽다기 보다 거만하고 격정적이고 자조적인 성품
A. 항상 인간 이상의 차원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인물로서, 게을러 보이거나, 감히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관용을 보이지 못했다.
B. 제롬의 비판의 대상이 된 자들 중에는 이단 뿐 아니라 무지하고 위선적 인물들, 심지어 존 크리소스톰, 밀란의 암브로즈, 가이사랴의 바실, 히포의 어거스틴이 있었다!
C.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다리가 둘 달린 멍청한 당나귀들’이라고 비난했다.
3. 출생과 성장
A. 347년 북부 이탈리아의 한 촌락에서 출생. 4세기의 다른 영적 거인들에 비해 나이가 어린 편이었지만, 당대 사람들의 표현대로, 제롬은 날 때부터 노인이었으므로 스스로를 동시대 인물들보다 어른으로 여겼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를 권위있고 노련한 존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B. 지적 욕구: 그는 고전 학문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는데, 꿈속에서 하나님께서 “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키케로주의자이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성경과 기독교 문학의 연구에 전념하지만, 고전들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C. 성적 충동을 다스리기 위해 수도생활로 은둔하였고 육체를 학대하고 극단적으로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다 씻겨주셨다고 생각하여 목욕을 하지 않았다. 여전한 죄와 유혹을 이기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괴상스럽고 야만스러워 보이는 언어로 보였지만, 구약성경이 쓰여진 언어를 배우는 일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은자의 수도생활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3년 만에 문명 속으로 돌아왔다.
4. 공적 활동
A. 안디옥으로 돌아와 장로로 선출되었고 381년 종교회의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다. 로마로 돌아간 뒤,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Damasus, 366-384 재위)는 제롬의 잠재력을 보고 개인비서로 임명하여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도록 격려했다.
i. 다마수스의 격려로, 새로운 라틴어 성경 번역을 시작하게 됨(제롬의 말년에 본격적으로 이 작업에 전념하여 마치게 됨)
ii. 처음에는(382년) 코이네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했고, 70인역에서 구약성경 번역을 시작하였다.
B. 여성들의 지원
i. 과부 알비나(Albina)의 저택에 거하던 부유하고 경건한 여인들의 도움이 지대하였다. 남편과 사별한 알비나의 딸 마르셀라, 암브로즈의 자매 마르셀리나, 마르셀리나의 딸 유스토키움과, 제롬의 여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이지적인 여성 파울라(Paula)
ii. 이 여성들 중 일부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제롬은 이 여성들 속에서 가장 편하고 자유스러움을 느꼈고 내심의 신학 문제들을 토론할 수 있었다.
5. 다시 수도생활로
A. 가장 열렬한 후원자였던 다마수스의 죽음(384) 이후, 새 감독 시리키우스(Siricius, 384-399 재위)는 제롬의 학자적 능력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적들의 비난으로 로마를 떠나 이스라엘로 갔다. 제롬은 이 여정을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from Babylon to Jerusalem)”라고 불렀다. 이때 유스토키움과 파울라가 동행했고, 이후 제롬은 이집트의 사막 수도사들과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을 방문한 후, 386년 다시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수도생활에 전념하기로 하였고 파울라가 동행하였다.
B. 이들의 수도생활의 목표는 사막 수도사들처럼 극단적인 금욕생활이 아닌 학문에 열중하는 규칙적 생활을 지향하였다.
C. 상당한 재력가였던 파울라와 제롬의 어느 정도의 재산을 사용하여 베들레헴에 두 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하나는 파울라의 지도 아래 여성 수도원으로, 또 하나는 제롬의 감독 아래 남성 수도원으로 운영하였다.
D. 제롬은 근처의 아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여성 수도사들에게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한편, 성경 번역을 위한 히브리어 연구에 열중하였다.
E. 그리고 제롬이 전념한 것은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될 작품, 성경의 라틴어 번역 작업이었다.

제롬의 라틴어 성경(Vulgata)
1. 기존의 라틴어 성경과 제롬의 라틴어 성경
A. 여러 라틴어 번역 성경들이 있었지만, 구약성경의 경우 모두 70인역(Septuagint)에 기초한 번역들이었다.
B. 방대한 양의 서신 왕래와 로마 제국을 흔든 재난 등으로 작업을 중단할 때가 많았지만, 노년의 제롬은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유대인 랍비들과 직접 토론을 벌이면서 혼신의 힘을 바쳐 히브리어에서 직접 라틴어로 번역한 라틴어 성경 번역을 완수하였다.
C. 제롬의 라틴어 성경 Vulgata(영어로 Vulgate)는 이후 교회가 사용하는 표준 성경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많은 저항과 거부를 받았다. 이중에는 히포의 어거스틴도 있었다.
2. 어거스틴(354-430)과 제롬
A. 어거스틴의 편지: “저는 당신께서 성경들의 라틴어 번역을 삼가해 주시기를 감히 기원합니다. 꼭 번역을 해야겠다면 이전에 욥기를 번역한 방식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즉 70인역과 다른 부분이 있을 때에는 이를 금방 알아 볼 수 있도록 주를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70인역의 권위에는 아무도 필적할 수가 없습니다…그뿐 아니라 이미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유식한 번역가들이 이러한 작업에 헌신한 이후, 과연 이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했던 결점들을 또 다른 어느 인물이 발견할 수 있을지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B. 제롬은 어거스틴에게 한동안 응답하지 않다가 잠시 응답을 하지만, 어거스틴이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젊은이의 치기어린 행동 정도로 여겼고, 더 이상의 논쟁을 하지 않는 것이 어거스틴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생각하고 중단하였다.
C. 펠라기우스(360?-418?) 논쟁과 관련하여
i. 제롬은 펠라기우스파의 교리를 반박할 필요를 느끼다가, 그와 논쟁을 한 어거스틴의 작품들을 독파하게 되었다.
ii. 그리고 제롬은 북아프리카의 이 지혜로운 감독에게 그로서는 매우 드문 표현인 존경과 경의가 꾸밈없이 나타나는 편지를 보냈다.

[교훈과 적용]
1. 인간 제롬, 성도 제롬?
A. 그는 명성과 주장만을 고집하는 무감각한 인물이었는가?
B. 제롬은 메마른 피부 속에 섬세한 정신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404년 파울라의 죽음 이후, 제롬은 깊은 고독과 우울에 빠져들었다.
C. 제롬은 자신의 죽음이 다가옴을 알았고, 한 시대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감지했기에 슬픔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다.
D. 410년 8월 24일 로마는 알라릭(Alaric)의 지휘를 받는 고트족에 의해 함락되고 약탈을 당했다. 베들레헴에서 이 소식을 들은 제롬은 유스토키움에게 이렇게 썼다: “세계를 정복하였던 로마가 함락되리라고 누가 과연 짐작조차 했겠는가? 많은 국가들의 어머니가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고 차마 누가 예측했겠는가? 나의 눈은 노령으로 흐려졌다…그리고 밤의 등불만으로는 더 이상 히브리어 서적들을 읽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낮 동안에도 작은 히브리어 문자들을 읽기가 힘들다.
E. 제롬은 이후 10년을 더 살았는데, 이 기간은 고독, 고통과 논쟁으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딸처럼 생각하던 유스토키움이 숨을 거둔 지 며칠 후, 제롬은 인생에 지친 학자의 몸으로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2.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