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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깨어진 가정의 은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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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깨어진 가정의 은혜 이야기

창세기 37:1-11, 창세기 12:7-8, 창세기 26:2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5-05

말씀내용
1. 총체적으로 깨어진 가정
성경에는 많은 인물이 나오고 가정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을 묘사할 때 성경은 미화하는 방식 대신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외면이 아니라 내면에 대한 묘사로 그렇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 가정의 이야기인데, 깨어진 가정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야곱 가정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친숙하다는 전제에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A. 아버지 야곱의 비뚤어진 사랑
야곱은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아내가 있었고, 두 아내의 사랑 경쟁으로 인하여 두 아내의 시종이었던 두 여종을 첩으로 얻게 됩니다. 네 여인에게서 얻은 자녀가 아들 열 둘, 딸 하나, 모두 열 셋입니다. 어머니가 다른 자식들의 관계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네 여인 중 야곱이 사랑한 여인은 라헬이었습니다. 라헬은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고 베냐민을 해산할 때 죽게 됩니다.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을 향한 아버지 야곱의 애정과 집착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베냐민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을 가져온 출생이었기에 아버지 야곱은 양가적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 그는 차별적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네 여인 중 라헬을 두드러지게 사랑했고, 열 두 아들 중 요셉을 두드러지게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의 비뚤어진 사랑이 그 가정에 남기게 되는 상처는 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들이여! 당신들의 존재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인격과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인생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B. 편애 받는 아들, 건방진 요셉
아버지의 비뚤어진 차별적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들들을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사랑을 집중적으로 받았던 요셉은 어떻습니까? 적어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보여주는 요셉은 그의 의식과 무의식은 건방짐이 다스리고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형들, 특별히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버릇을 가졌다고 말합니다(2). 특별히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이라고 기록한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어린 요셉은 어떤 형이 첩의 자식인지 알았고 첩의 자식들을 구별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들 보다 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요셉을 미워했기에 그 동생에게 샬롬이라고 좋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할 술 더 떠서 자기가 꾼 두 번의 꿈을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첫째는, 밭에서 열 두 형제가 곡식 단을 묶고 있는데 형제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라는 꿈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형들의 반응이 좋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또 꿈 이야기를 합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꿈입니다. 해와 달은 부모님을 가리킬 것이 분명하니, 형들이 분개합니다. 아버지의 막강한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은 미련할 만큼 건방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요셉의 꿈과 관련하여 설명이 필요합니다. 요셉의 꿈은 성경이 기록되기 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형태를 띈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의 형태로 주신 것이므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꿈은 요셉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였음은 맞지만, 요셉의 미숙한 건방짐은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는 대신, 자랑질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건방짐이 맞습니다.


C. 르우벤의 도전(창 35:22), 디나 사건(창 34) 그리고 유다의 비행(非行)(창 38)
이런 가정에서 형제 우애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식들은 소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가야합니다. 장남 르우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내 라헬이 죽자 라헬의 몸종으로서 아버지의 첩이 되었던 빌하와 동침을 하게 됩니다(창 35:22). 이 행동은 물이 끓음 같은 르우벤의 형편 없는 성품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단지 그의 정욕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행동은 아버지의 지도권을 찬탈하는 시도이기도 했지만, 브루스 월키는 “르우벤은 빌하를 더럽힘으로써 라헬이 죽은 이후 그녀의 몸종 빌하가 레아를 밀어내고 본처의 지위를 대신할 수 없도록 확실한 대비책을 실행한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야곱의 유일한 딸로 기록된 디나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창 34). 야곱이 가족을 이끌고 외삼촌 라반의 고향인 밧단 아람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 딸 디나는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가 그 지역 히위 족속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로써 야곱의 가정이 가나안 족속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서 실패했고, 딸 디나도 부적절한 우호적 관계를 가졌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때 둘째와 셋째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세겜과 그 아버지 하몰을 속여서 결국 그 성읍의 모든 남자를 살육하는 잔혹한 복수극을 행하게 됩니다.
디나 사건이 야곱의 가정이 가나안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이후에 벌어진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창 38). 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가나안 여자와 결혼을 하여 세 아들을 낳습니다. 장남을 위해 유다는 가나안 여자 다말을 얻어줍니다. 하지만 장남 엘은 얼마나 악했던지 하나님께서 죽이십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는 형이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으면 동생이 형을 대신하여 자식을 남겨야 하는 형사취수제가 있었는데, 이 제도에 따라 유다는 둘째 아들을 다말에게 허락하는데, 둘째 아들 오난도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하므로 데려가십니다. 막내만 남았는데, 막내도 죽을까 두려워진 유다는 막내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고는 며느리 다말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지요. 시간이 꽤나 지난 후에 유다의 아내가 죽고, 유다는 자기의 가나안 친구 히라와 딤나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시아버지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여긴 며느리 다말은 몸을 파는 여인으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되고, 베레스와 세라,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도덕적 타락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낳은 아들 베레스는 유다와 함께 예수님의 족보의 조상이 됩니다.


D. 깨어진 형제 우애(창 37:12-36), 가정 안에 드리워진 거짓과 음모 (출 21:16)
이게 다가 아닙니다. 어느 날, 요셉의 형들이 멀리 세겜에 가서 양떼를 칠 때, 아버지는 요셉을 형들의 안부를 물으려고 보냅니다. 요셉이 오는 것을 보자, 형제들은 그를 죽이자는 이야기를 자연스레 나눕니다. 그러다가 마침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을 본 형제들은 돈을 받고 요셉을 노예로 팔아 넘기게 됩니다. 형제들에 의한 인신매매이지요. 이때 요셉의 나이 열 일곱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런 자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합니다(출 21:16). 이쯤 되면 이건 형제들이 아니라 강도 집단입니다. 그들은 숫염소를 죽여 요셉이 입고 있던 채색옷을 피에 적십니다. 아버지 야곱은 피에 물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옷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애통해 합니다. 이제 오랜 세월 동안(최소 22년 동안), 이 거짓이 이 가정에 그림자 처럼 드리워지게 됩니다. 형제들은 자기들끼리도 이 거짓과 음모로 인한 괴로움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막장 드라마 안의 믿는 가정?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슨 조폭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족장 야곱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가족 이야기이고, 이삭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족장들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가족이 왜 이 모양입니까? 이런 가정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슬픈 현실은 소설가 류현재의 소설 제목처럼,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장 질긴 족쇄, 가족’을 경험합니다. 가족이라는 게 본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채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성인이 되어 배우자를 만나 결혼할 때에는 물론 자신이 선택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가정이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면 좀 달라도 뭔가 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야곱의 이야기처럼 거칠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목사 가정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장로 가정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가정이 왜 이 모양입니까? 이것은 아픈 고민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부모의 신앙이 거짓이기 때문이라고 쉽게 판단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라도,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집에서 신앙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아버지가 그 모양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교회에만 헌신했기 때문에 등등 이런 저런 이유들을 찾아내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신자의 가정이 이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품성의 훌륭함으로 구원받지 않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모범적인 가정이어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래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뭔가 달라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달라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 변화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서 한 순간에 변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회심은 죄인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내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 성품의 변화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고, 이것이 가정일 때에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점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말입니다. 교회를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가족(권속)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고, 문제가 일어날 때 그것을 다 멋있게 해결하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똑같이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기독교 가정의 경우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야곱의 가정 이야기를 마저 다 하겠습니다.


3. 반전—해피 엔딩
미디안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의 노예 시장에서 애굽 왕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보디발의 집안의 노예가 된 요셉은 놀랍게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입어 주인의 인정을 받고 가정 총무가 되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는 바람에 강간 미수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왕의 두 신하를 만나 꿈 해석을 하게 되고,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7년의 풍년 뒤에 이어질 7년의 흉년을 예언한 요셉은 하루 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30세였습니다. 그리고 7년 간의 풍년에 엄청난 양의 곡물을 거둠으로써 이어질 흉년을 대비하고 놀라운 국가 경영을 하게 됩니다. 가뭄은 애굽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근동 지방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쳤고 야곱도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22년 전에 자기를 팔아 넘긴 무자비한 형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용서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자연스레 지난 22년 간 형들의 마음에 드리웠던 죄악의 그림자는 거두어지고, 형제들은 기가 막힌 화해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은 죽은 줄 알았던 사랑하는 요셉을 2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애굽에서 평안히 지내다가 자식들 앞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지요. 야곱 집안의 막장 드라마는 반전을 거쳐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가 됩니다.


4. 믿는다는 것은 제단을 쌓는 것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를 어떻게 다르게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믿는 가정이 이 모양이라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서 이런 고민을 하지는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가정이 많은 문제들 속에서도 복음 안에서 복음 때문에 평안함을 누리는 가정이라면,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뜻밖에 정말 뜻밖에 생각지도 못할 일들이 일어나는 게 가정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대한 책, 두 권의 제목을 소개 드리자면, 러셀 무어의 『폭풍 속의 가정』(The Storm-Tossed Family)과 『당신의 가정에 폭풍이 몰려올 때』(Together Through the Storms)입니다. 둘 다 ‘폭풍’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믿음이 부족해서 이거나 죄가 깊어 졌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함부로 연결할 없는 문제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의 가정의 민 낯을 숨김 없이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때로는 다윗이나 베드로의 부끄러운 죄악과 실수를 그대로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삶의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다 해결돼!”라는 말을 듣습니다. 위험할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보이는 비신앙적 언사입니다. 믿음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이렇게 오해하면, 우리는 신앙의 이력 만큼이나 종교적 위선자들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부끄러워서 말 못할 가정의 비밀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 보다 더 망가지고 깨어진 이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제가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믿는 가정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믿는 가정은 무엇이 다릅니까? 문제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도덕적 차별성이고, 형제 우애이며, 화목함 입니까? 아닙니다!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를 죽 읽어가다 보면, 우리가 한 가지 족장들의 가족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가족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는 기록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7).” 아브라함은 새롭게 정착하는 곳마다 거기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 같습니다.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서(창 12:8), 그리고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창 13:18) 제단을 쌓았다는 반복적 기록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것을 유일하게 특별한 경험으로 가진 인물입니다. 청소년이었을 때, 아버지는 삼 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이르러 자신을 제물로 바칠 뻔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창 22). 그날도 이삭은 아버지가 언제나처럼 어린 양을 드릴 줄 알았기에 “아버지, 번제할 어린 양은요?”라고 물었었지요(창 22:7).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단지 어린 양 하나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은 물론, 자기 생명 보다 귀한 독자의 생명까지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삭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삭이 브엘세바에서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 26:24).” 그때 이삭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세기 26:25).”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배운 대로 하는 겁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야곱은 15살 때까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밧단아람으로 가기까지, 아버지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밧단아람으로 가던 중 광야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나자,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하면서 그 자리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창 28:10-22). 후일에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고(창 33:20) 거기서 그의 가정에 폭풍이 몰아쳤을 때에도 그는 벧엘 바로 그 자리에 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습니다(창 35:1-7).
이것이 요셉에게는 어떻게 경험되었을까요? 우리는 요셉이 17세에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 가기 전까지 건방진 소년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곱 집안의 귀공자가 애굽에서 노예 생활에 감옥 생활을 지나면서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9년이 지났을 때, 인생의 원수들인 형제들을 갑과 을의 관계 속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용서하지요. 깨어지고 부서진 집안이 하나로 모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갑자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적어도 성경은 한 가지 답을 제시합니다. 족장들은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훌륭하지 않았고, 심지어 강도처럼 못 된 자들이었고, 거짓과 속임이 집안에 가득했으며, 성숙함은 커녕 미숙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요셉의 모든 형제들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음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형식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방식으로 그들의 믿음을 표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믿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신앙은 그렇게 보이지 않게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삭에게서 야곱에게로, 야곱에게서 요셉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열 두 조상들에게로 흘러내려갔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창 22:12)—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정 안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가정들을 아름다움만이 가득한 기독교 가정으로 당장 변화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게 뭔가?” 싶은 일들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가정들도 지지고 볶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주일 공예배를 최고로 중요히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부모님들이 대단한 분들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적어도, 주일 공예배가 제 삶의 중심임을 삶으로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분주함 속에서도 가정예배를 지키려고 애쓰셨는데 여기서는 제 할머니의 열심이 특별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그렇게 배웠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을 때, 배운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동떨어진 개인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그 문화가 빚어낸 존재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확신은 우리 문화와 가족의 배경을 이루는 신념입니다. 이런 집단적 유대감에서 벗어나는 일은 좀체 드뭅니다. 우리는 조상, 부모들 처럼 행동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므로 우린 예배를 열심히 드려야 한다는 율법주의적 사고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지성으로 공을 들여 탑을 쌓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식들을 축복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은, 우리가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필사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시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주이시며, 우리의 도움이시요 우리의 보호자이심을 인정하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폭풍이 몰려올 때만이 아니라, 모든 일상에서, 그리고 우리의 앞에 펼쳐질 모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린 주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고 날마다 고백하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은, 그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했다는 의미이고, 이것을 하나님은 네가 나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창 22:12). 아브라함의 그 엄청난 순종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공들인 예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숫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세월과 함께, 그리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점점 더 복음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폭풍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는 은혜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렸다”가 아니라, 모든 식구들이 복음의 언어로 소통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선하시지 않아?” “그렇지! 우리 가정이 그걸 너무나 깊고도 풍성하게 경험했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날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노년이 가까워올수록, “우리 주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야? 그 주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시니 참 감사하다.”라고 고백하며 은혜의 공기가 가득한 나날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 가정을 격려하고 싶습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그 다양한 형태의 가정,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여러분의 지금 상황의 좋고 나쁨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서도 보이지 않게 역사하고 있음에, 지금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믿음은 흘러가고 있음을 믿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희망을 두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거룩한 진노의 가장 잔인한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가정들의 깨어짐과 부서짐과 아픔의 현장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는 그것을 예배로 표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