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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8) - 순종, 고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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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8) - 순종, 고난, 믿음

출애굽기 13:17 ~ 14:3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5-14

말씀내용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바로의 군대가 뒤에서 추격하는 것처럼 진퇴양난의 상황을 당할 때가 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런 상황을 만난 것을 본문은 보여준다. 여기서 믿음이란 어떻게 일하는 것인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는 반응은 어떻게 다를 수 있는 것일까?

1. 바닷가로 행진하다(1~4).
이스라엘 백성이 막다른 골목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홍해 앞의 도망칠 수 없는 곳으로 진행해왔다는 사실이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이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사람이다. 그는 어디로 가야 가나안에 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홍해 앞의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었다. 애굽 변방과 광야의 지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읽는다(출 13:17).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변방 수비대가 있는 곳을 피해서 가게 하셨다. 전쟁을 보면 다들 무서워서 애굽으로 도망가겠다고 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배려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무엇을 견딜 수 있고 무엇을 견딜 수 없는지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견딜 수 있을만한 시험을 주실 수 있으시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시험에는 피할 길을 주신다(고전 10:13).

이것 뿐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자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갈 길을 비추셨고 인도해주셨다(13:21~22).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떠나지 않았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보고 따라온 것이 바로 이 위험한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인도를 받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은 생각할 줄 알고 판단할 줄 알고 예측할 줄도 안다. 이스라엘 백성이야 고된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이 근처에 나와볼 기회가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러나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사람이 아닌가! 그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백성을 인도하실 때, 그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불리한지 유리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에게 설명을 미리 해주셨다(1~4).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갇혔다고 확신할만큼 막다른 곳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가시는 것은 바로와 애굽의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심이라고 하셨다. 모세는 물론 순종했다. 그러나 이 순종이 결코 쉬운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자. 그는 지금 혼자가 아니다. 200만명이나 되는 대중을 이끌고 가는 중이다. 이 광야에서는 그의 잘못된 판단 하나에 의해서 이들이 몰살할 수도,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순종했다. 때로는 정답이야 알지만, 도무지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적인 뜻을 가지고 순종하는가? 모세가 그렇게 한 것이다. 바로가 추격한 것은 물론이다. 하나님의 말씀 대로다. 그는 애굽의 정예 부대를 모두 이끌고 와서 이스라엘을 홍해 사이에 두고 포위하였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2.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10~12)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는가?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목사는 늘 믿음으로 살라고 한다.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하라고 한다. 손해보면 물어주겠다고 하는 목사도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큰 소리 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면 절대로 절대로 이 세상에서 손해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만이 궁극적으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어려움이 닥칠 때가 있다. 분명히 있다. 그때, 목사에게 불평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본즉’ 두려웠다(10).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10). 그래도 이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하나님의 능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모세에게 칼로 찌르는 듯한 불평을 쏟아냈다(11~12). “왜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서 죽게 하느냐”는 요지다. 자기들은 나오기 싫었는데, 모세가 우겨서 나왔다는 식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불평과 비난의 패턴이다. 내가 책임지고 싶은 것은 없고 다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모는 것이다.

이런 불평들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가지 이유는 신앙 생활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심각한 오해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믿음의 길이 쉽고 부드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라. 과연 그런가?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신 것은 무엇인가? 바울 사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과 모세의 삶을 보라. 성경이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이고, 영원 속에서 누리게 될 축복들이다. 그런데 많은 거짓 교사와 선지자들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 진리를 뒤바꾸어 버림으로써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아닌 허황된 기대를 가지고 나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 뿐인가? 그들의 삶 속에는 언제나 이 불평과 원망이 끊이지를 않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믿음으로 걷는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살고자 하면 종종 고난이 찾아온다고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원망과 불평은 사실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그들이 보여주게 될 수 없는 원망과 불평의 전주곡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태도는 원망과 불평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을 모세는 보여준다.

3. 하나님의 구원(13~30)
모세가 한 말을 들어보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다. 그리고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다. 모세가 백성에게 요구한 것은 믿음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눈을 들어 본 것은 애굽 사람이었지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믿음은 언제나 눈으로 보는 것 위에, 그 주위에, 그 안팎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싸울 것을 명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실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본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구원을 가만히 본 것뿐이다. 그 일이 바로 내게 일어났어야만 하는 일이며, 나를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모세는 두 번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다. 뭔가를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 것,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구원을 방해하는 가장 악한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가장 잘못 행한 것이 있다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은” 것이다(롬 10:3).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 하나다. 하나님, 그들을 위해서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이다. 그분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신 사이로 걸어서 건너갔다. 이것을 아더 핑크는 히브리서 11:29에 의거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믿음으로 건넜다는 표현은 그들이 홍해를 향하여 발을 한 걸음 씩 내디딜 때마다 바다가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앞에서 갈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바다가 다 갈라진 다음에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건넜다기 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죽었다.” 신자들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불신자가 보고 똑같이 행하려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모세가 이 모든 과정에서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선언하는 것은 한편 하나님께서 그에게 미리 모든 것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광야의 모든 상황, 그리고 바로의 기질을 손바닥 처럼 보고 아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렇게 인도하실 때 그 길을 따라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순종일 뿐 아니라, 이런 피가 마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그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4. 결과(31): 드러난 하나님의 의도
결국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가? 이 결과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의도는 명확하다. 31절을 보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인생 중에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믿게 하시려는 이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고난이라는 것은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줄 뿐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면 그 고난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너무나 분명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려는 것임을 잊지 말라. 고난이 찾아올 때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물어야 할 때이다. 고난이 찾아올 때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하는 가장 합당한 반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러나 이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 일을 통해서 가지고 계시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언제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마지막 날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 하나님께서는 17~18절에서 다시 한 번 모세에게 이것을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은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던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또한 영광을 받으신다. 그것이 본문 31절에서 본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을 때 최고로 영광을 받으신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날을 맞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5. 교훈과 적용
우리가 신앙 생활을 잘 해보려고 할 때 닥치는 어려움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자. 믿음으로 순종해서 생기는 어려움이라면 그것은 조금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살면 잘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예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겠다고 하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사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믿음으로 살지 않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가만히 놔두시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쨌든지 믿음으로 살도록 정해진 존재들이다. 믿음으로 살아 봐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 같은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왜 우리 삶에 감격이 없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동이 없는가? 그 하나의 분명한 대답은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런 위급한 일이 닥칠 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엎드리는 것이다. 육신의 눈을 질끈 감고, 믿음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가장 모욕을 드리는 행위는 무엇이겠는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의 상황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여 주신 모든 것을 경멸하지 말라. 오히려 이 동일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모세의 말대로, 가만히 있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어려운 명령이다. 두 번씩이나 모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 상황에서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망하는 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기억하라(약 5:13).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기에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전 10:13). 감당치 못할 때는 피할 길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심을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