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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9) - 마라의 쓴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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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19) - 마라의 쓴 물

출애굽기 15:22-27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5-21

말씀내용
1. 삼일 은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노예생활에 젖어서 그런대로 익숙하게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와 아론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뜻을 말해준 이래로, 그들이 경험한 열 가지 재앙과 그리고 엊그제 경험한 홍해 도하 사건은 그들의 일생에 지워지지 않을 놀라운 경험이었다.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께서 홍해 속에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킨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함께 놀라운 찬송을 하나님께 불러드렸다. 이것이 15장의 앞 부분의 이야기다(1~21).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광야에 들어섰다. 수르 광야로 들거가 사흘을 걸었다. 광야에서 그들의 생존에 결정적인 것은 마실 것과 먹을 것의 문제였다. 그들은 애굽을 나올 때,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가죽 부대에 그들이 마실 물을 넉넉히 가지고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흘이 지나자 그 물이 다 떨어졌고 수많은 백성 그리고 가축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어떻든 이 사흘 동안 그들은 물을 찾지 못했다(22). 그러다가 마라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하나의 오아시스였다. 여기서 물을 마시려고 한 백성들은 그 물이 마실 수 없는 쓴 물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기대가 무너지면서 한없는 실망감에 젖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들의 은혜에 대한 감격은 3일 동안 생존하였다.

2. 두 개의 이야기: 칭의와 성화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구원의 교리이다. 이 짦은 본문에는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의 구원의 모든 요소가 다 담겨져 있다.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성화의 교리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앙 생활을 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걸어가는 자리이며, 교회가 서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면서 구원의 은혜을 받고 그 마지막인 영광에 이르는 여정을 걸어가는 존재이다. 교회가 걸어가는 광야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주는 광야 교회의 체험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들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광야 교회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해두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칭의와 성화 사이에서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선이 있다. 그것은 몸 밖에서 일어난 일과 몸 안에서 일어난 일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칭의는 우리의 몸 밖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과 인식의 영역 밖에서 일어난 일이다. 애굽에서 일어난 열 가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조금도 그 해가 미치지 못했다. 홍해가 갈라진 이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무런 해도 미치지 못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의 삶 주변에서 일어나는 매일의 이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모든 일에서 자기들의 피부로 경험할 만큼 고통이나 고난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진 적이 없었다. 칭의는 이런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죄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대가가 치루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신자들 자신의 고통이나 고난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우리가 그 구원의 은혜를 드디어 몸으로 깨닫고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성화의 과정 속에서 들어가서 하나님을 배우게 될 때이다. 성화는 칭의와 구별하여 말하자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말은 우리가 머리로 알던 것을 가슴으로 알게 되는 것이고, 말로만 들은 것을 실제의 삶 속에서 대가를 지불하면서 배운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물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외없이 이 성화의 과정 속으로 초대받는다. 그러기에 이 성화의 과정으로 들어가는 것은 광야의 여정을 시작한다는 의미고, 이 광야의 여정을 특징 지워 주는 것들은 실망, 어려움, 낙심 그리고 의심과 같은 것들이다.

3. 마라의 쓴 물
물을 찾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무엇에 비기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일순간, 물은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쓰다’는 뜻으로 그곳을 마라라고 이름 붙였다. 문제는 일순간 그들의 기대와 기쁨이 무너져내릴 때이다. 문제는 그럴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문제이고, 이것이 본문이 집중적으로 다루는 문제이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 기대와 내 방법에 맞지 않을 때이다. 물론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 상황이 절대절명의 상황이라는 사실을 좀 더 이해해야 한다. 물이 없으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가축들도 다 죽어가게 된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일관되게 가르치는 교훈이 무엇인가? 그것은 “쓴 물도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성경이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여정이 장미빛 주단 위를 걷는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여정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종종 쓴 물을 지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쓴 물을 만나게 될 때,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인식이다. 쓴 물도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의 일부다.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자기들의 여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초자연적인 여정이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배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쓴 물로 인도하셨다면 그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백성들이 배워야 할 태도였지만,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태도가 문제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했다.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합니까?”

4. 우리가 누구인가?
미성숙의 특징이 무엇인가? 어린 아이들이 잘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밥상에 앉아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다, 없다’하면서 불평하는 것은 어린 아이들의 몫이다. ‘좋다, 싫다’하는 것은 그들이 삶에서 가장 많이 말하는 것들이다. 어른이 되면서 점점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시작하고 자기의 감정과 기호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도 보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은 그들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이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어쩌면 성경은 애굽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노예생활에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사실상 멸망 받은 애굽 사람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이다. 우리의 구원은 선행과 인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주는 태도를 보면 그것은 미성숙의 극치다. 아무리 물이 없어서 죽게 된 절대절명의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지금까지 경험한 바 하나님의 구원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 사건을 떠올리면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여기서 바울 사도가 원망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하는 경고는 매를 맞는다가 아니라 멸망하였다 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단지 이것이 미성숙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바울 사도는 지적한다. 이것은 미성숙, 영적 유아기를 넘어서 불신앙의 문제인 것이다. 불신앙으로 원망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홍해를 건넜지만, 다 광야에서 죽었고 단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 가운데 들어간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망하지 말라고 바울 사도는 권고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는 기도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도 능히 할 수 있었던 반응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기도하기 보다는 사람을 향해서 불평하고 원망했다. 이것이 더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보여주셨고 그 나무를 물에 넣으니 그 물이 달게 변화되었다. 이 나무는 시내 광야에서 자라는 특별한 화학적 효능을 가진 나무는 아니었다. 하나님의 이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표적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싶은 교훈이 있고, 하나님께서 가리키는 실재가 있는 하나의 사인이었다. 모세가 나무를 던져 넣었을 때, 마라의 쓴 물이 달게 변했다. 이 나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 쓴 물을 달게 만드는 효능을 가진 나무는 무엇인가? 첫째로 이 나무의 기능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나무다(창 2:9). 그 나무는 나중에 새 예루살렘의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계 22:2). 그 나무는 일년에 열 두 달 각 달마다 열매를 맺히고, 그 잎사귀는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초가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성경이 나무를 가리킬 때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나무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다. 십자가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바꾸어주시는 능력이다. 내가 견뎌야 하는 고난 조차도 내 인생의 축복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아무 나무 조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나무를 넣으라고 하신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무, 바로 십자가가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고통과 고난을 감당하게 해줄 뿐 아니라 달게 변화시켜주는 최고의 치료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가지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는 먼저 단 물을 주시지 않고 쓴 물을 먼저 주셨는가? 존 칼빈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께서는 단 물을 먼저 주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쓴 물로써 그들 속에 잠복해있는 쓴 뿌리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칼빈의 해석은 얼마나 놀라운 통찰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쓴 물로 인도하실 때 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지 불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며 배려인 것이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점수를 잘 주기가 쉽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기도 쉽다. 그러나 이런 쓴 물을 만나게 될 때 우리 자신이 드러내는 태도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실력을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종종 이렇게 우리를 마라의 쓴 물로 데리고 가심으로써 시험하시는 것이다(25). 이 때 영적 성숙의 표지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임을 신뢰하는 능력이다. 당신은 마라의 쓴 물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가, 아니면 쓴 물도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의 일부임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5. 성화와 하나님의 말씀
본문에서 우리는 특이한 하나님의 개입을 본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물을 달게 만들어주신 후에 하시는 말씀을 보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25).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받기 전이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어떤 기본적인 형태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말에 순종해라”는 요구를 하시지 않으셨다. “순종해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구원해주마”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모든 일을 이루셨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었다. 상징적으로 홍해를 건넘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 자, 이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의 삶 속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순종을 강조하신 것은 구원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 성화를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해지기 때문이다(요 17:17).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는 따르는 상급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에게 내리신 질병?이것은 재앙과 관련해서 주시는 말씀이다?을 하나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여호와 라파?이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경험했다면, 여러분은 이제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몸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누리며 이루어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광의 자리, 가나안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먼저 이 광야로 인도하여 내신 것이다.

6. 엘림: 마라의 완성
본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마라에서부터 엘림으로 인도하셨다. 엘림은 큰 오아시스였다. 거기는 열 두 샘과 칠십 주의 종려 나무가 있었다. 엘림은 마라의 완성이다. 성화의 완성은 바로 영화로운 구원이요, 구원의 완성이다. 우리는 마라 같은 광야를 지나서 결국은 엘림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 짧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엘림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열 두 샘과 칠십 주의 종려나무의 숫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와 칠십 장로에 대응되는 수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함과 충만함을 상징하고 있다.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곳이 엘림이다.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자. 이스라엘은 엘림에서보다 마라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끌어올린 것은 마라의 쓴 물이 달게 변한 사건이었지 그저 엘림에서 누리는 편안함이 아니었다. 오늘 여러분은 엘림에 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장차 올 구원의 영광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준다. 우리는 오늘 마라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마라가 언제나 쓴 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의 마라를 변하여 마실 수 있는 생수로 변하게 해주는 능력이다. 이 세상의 모든 마라들, 모든 쓴 물들은 십자가의 은혜로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찬송할 수 있게 된다(495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7. 우리는 광야에서 성화의 과정을 지나고 있는 존재들이다.
본문은 우리는 광야에서 성화의 과정을 지나고 있는 존재들임을 가르쳐준다. 꿈 같은 은혜를 받아서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나왔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거룩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몸으로 배우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머리의 신앙이 가슴의 신앙이 되도록 말이다. 마라의 쓴 물을 맛보고 있는가?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원망하지 말라. 원망함으로써 멸망하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으라. 원망하기보다는 모세가 보여준 태도와 같이 하나님께 엎드리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라.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불평이 인생 중에 일어나는지 돌아보라. 자기 자신에게,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얼머나 많은 불평과 원망이 일어나는가? 그것들을 당신의 기도의 제목으로 가지고 가라.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로 쓴 물이 변하여 달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라.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노라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우리를 마라의 완성인 엘림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