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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1) - 원망의 삶, 소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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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1) - 원망의 삶, 소명의 삶

출애굽기 16:1-18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7-02

말씀내용
1. 감사를 원망으로 바꾸고 사는 사람들
홍해를 건넌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삼 일 만에 직면한 문제가 마실 물의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엘림에서의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이 될 무렵,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발생한 먹을 양식의 문제였습니다. 결국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먹고 마시는 문제였지만, 심각한 생존의 문제인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엘림에서의 달콤한 휴식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이 다시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3절에서 원망의 내용을 잘 보십시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들의 원망의 내용은 사실에 근거하기 보다는, 비현실적 판단과 기대와 극단에 치우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의 처지에 대하여 비현실적 판단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기 가마 곁에 앉아있을 처지가 아니었으면, 그들은 떡을 ‘배부르게’ 먹을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현재의 처지에 대해서도 그들은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굶어 죽을 처지가 아니었으며, 굶어 죽은 사람이 아직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이제 온 회중이 굶어 죽게 되었다고 판단합니다. 셋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장자들이 죽을 때, 자기들도 함께 죽었더면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될 수준에까지 이른 극단적 감정 표출입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듯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하고 있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조롱하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우습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해서는 안 되는 지점을 넘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구원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떤 환경이 온다 해도, 우리가 ‘차라리 예수님을 안 믿는 게 나을 뻔 했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만 안 믿었으면…’하는 식의 표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2. 말의 힘: 소수의 원망이 온 무리로 원망하게 한다(고전 5:6).
말의 힘은 대단합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 3:5~6).”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교회로부터 배워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이 한 가지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이 가진 힘에 관한 것입니다. 특별히 메추라기를 하나님께서 주시게 된 상황을 민수기 11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4절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결국 소수의 사람들이?하나님을 알지 못하는?탐욕을 품고 불평과 원망을 하기 시작해서 온 백성이 다 원망의 대열에 휩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힘이 있는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는가는 대단히 중요하고, 이 모든 말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판단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이 다른 지체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므로 말에 대해서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골 4:6). 맛이 없는 소금이 없듯이, 신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은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말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3.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이 감사와 원망을 결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감사를 원망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사람이 감사를 원망으로 바꾸게 됩니까? 그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하여 어떤 대답을 하는가에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주리시고 마귀가 시험하여 돌로 떡을 만들라고 하였을 때, 주님은 신명기 8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떡도 필요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주님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감사를 원망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뭐니 뭐니해도 머니로 산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감사를 원망으로 바꾸고 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런 문제를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고 대답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삶의 모든 환경과 조건 속에서 자족함을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힘이 있는 위로는 재물이나 명예나 성공이 아니라, 하늘의 위로인 것입니다. 복음이 그들의 위로인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그들에게 위로인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들의 위로인 것입니다. 장차 올 나라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위로인 것입니다. 찬송가 434장의 가사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믿음으로 사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하는 자만이 하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4. 들으시는 하나님: 모든 원망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놀라울 정도로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이 짧은 본문에만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망을 들으셨다는 표현은 네 번 반복해서 표현되고 있습니다(7,8,9,11). 성도들이 하는 기도를 들으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뒤에서 하는 소리뿐 아니라, 심중에 하는 말까지도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것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말라기를 보십시오. 3:13~16입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무엇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십니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시고 판단하신다고 했습니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원망과 불평이 결국은 하나님께 대하여 하는 원망이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말라기 3:13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했던 불평과 원망들이 무엇입니까? 14절은 결국 이런 이야기입니다. “야,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히 예배드리고 교회 봉사하고 말씀듣고 해 봤자,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이런 류의 말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모세와 아론을 대하여 원망했습니다(2). 그들은 하나님께 원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7절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또 8절을 보십시오.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라.” 이것은 조금 해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이 그간 한국 교회에서 오용 내지는 남용된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비난하면 하나님께서 치신다’는 단순한 논리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목사님들이 잘못을 덮기 위해서 이런 구절을 사용한 남용의 사례들 때문에, 근자에는 다른 반대편의 극단적인 입장이 생겼습니다. 이 본문은 모세와 아론이라는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경우이지, 목사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구절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전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남용이라면, 후자는 오용입니다. 제가 목사이기에 이 말씀을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목사들과 같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은 삼가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분명한 범죄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을 두둔하고 감싸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5:19을 보겠습니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이 말씀은 목사를 포함하여 장로들 즉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범죄의 건이 생겼을 때에는 소문을 내거나 미리 단죄할 것이 아니라, 더욱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두 세 증인’이란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확실하게 드러난 범죄의 사실이 아님에도 비난 내지는 험담 혹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범죄가 드러났을 때에도 뒤에서 하는 소리들이 아니라,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고 디모데전서 5:20은 말합니다. 지도자들이 포함된 이야기입니다. 공적으로 그리고 교회의 권위로 꾸짖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치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다루어보겠습니다. 명백한 범죄 행위는 아니지만, 목사나 장로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인간적 약점이나 실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지체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교회를 섬깁니다. 목사나 장로 등 지도자들 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지체는 각기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섬김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보완하고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써 온전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 교회의 지도자들?독단적이고 독재적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방식으로 가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견딜 수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목사를 쫓아내는 것입니까? 그때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조용히 교회를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을 찾아내고 그것을 쉽게 비난하는 것이 교회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교회에서 행하고 집에서 하는 말이 이 문제에 있어서 차이가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열심으로 잘 섬기는데, 집에 가서는 부부가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해서 비난을 하는 것을 보고 들은 자녀들은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 정도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5. 필요인가, 탐욕인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구분을 해야 하는 것은 필요와 탐욕의 차이입니다. 오늘날 필요와 탐욕은 거의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얼마가 있어야 사는가?’라고 묻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 수 있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사업을 구상하는 한 형제의 이야기)
“내가 얼마를 벌어야 살 수 있는가?,” “내가 필요한 것은 얼마인가?”를 묻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내 인생의 소명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것을 물을 겨를이 없이 인생이 다 지나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와 탐욕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은 필요를 채우시지만, 탐욕을 채우시지는 않으신다.
인간이 필요와 탐욕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 때 찾아오는 현상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족이 없는 것입니다. 자족이 없다는 것은 감사의 자리에 원망과 불평이 들어오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매우 예리하고 무섭게 지적합니다. 시편 106:15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저희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그들은 물 때문에 불평했고, 음식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불평과 원망이 그 속에 가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고 메추라기도 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주셨습니다. 특별히 메추라기를 주신 상황을 민수기에서 읽어보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만나만 먹으니까 심심하다고 말하자면 반찬 투정을 한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달 동안을 메추리기가 진중에 내리게 하셨는데, 진 전체로 거의 하룻길에 해당하는 길에 지면 두 규빗(3 ft) 높이로 쌓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탐욕의 문제였습니다. 민수기 11:4을 보세요.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하나님은 그래서 고기가 물리도록 한달 내내 메추라기를 그렇게 내려주셨습니다.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말입니다(민 11:20). 시편 기자는 그것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대로 주셨지만, 그들의 영혼은 파리해졌다고 말입니다.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습니다(민 11:33).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탐욕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b~3).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골 3:5).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7. 기도(간구)할 것인가, 원망할 것인가?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원망 혹은 불평 같은 것들을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사전에서 그런 것들을 몰아내십시오.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원망과 불평은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는 형편과 상황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본문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형편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이제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탐욕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음식의 문제였습니다. 메추라기 상황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원망이나 불평 대신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을 재앙으로 치셨던 하나님,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매일 밤낮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그들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가지고 나온 양식이 이제 다 떨어졌습니다. 저희들을 크신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신 전능하신 하나님, 저희들을 돌아보시옵소서.”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을 하였습니다.

8.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최우선으로 하고 살라.
오늘 우리도 똑 같은 상황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삶, 가정의 삶, 그리고 교회의 삶 또 일터에서 우리도 동일한 상황들을 만나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상황에서 여러분이 하는 말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감사를 원망으로 바꾸지 마십시오. 필요가 아니라 탐욕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에 전능하신 하나님,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런 필요의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께 구할 필요도 없다고 주님은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이미 다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추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저 이 한 세상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내 한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추구하고 사십시오.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도록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온 세상에 가득해지기를 추구하고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개인의 삶 속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소명을 추구하고 살아가신다면 원망과 불평은 여러분의 삶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이 고작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면, 여러분의 입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는 원망과 불평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증명해줄 것입니다. 소명을 따라 사는 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목적이요,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