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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2) - 하나님이 공급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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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2) - 하나님이 공급하신다

출애굽기 16:19-36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7-16

말씀내용
두 주제: 만나와 안식일
출애굽기 16장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만나와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이 두 주제는 동전의 앞뒤면 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의 문제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어떤 학자들은 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로 바로 이 안식일 문제를 꼽기도 합니다. 실로 안식일 규정은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구약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습니다. 광야 교회에서 한 번은 안식일에 나무를 하는 사람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모세가 하나님께 여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진 밖에서 회중이 돌로 쳐서 죽일 것을 명하셨습니다(민 15). 무서운 일입니다. 이렇게 안식일 규정은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주님을 대적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구체적으로 문제를 삼았던 것도 역시 안식일 규정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안식일 규정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셨는가 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기신 의도와 사람들이 그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같다면 문제가 없습니다마는,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그것이 신앙의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행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한대로 죽은 믿음은 행위가 없겠지만,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행위로써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 가운데서도 구약 성경에서 내내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 바로 안식일 규정입니다. 왜 이 안식일 준수가 신앙의 본질에 깊이 연결되어 있는가를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믿음의 유무에 대한 하나님의 테스트다.
4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원망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만나를 주실텐데,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시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나를 주시는 것이 어떻게 시험이 된다는 것입니까? 매일 내리면 매일 거두어 먹기만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나가서 거두지도 않을 게으른 자들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면 왜 이것이 시험이 됩니까? 만나가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에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나라는 주제와 안식일이라는 주제가 만나는 것을 봅니다. 만나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절대로 필요한 양식을 대표합니다. 만나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며,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다는 영적 교훈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광야 교회의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배워야 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만나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 때문입니다. 만나는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전날에는 보통 때 거두던 것보다 두 배, 그러니까 이틀 치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다가 꾀가 생겨서 보통 날에도 내일은 좀 쉬자 계획하고 이틀치를 거두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면, 모세는 만나를 하루치를 거두고 그것을 당일에 다 소화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이튿날 것까지 모았거나, 이튿날을 위해서 남겨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튿날에 남은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고 했습니다. 구더기가 생긴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꾀를 부려서 먹고 살지 말고, 하나님을 매일 의존하여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신실하심을 굳이 믿지 않아도, 꾀와 요령만 잘 부리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여지를 하나님은 남겨두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꾀부리는 사람은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쪽에 속하신다면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만나가 안식일에는 쉰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 말씀을 듣고서도 안식일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28절). 안식일에는 만나가 쉰다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면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래도 나가서 거두려고 한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이들도 마찬가지로 꾀와 요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요행을 바라고, 혹시 만나가 내리면 그것 다른 사람들보다 수지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심정도 있었을지 모르고, 또는 설마 매일 내리던 만나가 안식일이라고 안 내리다니 말이 되느냐 하는 불신의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수 있는 것이, 하늘에서 만나가 매일 비와 같이 내렸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구나 라고 믿음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마치 자연 현상처럼 매일 내리는 비가 무슨 안식일이라고 내리지 않고 수십년을 그렇게 규칙적으로 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불신이 작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해서 병이 나았을 때에도, 불신하려고 하면 마침 그 때 기도하면서 무슨 치료를 병행했는데 그것 때문에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여간, 하나님께서 만나를 안식일에는 주지 않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의 유무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7일에 한 번 올 때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가 아니라,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고?이것이 바로 안식일을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은 자기 꾀나 재주 부려서 사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율법을 준행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시험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준행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나를 신뢰하는가 신뢰하지 않는가를 시험하시겠다는 것과 동일한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순종은 오직 믿음의 순종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일, 직업, 생계수단?는 안식일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하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있고 없고를 판단하시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내가 내 재주부려서 산다’는 고백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고백 여하를 가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로써 그것을 보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공급을 믿는 자들이 누리는 쉼이다.
안식일은 참 민감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신 후에, 신약 교회에서 구약의 안식일 전통은 주일로 옮겨져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안식일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신약 시대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지킬 의무와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안식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르침의 본질과 그 정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주일 지킴과 매우 깊은 연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오늘날 우리 신약 교회의 신자들에게나 안식일은 아마 두 가지 반응을 자연스럽게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주일 혹은 안식일이 영 부담스러운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규정만 없으면 좀 편하게 신앙 생활을 할텐데, 영 찜찜하다 이겁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안식일/주일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편안해지는 분들, 기다려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저 그날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에 하나님의 백성들, 나의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그리고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영혼이 양식을 풍성하게 먹고 살찌워지는 날이기 때문에 기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혹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는 별세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어쩌면 성경적 참된 경건이 너무나도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그렇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저의 기우 때문입니다. 시편 42편을 보십시오. 4절입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다윗은 아마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처지 가운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래서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예배하던 때를 추억하고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주일에 대한 그의 태도였습니다. 이 시편이 기록된 것은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안식일/주일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가장 합당한 태도임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비록 쉬는 날이기는 하지만, 모두에게 진정한 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에 쉬기만 하면 좋을텐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참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이 참된 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참된 쉼은 영과 육이 함께 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우리의 영육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 1장 초두에 쓴 유명한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로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 할 때까지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제가 예배를 영육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쉬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혼만 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도 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쉼을 경험할 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에까지 힘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매 주일마다 누릴 수 있기를 구합니다.

이렇게 안식일/주일을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너의 인생은 네 힘과 네 재주로 사는 것이 아니란다. 내가 너의 인생 내내 너의 필요를 공급하여 줄 것을 믿고 살아라.” 하나님의 이런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만이 이 안식일/주일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여 주신대로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루라도 더 일해서 돈을 좀 모아놓아야만, 늙어서 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일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면, 결국에는 만나를 이틀치, 사흘치를 모았다가 구더기가 끼는 것을 경험한 자들이 걸어간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 속에는 진정한 안식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돈을 모으는 기계로 다 낭비되고 하나님께서 인생에 주신 소명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되고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선하신 의도를 알고 그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만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고, 그 날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패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따라야 하는 모범이다.
우리가 안식일 규정을 생각할 때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규정이 십계명 보다 훨씬 먼저 주어진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이 계명의 유래는 바로 천지 창조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나서 일곱째 날을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셨으며 쉬셨습니다. 모든 창조의 결과들을 보시고 그것을 즐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칠일 째 되는 날 쉬셨습니다. 만나의 사건에서도 우리가 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나는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칠일째 되는 날은 쉬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피터 엔스(Peter Enns)는 이것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안식일은 만나를 거두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만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음식(만나)을 공급해주시는 일을 그치고 쉬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셨기 때문에 만나도 메추라기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쉬시면 그의 백성도 쉬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도 그 패턴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충분하게 먹고 산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안식일에 대한 이 말씀이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중요한 진리를 각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제가 구체적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하고자 하는 것은 그날을 기억하고 사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만나를 대대 후손을 위하여 항아리에 한 오멜(약 2리터, 또는 1/2 gallon)을 채워서 대대로 간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항아리에 담겨서 언약궤 안에 보관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후손들이 만나를 구경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메시지, 이 영적 교훈을 얻게 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백성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십계명에서 안식일에 관한 제사계명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기억하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 날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날에 염두에 두고 인생의 계획과 설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 기념일을 잘 기억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실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결혼 십주년이 되는 날을 제가 깜빡하고 집회 약속을 잡아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회를 취소할 수는 없고, 아내와 함께 대구에 내려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기억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주일을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십니까? 여러분의 여행 계획에서, 여러분의 사업 계획에서, 여러분이 직장을 찾으실 때, 이렇게 여러분의 이런 저런 많은 일들 속에서 주일은 가장 고려하지 않아도 좋은 날입니까? 여러분이 고려해야만 하는 우선순위에서 가장 뒤에 밀려나는,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는 가장 편한 날입니까? 기억하라는 말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억하라는 말은 가장 우선 순위에 둘 날이 바로 이 날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날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십시오. 그것은 곧 주님 자신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이며, 신앙의 수준과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기억하십시오.

겉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지키는 주일
그러나 제가 다시 한 번 우려를 가지고 다짐을 할 것이 있습니다. 겉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지키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적, 행위의 준수가 아니라, 실로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내 인생에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 속에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신앙의 선배들, 모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외없이 경험했던 그 안식일/주일의 축복을 경험하고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안식, 참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엘림과 같은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인 것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안식은 놀면 온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돈 좀 쓰면서 휴가를 한 번 제대로 즐기면 온다고 말합니다. 나는 좀 육신을 쉬게 해야한다고 그러면 안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안식, 영혼과 육신에 참된 안식을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신 것을 아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하신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과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은혜로운 배려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과 육신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쉼으로 새 힘, 독수리처럼 날 수 있는 새 힘을 얻는 역사가 여러분의 삶의 매주일 마다 일어나고 경험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