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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3) - 나를 쳐서 깨뜨리고 너희가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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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3) - 나를 쳐서 깨뜨리고 너희가 살아라

출애굽기 17:1-7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7-23

말씀내용
1. 사건을 통해서 영적 교훈을 배우라!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시내산 목전에 이르렀습니다. 시내산에 이르기 전의 마지막 지명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르비딤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여정은 지금 ‘여호와의 명령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본문이 강조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우고 알아야만 했던 것이 있습니다. 이전에 애굽에서 살던 삶에서야 자기들 원하는대로(비록 노예생활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면 되는 삶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정도의 각성은 있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훈련시키시는 것도 이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점점 주님을 알아가고 복음의 도리를 배우게 되면 될수록 자기 마음대로 원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원대로, 명령하시는대로 가야한다는 것, 아니 가고 있다는 것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생 여정에 어려움이 발생하게 될 때 그것을 대처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시험문제를 내시는구나 라고 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배웠는가를 하나님은 늘 시험하시고 다음 단계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습니다.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이었습니다. 물이 없고 마침 발견한 오아시스의 물은 쓴 물이었습니다. 마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때 그들은 불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물을 달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나무를 물에 던져서 그렇게 했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이 없으면 물을 만드시고, 물이 쓰면 쓴 물을 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그들은 배웠어야 했습니다. 또 엘림에서 한참을 쉬고 난 후, 그들은 광야로 들어갔을 때 먹을 것이 떨어져서 또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했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범사에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배웠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이나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해야겠구나 하는 것을 배웠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험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게 됩니다. 아주 잘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까? 바로 얼마 전에 배운 것들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성적은 형편없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2. 성적표: 다툼과 시험
시험 문제는 ‘여호와의 명령대로…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입니다(1). 성적표를 볼까요? 그들은 첫째로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마실 물을 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되어 ‘이번에는 우리 하나님께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제안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7).” 그들은 물론 하나님께서 물을 주실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와 다투었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2). 이것이 그들이 쓴 답안지의 두 개의 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름을 따서 여기 지명이 생기게 되었는데, 맛사와 므리바입니다. 맛사는 시험했다는 말이고 므리바는 다투었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개의 이름이 함께 붙여졌는데 우리는 나중에 민수기 20장에서 다시 반석을 쳐서 물을 내는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곳도 이름이 므리바라고 이름붙여졌습니다. 이름은 같아도 장소는 다른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시내산에 이르기 전의 지명이고, 민수기의 본문은 가데스, 즉 가나안의 목전에 있는 지명입니다. 그리고 시간도 본문은 40년 광야 교회의 출발 즈음이고 민수기 본문은 40년의 막바지에 일어난 일입니다.

본문은 모세와 다투었다고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모세와만 다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다투었습니다. 하나님과 다투지 않고서야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세와 다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묶어서 모세는 왜 자기와 다투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2). 여기 다투었다는 표현은 원망하고 불평하는데서 훨씬 더 나아간 표현입니다. 모세를 향한 그들의 원망이 어찌나 거셌던지, 모세 자신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자신을 돌로 쳐 죽일 지경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4). 이 흐름 속에서 이 다툼이 그냥 단순한 다툼이 아니라, 매우 논리적이고 법리적으로 모세와 따지려고 드는 것임을 어떤 학자는 지적합니다. 모세를 돌로 치겠다는 것은 그들이 내린 사형 선고이고 집행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 죽을 지경이 된 원인이 모세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분명히 죽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비록 모세는 쓰디 쓴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모세는 지금 하나님을 시험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모세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물이 갈한 이 상황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시지만, 그들 자신 또한 하나님을 지금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그렇다고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이 지금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까?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다투는 것은 이해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시험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만나 사건, 그리고 마라에서의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충분히 배웠고 확신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 점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공급을 거의 명령하고 있다는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고 말입니다(1). 둘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했어야 했습니다. 애굽에서의 모든 재앙과 홍해 사건에서 그들은 이것을 확신할만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상황이 악화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이 일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그분의 선하심이 드러나게 하시리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리라는 것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시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떠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들을 항상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광야 노정을 걸어왔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확신으로 인도할만큼 분명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를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조금 고통과 환난을 당하게 되면, 종종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자리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면 이렇지는 않을텐데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무명의 작가가 쓴, ‘모래 위의 발자국’이란 시는 이것을 너무나 잘 설명해주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닌가 싶은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엎고 걸어오셨다는 그 이야기 말입니다.

3.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푸느냐가 문제다.
문제는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도리어 다투게 하고 분쟁하고 나누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또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하고 쓴 뿌리가 일어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 중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를 시험하실 때, 우리가 어떻게 그 문제를 푸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험문제는 늘 출제됩니다. 거기서 우리가 어떤 답을 쓰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첫번째 지적하고 싶은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기억상실증입니다. 맛사와 므리바의 이 사건과 함께 민수기 20장에 나오는 므리바의 사건?둘 다 물이 없어서 곤란을 겪던 상황이었고 두 경우 모두 반석에서 물이 나와서 그들을 살린 사건입니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두고 두고 반복해서 가르쳐진 교훈이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들이 기록한 것을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시 95:7~11
(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 78:40~41
(40)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시 106:13~14
(13)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이 말씀들은 후대의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준 것입니다. 우리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을 자꾸 시험해서 하나님을 슬프게 하지 마셔야 합니다. 문제는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어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잊어버립니다. 얼마 전에 마라에서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가 발견한 쓴 물을 하나님이 달게 만들어주신 것을 그들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 광야에 식탁을 차려주셨고 매일 그것을 반복해서 주시는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잊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라고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잊어버리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때를 결정하고 살겠다는 태도를 견지합니다. 결국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욕심, 탐욕입니다. 그 탐욕이 하나님을 시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 탐욕이 성경이 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번째 문제입니다.

영적 기억 상실증과 탐욕, 이 얼마나 잘못 만난 조합입니까?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 상실증에 걸렸는데 그의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합니다. 아,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입니다. 지금 성경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이렇게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과 정말 다른 것입니까?

4. 우리는 어떤 답을 쓰고 있는 수준인가?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발생했던 절박한 때가 있었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절박하면 절박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무엇을 배우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런 상황,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확신에 이를만큼 배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절박함이 지난 후에야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이전에 배운 것을 가지고 처음과는 다르게 반응을 합니까?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십니까? 아니면 불안함과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나아가십니까? 그리고 그런 절박함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과 임재를 우리의 마땅한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누리며 살아가는 힘이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답을 쓰고 있는 것입니까?

5. 반석이 깨져야 물이 나온다: 십자가가 생명수의 근원이다.
본문이 우리를 마지막으로 데려가는 지점은 호렙 산의 한 반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배우고 못 배우고도 사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여기서 자명해집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반석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고질적인 불평과 원망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렙 산의 반석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중심입니다. 기도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그 지팡이를 가지고 호렙 산 반석으로 가서 그 반석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목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반석이 호렙 산의 반석이라는 것입니다. 호렙 산은 모세가 처음에 부르심을 받았던 장소입니다. 호렙 산과 시내 산은 사실상 같은 지명입니다. 구별하자면, 호렙이란 지명은 산맥을, 시내라는 지명은 산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떻든 백성들은 이제 시내산에 거의 다 이르렀으며, 하나님은 그 호렙 산의 반석을 지명하셨습니다. 둘째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로 그 반석 위에 서 계시다가 모세를 만나셨다는 뜻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반석 위에 서 계실 텐데, 그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영적 통찰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울 사도가 이 구절을 해석한 것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입니다.

고전 10:1~4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사도는 이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못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거기 반석 위에 서 계신데, 그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서 계시든 계시지 않든, 아니 반석 위보다는 반석 옆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반석 위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NIV 성경이 이것을 by the rock 이라고 번역한 것은 마치 옆에 라는 식으로 들리지만, 사실상 히브리어에서는 ‘위에’라는 의미가 훨씬 더 강합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 자신과 이 반석을 거의 동일시하게 하시면서 반석을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해석을 한 것이지요. 즉, 반석을 치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치라고 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친다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석을 쳤더니 물이 강처럼 흘러나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생수의 강이 그로부터 흘러나와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초막절 끝날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서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요 7:37~39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주님을 믿는 자들, 목이 말라서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생수를 마시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서는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생수는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오셨습니다. 언제입니까?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으므로”라고 한 표현은 주님이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죽으셔야만 성령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지팡이로 깨뜨림을 받으신 사건입니다. 정작 죽어야 하고, 진노의 지팡이에 맞아 깨어져야 할 대상은 우리들인데, 주님께서 그 자리를 대신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놀랍게 그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반석 위에 서 있을 테니, 너는 반석을 쳐라.” 반석이 깨어지면서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시 105:41).” 생명수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6. All I have is Christ, Jesus is my life.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 기억 상실증에다가 탐욕이 불타오르는 도무지 구제 불능의 사람들입니다. 아예 배우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영적으로는 완전히 무능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가나안에 데리고 갈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가르치면 됩니까? 성경 공부 좀 더 하면 됩니까? 제자훈련을 좀더 받아볼까요? 그러면 소망이 있겠습니까? 봉사를 열심히 좀 해볼까요?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는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상고하시면서 그런 식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복음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도리를 깨우친다고 하는 것은 다른게 아닙니다.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다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CCM 가사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일부를 번역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제가 지옥으로 향하는 경주를 하고 있었을 때,
대가에 상관없이
당신은 저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십자가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저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당신은 제가 받을 진노를 담당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아는 모든 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제가 가진 모든 소유는 그리스도 뿐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저의 생명이십니다.
이제 주님, 저는 오직 당신의 소유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살고 싶습니다.
당신의 명령을 따를 수 있는 힘이
저 자신으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오 아버지, 저의 구속받은 삶을 사용해주옵소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어떤 방법으로든 말입니다.
그리고 저의 노래가 영원하게 해주십시오.
저의 유일한 자랑은 오직 당신 뿐입니다.
But as I ran my hell-bound race
Indifferent to the cost
You looked upon my helpless state
And led me to the cross.
And I beheld God’s love displayed
You suffered in my place
You bore the wrath reserved for me
Now all I know is grace.
Hallelujah! All I have is Christ
Hallelujah! Jesus is my life
Now, Lord, I would be Yours alone
And live so all might see
The strength to follow Your commands
Could never come from me.
Oh Father, use my ransomed life
In any way You choose.
And let my song forever be
My only boast is You.

내가 받을 진노를 주님이 받으셔서 구속받은 것을 아는 성도가 할 수 있는 자연스런 고백이 아닙니까? 그런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이제는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자리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기쁨과 감격과 은혜로 말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쳐라. 나를 깨뜨려라. 그래야 거기서 나오는 생명수로 너희가 산다. 방법은 이것 밖에 없다.” 오늘 우리도 그들과 같은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괜찮아서가 아니라, 우리는 십자가의 방법 밖에는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우리 대신 진노를 받으시고,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시는 길 밖에는 우리가 구원받을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손가락질할 수 있습니까? 이제 우리가 할 말은 “나를 쳐라. 나를 깨뜨려라. 그래서 주님 말씀대로 내 배에서 나오는 생명수로 네가 살아라”입니다. 기쁨, 감격, 은혜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