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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5) -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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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5) -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하라

출애굽기 18:1-12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8-06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모세 개인과 그 가족의 이야기의 일면을 보게 합니다. 성경이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여 놓은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어떻게 출애굽의 사건이 또 다른 한 결과, 즉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관련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언제나 다른 구원 사건을 꼬리를 물고 만들어내는 역사가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당도했고 거기에 진을 쳤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언제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처가로 돌려보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세의 처자식을 데리고 와 모세는 오랜만에 가족과 해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감격과 감동을 그려내기 보다는 특별히 모세와 장인 이드로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에게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모세는 복음전도자로서 매우 중요한 몇 가지 특질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증거의 메시지
먼저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모세의 증거입니다. 모세가 무엇을 어떤 태도로 장인 이드로에게 증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모세가 장인에게 한 이야기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짧은 본문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A. 하나님이 주어다.
모세가 전하는 이야기의 주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강조합니다. 이것이 사실상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현저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언제나 자신을 주어로 하는 생각, 태도, 삶을 견지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처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험은 사실상 자기 자신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 됩니다. 언제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장인에게 한 말들이 무엇이라고 본문이 설명하고 있습니까? 1절은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가를 먼저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입니다. 부연하기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호렙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날 때, 그는 단지 미디안의 한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이드로가 아는 모세는 한 사람의 평범한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대한 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모세는 이미 영웅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신에게 도취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드로에게 ‘내가 이런 사람이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이드로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복음전도 메시지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8절에서도 이것을 다시 모세가 말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가장 철저하게 양보없이 견지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이야기를 하다가, 적당한 자리에서 자기 자신이 끼어들 수 있는 그런 경박한 틈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어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복음 전도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B. 개인적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주어로 하는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구원얻는 지식으로 인도해주셨는가 하는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전하는 증거(간증)는 개인적입니다. 모세는 무엇 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하고 목도한 일들입니다. 그저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서 그 지식을 외워서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 지식을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하고 있는 것은 그간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라고 한 것입니다. 그는 그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경험을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메시지가 개인적이어야 한다는 점은 우리가 간증을 하게 될 때, 필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설교와 같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지금 모세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간증?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개인적으로 나누는 것?의 방식도 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 간증은 얼마나 강력한 도구가 되는지 모릅니다. 또 이 간증은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꾸밈없이 드러내주는 너무나 중요한 증거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일어났던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일평생 주님을 믿고 살아온 동안에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셨고, 자신에게 행하셨던 많은 일들을 우리는 풍성하게 경험하고 살아가게 되고, 그러므로 우리의 간증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풍성해지고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장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 부분을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C. 모든 일을 다 전하라.
모세가 장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서 우리가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일을 다’ 말하는 태도입니다. 이드로는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1). 모세는 ‘여호와께서...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장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가 그 많은 일들을 다 말하는 것을 인내하면서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더 문제는 그렇게 ‘모든 일’이라고 말할 만큼 많은 이야기(간증)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적게 말해야만 사람이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시고, 구원하시려고 작정한 사람은 여러분이 하는 모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기쁨으로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서 복음 전도자는 매우 신중하고 세심해야 하며,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2. 태도: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엡 4:15)
복음 전도자에게 있어서 메시지의 내용만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태도를 잘 만들어서 하자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복음 전도자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본성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결코 무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태도를 지적하자면, 그것은 무례함입니다. 마치 내가 뭔가 대단한 것을 네게 주려고 한다는 태도나(본질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태도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싫으면 말라’는 식의 태도나, 혹 나의 복음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시간만 낭비했다는 식의 인상을 남기는 것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메시지 자체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는 불쾌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까지도 그것을 거들어야 할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태도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보이는 태도를 관찰해 보십시오. 7절입니다. “모세가 나가서 그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가 결코 한 거대한 민족,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서 고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인상을 조금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한다는 것은 참 쉬울 것 같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세는 장인에게 자신의 본래 신분?애굽의 왕자 중 하나였던?을 보여준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신분을 장인에게 말했을 수는 있겠지만, 모세는 장인에게는 적어도 40년 동안 그저 한 사람의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드디어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장인에게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조금도 자신의 존재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모세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냐’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본성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오시면서 자신에 대해서 ‘내가 이런 사람이니까, 나는 대단하다’거나 ‘내가 지금 좀 찌그러져서 그렇지, 나는 본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주의 은혜의 자리에서 멀리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은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기회만 기다리게 되어있고 기회가 오기만 하면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데 게으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태도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진리?을 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도입니다. 모세가 지금 장인에게 하고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3. 반응?구원 얻는 사람의 반응
이렇게 사위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대한 장인 이드로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드로의 반응은 구원 얻는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을 몇 가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A. 기쁨(9)
첫째는 기쁨이었습니다. 이드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사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뻐하여”라는 단어는 그렇게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 드물게 사용되는 단어는 ‘기쁨에 압도되는 상태’ 혹은 ‘사람의 영혼 깊숙이 흐르는 행복감’과 같은 것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드로가 사위 모세로부터 들은 하나님의 이야기에 대해서 보여준 반응이 그저 일반적인 것 이상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은 결코 자연적 현상은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드로는 지금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를 듣고 단지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그 구원을 경축하고 있는 자리에까지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은 기쁨입니다.

B. 찬송(10)
두번째로 이드로의 반응은 찬송이었습니다. 그는 기뻐서 즉각적으로 찬송을 그 입에서 발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밑에서 건지셨도다.”라고 말했는데, 그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입니다. 이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모세가 전한 이야기의 모든 주어가 하나님이었기에, 그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C. 고백(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세번째 반응은 고백인데, 이드로는 “이제 내가 알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무엇을 알았다는 것입니까?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그는 알았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은 그냥 감정적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의 내용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된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그는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호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드로가 고백하듯이, 그것은 매우 분명하고 정확한 고백입니다.

D. 공동 예배와 교제(12)
마지막으로 이드로는 번제물과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고,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이드로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드로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고 아론과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하자면, 그들이 함께 하나님께 공동 예배를 드렸고 함께 교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합니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도자 예배’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것은 구도자 집회, 전도 모임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합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제라는 말도 오늘날 너무나 많이 오해되고 남용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교제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교제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지금 이드로가 아론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교제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적용: 가정 안의 불신자를 보는 관점
이제 이 말씀을 적용해보십시오. 모세는 그의 가족 중 불신자인 한 사람인 장인 이드로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드로는 그 복음 앞에서 합당한 반응을 했으며 그 반응은 구원 얻는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 한 일 이주일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에 속합니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말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행동과 삶이 그들에게 말해왔고 말하고 있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참된 것임을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가족 중 불신자가 남편이든지, 아내이든지, 부모님이든지, 자식이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그들을 일차적으로 그 가족 내에서의 관계로 보기 보다 영적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이기 전에, 내 남편이나 아내이기 전에, 내 자식이기 전에 그는 불신자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살다가는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영혼입니다. 이런 점에서 먼저 믿은 사람,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자기를 부인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불신 가족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어리석고 못된 태도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가 복음의 장벽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여주었듯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내도, 지혜도 요구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그리고 개인적으로 경험한 살아있는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다 나누려고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런 은혜를 주셨듯이, 여러분들에게도 여러분이 기도해오셨고 복음의 진리를 사랑 안에서 나누고자 했던 바로 그 가족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기쁨에 압도되어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에 나는 알았다”고 고백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제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의 모든 자리에서, 삶의 모든 태도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말 속에서 하나님이 주어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게 하십시오. 이것이 그 모든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가 받은 소명임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