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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7) - 하나님의 언약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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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7) - 하나님의 언약 백성

출애굽기 19:1-6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1-03-18

말씀내용
1. 시내산에서의 1년이 중요하다.
출애굽기 12장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주셨던 약속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3:12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시내 산에 와서 하나님을 섬겨야 모세가 자신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임을 알 수 있다는 약간은 특이한 말씀입니다. 이제 출애굽하고 약 3개월의 여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던 시내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약 1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은 그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신 증거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입증되는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모세 자신도 이제 무슨 일이 여기서 일어나게 될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말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산 앞에 장막을 쳤습니다(2). 그리고 모세는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것을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라고 표현합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은 이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개국 연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보낸 시간은 약 1년여가 되는데, 사실 이 기간에 해당하는 성경의 본문은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19장에서 레위기 전체와, 민수기 10장까지 모두 59장이나 됩니다. 왜 이렇게 이 1년의 기간을 성경은 중요한 비중을 두고 다루는 것이겠습니까? 언약 백성의 탄생이 그 열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새롭게 공식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언약 백성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매우 중요한 성경의 사상입니다.

2. 광야교회의 기초: 언약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의 나라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한 나라로 부르실 때,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언약입니다. 그 언약은 이제 하나님께서 주실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의 조항들을 포함합니다. 이 언약은 시내산에서 맺어진 언약이라고 해서 시내산 언약이라고 불리우는데 조건적인 행위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한 국가를 유지하고 국가의 힘을 누리기 위해서 따르고 순종해야 하는 조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나 죽으나 언약의 개념 위에 서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언약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이 말은 개별적인 개념보다는 공동체적 개념을 더 강조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갑자기 맺으신 언약이 아니라 처음부터 특별히 아브라함과 맺으신 은혜언약을 기억하셨고 그것을 문자적으로 성취해주신 사건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역사상 수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오늘날까지도 하나로 묶어주는 결속력이 어디서 나온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지닌 언약사상이고, 언약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만들어진 백성이고 국가다”하는 인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의 기초가 하나님과의 언약이었다라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존재, 교회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가르쳐줍니다. 본질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존재론적으로 가지고 보여주는 성격을 그대로 가지게 됩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바로 교회는 언약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3. 교회의 위기
교회가 언약 백성이다라는 말을 여러분은 들어보셨습니까? 듣기 쉽지 않은 말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언약이라는 개념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거듭난 성도의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면 유아세례를 베풉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아이가 믿는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을 때, 그 부모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믿음의 자녀에게도 흘러간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하는 것을 이렇게 유아 세례를 베풂으로써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가 성찬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 특별히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성찬을 나누고 받으면서 우리는 새 언약의 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것이 주로 혈연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훨씬 더 결속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교회는 더 이상 유대인 혈통에 매이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이 되었습니다. 그 근거는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이고, 그 피는 전적으로 언약의 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부터 언약을 맺으실 때, 고대 근동의 언약식의 형식을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성경적 구속 사상을 매우 잘 전달해줍니다.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은 짐승을 둘로 쪼개어 나누고 그 사이를 걸어감으로써 서명을 했습니다. 즉, 언약을 어긴다면 어긴 자는 이 짐승처럼 쪼개질 것이다라는 무서운 서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죠이선교교회는 참으로 언약 백성인가? 죠이선교교회인 우리들은 자신이 언약 백성이라는 성경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우리의 존재 근거가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피라는 사실을 아는가? 물론 우리 시대에는 말씀드린대로 이런 언약 백성으로서의 교회 개념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소위 이 세상의 개인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 성경의 언약 사상과 언약 백성으로서의 공동체성을 거의 다 파괴해버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개인의 취향, 개인의 결정,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는 개인주의의 극대화를 보여주는 미국 자본주의를 그대로 반영하는 모습으로 변모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를 섬기며 세워가는 동안에 겪어왔고, 겪지 않을 수 없는 교회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란 말씀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였는지 보고 경험한 것을 상기시키십니다(4).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인 하나님의 율법을 명하실 수 있는 근거, 자격이 있으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이 구원은 그냥 구원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만드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구원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제 애굽 사람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예배하는 백성으로서 이 땅에 존재하고, 그 존재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확인하고 선언하시는 것은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단지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애굽의 신이나,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가나안의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단지 한 민족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이 바로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가 상상할 수 없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해내었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서 희미하게 나마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는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죄인이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듯이,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열국들이 다 하나님의 소유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한 위치에 두사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오게 하시겠다는 것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시는 언약의 내용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이들을 열국 중에서 내 소유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여기 ‘소유’라는 표현은 열국도 다 하나님 소유지만, 특별한 의미에서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보물 같은 존재로서의 소유를 의미합니다. 다윗이 죽기 전에 성전 건축의 준비를 마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면이 역대상 29장에 나옵니다. 그때 다윗은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다”고 말합니다(대하 29:3). 여기서 ‘사유의’라는 말이 오늘 본문의 ‘내 소유’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소유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온 세상의 열국 백성들에게 제사장 나라로서의 복의 통로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거룩한 백성?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조건이 무엇입니까?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함으로써가 아닙니다.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5. 믿음과 순종이 전부다.
그 의미는 한 마디로 ‘언약 백성이 되라! 언약 백성으로 존재해라!’하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라는 말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 언약이 율법의 내용을 가지고 있고 쌍무적 계약 형식이기에, 이 언약은 또한 율법에 대한 순종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순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께 대한 신뢰’라고 한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 내용이 성경 전체로부터 매우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래, 믿음과 순종이다.” 여기까지는 됩니다. 그러나 그 내용, 믿음 혹은 신뢰의 내용이 뭐냐 하면 그게 약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풍성한 교리적 내용을 가리키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무지가 심각하고 그 무지 위에서는 결코 신앙이 바르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자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며칠 가지 못해서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데도 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겠다고 말합니다. 뭐가 문제가 됩니까? 그들의 충정어린 대답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언약 지킬 것을 요구하실 때, 그것이 철저하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놓친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을 가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과 자비 그리고 언약에 기초한 사랑으로 이루시고 해 주실 것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알고 믿기에, 그분의 뜻을 따라서 그 언약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비로소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법조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할 때, 그들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며, 자기들이 깨뜨릴 언약의 대가 조차도 하나님께서 치루어주실 것을 바라는,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에 대한 기대, 믿음, 신뢰를 가지는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즉,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의로움과 사랑이 언약 백성의 결속력이라는 것입니다.

6.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완전한 순종
이런 의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하시고 행위에 의존하게 하시는가? 은혜로 칭의를 받고 행위로 성화를 이루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미 확정되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들이 언약을 지켜야 했습니다. 존 머리(John Murray)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백성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들을 구원할 율법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얻은 구원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게 하는 율법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살아감으로써 반역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영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일어난 것과 같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비극입니다. 소위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기 보다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에 나와서 은혜와 위로를 받고 기분이 좋아지고 눈물을 흘리기를 원합니다. 그 눈물이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의 이후 이야기들은 그들이 결코 이 언약에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 거듭난 사람들,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들은 그런 거듭되는 언약 백성의 불순종과 실패를 통해서 무언가를 얻게 됩니다. 그들은 시내산 언약이라는 조건적이고 행위에 기초한 언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언약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은혜언약의 은혜를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내산 언약 안에 이미 주어진 용서와 속죄의 조항들은 그 은혜를 보여줍니다. 시내산 언약은 엄밀하게는 행위언약이고 조건적이지만, 실상 그 안에는 모든 은혜의 조건들, 그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그 실패를 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들이 이미 충분하게 주어져있고 그 모든 용서와 속죄의 의식들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7. 실패: 언약 백성을 기르시는 하나님의 방법
바로 이 실패라는 사건이 우리의 신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던 베드로였지만(막 14:29),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집니다. 다윗도 그렇지요. 믿음의 용기로 골리앗을 죽일 때나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할 때가 그의 신앙의 절정이 아닙니다. 나중에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후에 자기를 제대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을 배웠을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 온전하게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교회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의기가 충천한 것이 늘 위험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독입니다. 철저하게 실패를 통해서 자기를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서야 하나님은 그 백성을 자신의 언약 백성으로 온전하게 길러가십니다. 그 말은 자기 속에 있는 뭔가를 믿는 것이 아닌, 순전히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우리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그 자리에 언약의 대행자가 되어주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언약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입니다. 교회의 그 많고 다양한 구성원들을 하나로 엮어주고 그들이 이 세상의 어떤 조직보다도 깊은 공동체로 결속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기에,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자기 인식이며, 이런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값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언약을 지키라는 말씀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신뢰하라는 말씀이란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부터 순종을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열 번 넘어지더라도 열 한 번 일어나서 주님 뜻 때로 살고 싶어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흘리신 새 언약의 피의 효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말을 지키고’를 그저 우리의 행위로 지킬 수 있다는 수준으로 교회가 흘러간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헤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지키는게 행위가 되면 망합니다.

8. 그리스도와 그의 피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언약에 포함된 율법은 완전한 순종에 이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모든 광야 교회의 참된 성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실패가 거듭될수록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내용입니다. “내 언약을 지키라”는 명령에는 “나를 신뢰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실패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백성을 위한 한 구속자를 예비하시고 그를 화목제물로 보내사 그의 십자가 죽으심과 흘리신 피로써 행위언약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에 대한 모든 죄값을 담당하게 하시고 실패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계획하셨고 누가 이 일을 행하십니까? 바로 그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언약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전하는 언약 백성입니다. 그들의 실패 속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빛을 드러내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축복의 통로로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런 하나님의 언약 백성, 오직 하나님이 주신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언약 백성으로 세우시고 영광을 얻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