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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8) - 하나님을 경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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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8) - 하나님을 경외함

출애굽기 19:7-25,20:18-21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1-04-01

말씀내용
1. 우리 시대의 문제: 경외감의 부재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가진 문제는 경외감의 부재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사실상 거짓인 것입니다. 참된 구원얻는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그 본질적 특징으로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대해서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은 보았고 들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형상이 없으시므로 시내산에 나타난 현상들,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심히 큰 나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고(19:16; 20:18) 또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고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시고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는 것, 온 산이 ‘크게’ 진동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19:18~19).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산에 오른 모세에게 십계명을 반포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20:19; 신 4:32~36).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이런 현상을 친히 보았을 때,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보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실 것 같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외감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모든 인간의 경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사 6).

한 번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그런 하나님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는 떨림, 경외감이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당에 들어가는 것이 그저 남의 집 거실에 들어가는 일상적 느낌입니까, 아니면 왕의 알현실에 들어가는 느낌입니까? 여러분은 기도를 시작할 때, 그냥 일상적 느낌입니까, 아니면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라는 무게감이 여러분을 사로잡게 됩니까? 이런 것은 아마 우리의 하나님 경외함을 드러내주는 지표들일 것입니다.

2. 초월하시는 하나님, 내재하시는 하나님
교회사를 보면 늘 한 쪽으로 치우쳐 하나님을 이해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했고 때론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했습니다. 중세 고딕양식의 교회당 건축양식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이 강조되기도 했는데 바로 우리 시대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가 그런 시대입니다. 요즘에 만들어진 많은 CCM 노래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친밀성을 강조하는지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친구로 묘사합니다. 늘 이런 치우침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언제나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7:15을 보면,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지극히 존귀하고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신 초월적인 하나님께서는 누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까?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시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시려고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이 아닙니까? 대통령이 일국의 가장 비천한 무리들과 어울리겠다고 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 구절처럼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을까요? 천지 창조 때의 아담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을 얼마나 놀랍게 경험했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에덴 동산을 거니는 아담을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에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하나님과 누리던 친밀감, 내재성은 상실해 버리고, 오직 남은 것은 왜곡된 경외감이라고 할 수 있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잃어버린 내재성은 주님이 임마누엘로 강생하신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과 친밀해지면 질수록 하나님의 초월성과 거룩성을 더욱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숨기시는 이유
때문에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오시기 위해서 산에 강림하시지만, 당신 자신을 어둡고 빽빽한 구름 가운데로 숨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동시에 숨기시는 것입니다. 강림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산의 경계를 넘어 올라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올라오면 죽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우리에게 다 알려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친구와 같은 성격으로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이유는 결국 하나님께서 소멸하시는 불이신 당신 자신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백성들로 하여금 산을 침범하여 넘어오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온전하게 드러날 때, 그 의가 더러운 옷에 불과한 인간들은 소멸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사 64:6). 이것이 바로 이사야의 체험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일의 시간을 주십니다(19:10).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어차피 죄인들인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준비가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자신들을 성결하게 하고 그들의 옷을 빨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여인을 가까이하지 말 것도 백성들은 요구받았습니다. 이 명령은 성(sex)이 죄와 연결되어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을 구별하고 모든 욕구들로부터 떼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식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을 알고 있던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시 24:3)?” 이것은 분명히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났던 그 사건을 의식하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4).” 누가 과연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고 거짓 맹세치 않는 자입니까? 여러분은 과연 그렇습니까?

4. 중보자가 필요하다.
열심히 옷을 빨고 금욕하고 성결해보려고 노력해보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흡족할만큼 되었습니까? 다윗의 이 시편이 말하는 것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 거룩한 산에 올라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보다도 그 시를 성령의 영감으로 썼던 다윗 자신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삼일 동안 자신을 성결케 하고 옷을 빨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했던 시내산 앞의 백성들이 강림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을 때, 보였던 반응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모든 백성이 다 떨었습니다(19:16). 이들은 그저 자기 진에 거하고 있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산에 강림하시자 떨었습니다. 모세는 그 떨고 서 있는 백성들을 데리고 산 가까이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산 위로 올라갔고 백성들은 산 주변에 머물러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반포하여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백성들의 반응이 20:18이하에 나와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떨면서 멀리 떨어져 서있었습니다(20:18).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20:19).” 그들은 중보자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는 한, 초월하시고 거룩하시며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과 더러운 누더기 같은 의로움을 가지고 사는 죄인들인 자신들 사이에 설 수 있는 중보자는 모세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산으로 모세를 부르셔서 모세에게만 말씀하신 율법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죄인들은 모세보다 더 나은 중보자를 필요로 한다고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지만,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백성을 건져줄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보다 나은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보다 더 나은 중보자를 소개해줍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모세는 옛 언약의 중보자가 되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언약,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을 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따른 제물이 아니라 더 나은 온전한 제물로 자신을 드리심으로써 그 백성들의 완전한 중보가 되셨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완전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는 것은 초월적이고 거룩하시며 소멸하는 불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성을 그분의 육체 안에 숨기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함께 계심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빨아도 깨끗해질 수 없는 더러운 의의 의복을 당신의 거룩하신 피로 씻어 맑게 된 흰 세마포 옷으로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분 자신의 깨끗한 손, 마음의 청결, 뜻을 정하고 거짓 맹세치 않으시는 그 완전한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 경고: “인간의 죄성을 가볍게 다루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수 차례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산 위로 올라오게 된다면 그가 짐승이든지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한 것으로 여겨짐으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19:12~13, 21~22). 이미 백성들은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여러 현상으로 처음 보게 되었을 때, 떨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떨고 있는 백성들을 진중에서 이끌어 산 아래로 데리고 온 후에, 하나님께서 산으로 부르셔서 산에 올랐습니다(19:20).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산에 오르지 말라고 백성에게 다시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듭 말씀하시니까 모세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산 사면에 지경을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19:23).” 모세는 이제는 더 이야기 안 해도 백성들이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 단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내려가서 아론을 제외하고는 제사장이든지 백성이든지 산의 지경을 넘어 올라오지 못하게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됩니까? 모세가 옳습니까? 하나님이 옳으십니까? 물론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모세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모세는 인간의 죄성을 매우 가볍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아십니다. 모세는 이쯤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제 40년의 광야 여정을 통해서 그것을 뼈저리게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듭 세 번이나 경고를 하라고 하시는 것과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볼 수 있는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얼마 후에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져다가 분향하려고 하다가 성막에서 즉사하게 됩니다(레 10). 그러나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성막을 우습게 여기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성막 안에서 온갖 더러운 일들을 행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초기에 거짓말을 하고 교회의 명예를 얻으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쳐서 죽이셨습니다. 그러나 곧 교회는 또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쉽게 보는 모든 현상들이 다 그것을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모세가 백성들의 죄성을 쉽게 생각했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직은 조금 밖에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6. 하나님 경외함이 필요한 이유
오늘 본문을 정리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경험을 주시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라, 좀 원색적 표현을 쓰자면 하나님을 무서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애굽의 신들이나 가나안의 신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9에 하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셨습니다.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한편으로는 모세의 권위를 세워주시겠다는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권위를 그들이 인정하는 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모세를 두려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모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 거룩하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20장으로 가면 십계명을 반포하신 후에 백성들이 모세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중보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20:20).” 백성들이 자기들은 죽을 것 같다고 여겨서 두려워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여 일단 안심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시험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강림하신 목적이라고 모세는 설명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땅에서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경외함에 지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최초로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를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근간이 될 율법을 주실 것입니다.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기호에 따라서 하고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두려움을 경험하고 나서 율법을 잘 지켰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율법으로는 부족합니다.하나님을 두려워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좀 생소한 말 아닙니까?

7. 시내산과 시온산(히 12:18~24)
우리는 이제 이 본문을 주석한 히브리서 12장으로 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영감으로 오늘 우리가 상고한 이 본문을 주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두 개의 산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시내산과 시온산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개의 산을 상징으로 율법과 복음의 명확한 대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내산에 대한 묘사는 모두 오늘 우리가 상고한 출애굽기 본문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질 수 있는 산, 불붙는 산, 검고 빽빽한 구름, 흑암 그리고 폭풍과 나팔소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무서워서 하나님이 더 이상 자기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말고 모세를 통해서 말씀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라도 산의 경계를 침범하면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죽음을 명령하시는 엄위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모세도 나중에는 이것을 두려운 경험이라고 말했겠습니까(신 9:19)? 이것이 시내산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이 이르게 된 산은 그 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히 12:18~19a). 그리스도인들은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에 이른 자들입니다. 그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천군천사들이 있는 곳이며,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 즉 이 땅에 살다가 죽은 모든 신자들과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신자들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르게 된 산, 곧 시온산의 묘사입니다. 교회와 만민을 심판하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 곧 옛 언약과 새 언약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이 있으며, 모세가 아니라 새 언약의 완전한 중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고 의인 아벨의 피 보다 더 낫게 말하는 그리스도의 뿌려진 피가 있는 곳입니다. 아벨의 피는 복수를 부르짖지만, 예수님의 피는 속죄와 용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새 언약 아래서 누리는 은혜는 이런 것입니다. 시온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면서도 결국의 그들 자신의 죄성의 포로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연약하고 불쌍한 인생들이 보여주는 것의 죄인의 비참한 상태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는 줄 알면서도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셔서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것은 십자가에서 어쩔 수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시고 친히 새 언약의 중보자로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대신 서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압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살았고, 그가 형벌을 받음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8).” 여전히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소멸하는 불이 아니게 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 강림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무서운 시내산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흔들릴 수 없는 우리의 구원과 흔들려 멸망할 것이 다 멸망하고 더 이상 진동치 못할 영원한 나라를 이미 얻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은 그 나라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기쁘시게 하려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과 다른 신약 성도들의 하나님 경외함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된 이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숨막히는 두려움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사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십니다. 우리의 돌같은 마음을 녹이고도 남을만한 당신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에 우리는 이제 그분을 사랑함으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외함은 이제 사랑으로써 온전해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의 본문이 결핍하고 있던 것,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기쁨, 감사, 확신을 이제 우리는 소유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언약의 중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