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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30) - 십계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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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30) - 십계명 (2)

출애굽기 20:4-6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1-04-15

말씀내용
1.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의 문제
일계명이 신관 즉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이계명은 그 신관이 어떻게 표현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일계명이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 예배의 대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면 이계명은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예배의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언제나 그 예배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예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적으로 신자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개인적으로도 말씀과 기도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세를 다 포함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모든 자세와 형식은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개인적으로 우리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가하는 내용은 그 사람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계명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고대인들이 섬기던 그런 조각상과 같은 것들을 우상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매우 소극적이고 피상적 이해일 것입니다. 그런 우상들은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철저하게 예배가 올바른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배는 이런 점에서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가령, 가장 대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릇되게 행한 예를 살펴보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였습니다. 그들은 십계명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디자 애굽에서 보았던 송아지 형상을 금으로 만들어서 이것이 바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다라고 하면서 그 앞에서 뛰고 즐거워하면서 예배를 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역사에 보면 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여간해서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정해주신 한 장소 즉 성소가 있는 곳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의 편의주의는 그들이 살고 있는 주변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면서 산당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산당제사는 결국 이방인들의 제사제도와 혼합되면서 매우 혼탁한 제사를 낳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구약의 이계명 위반의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2. 잘못된 예배: 인간 중심적 예배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번 주일에 많은 사람들로 교회를 채울 수 있을까?” 때로는 우리의 질문이 합당한가, 성경적으로 바른 질문인가를 짚어봐야 합니다. 나쁜 질문은 나쁜 해결책과 대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결국 ‘예배 시간에 사람들이 더 많이 오는 것’이 예배의 성공의 척도인 것 처럼 보이게 합니다. 예배와 관련해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자요 구속주인 하나님을 그들이 사는 시대에서 바르게 예배하게 할 것인가?”일 것입니다. 바르게 예배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대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많은 교회의 관심사는 이미 후자가 아닌 전자의 질문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십계명의 이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말입니다. 결국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라기 보다는 소위 ‘User-friendly worship’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 것을 명하시면서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이라는 형상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시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성스럽게 우상의 형상을 깍아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을 많은 돈을 들여서 멋지게 건축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올 때, 우리의 마음에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실물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다 말기에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을 했습니다. 시국이 어수선하면 할수록 이런 자들의 활동이 기승을 부리곤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예루살렘에 서있으니 유다는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백성들 자신의 평안과 세속적 안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양 오해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킬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기 중심으로 예배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때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리까지 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때로 예배에서 상상력을 동원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눈을 감고 지금 당신을 안아주시는 주님을 상상해 보십시오”라고 하는 경우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마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능력이고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지만, 특히 예배에서 이것을 사용할 때에는 사단의 유혹도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칫 이런 상상력 동원은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시 한 번 user-friendly god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의 하나님을 상상 속에서 그리고 그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고정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고 그려주는 하나님은 곁으로 밀려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나는 하나님을 심판자와 같이 무서운 모습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아버지로 생각하기를 좋아해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이미지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익숙해지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상상의 세계 속에 자신을 던질 뿐, 성경, 하나님의 계시 앞에 나아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3. 하나님께서 형상을 금하신 이유
우리가 분명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예술을 반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오해하면 마치 모든 미술 작품 활동이 잘못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께서 이계명을 통해서 금하신 것은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으로 섬기기 위하여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성막과는 달리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리는 상징들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의 화가 렘브란트와 같은 이들도 활발하게 많은 성화들을 그렸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을 그린 그림도 있었지만 그런 작품들이 신학자나 교회에 의해서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예배를 위한 것으로, 예배의 대상으로서 그려지지 않은 것이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하나님을 묘사한 어떤 것들도 합당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icon)입니다(골 1:15).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도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질투 때문입니다. 질투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사용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런데, 여기 사용된 경우가 예외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질투하시도록 사랑하신다 하는 것은 마치 부부의 관계와 같이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허용될 수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라면 그것을 어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의 마음이 엉뚱한 대상에게로 흘러가는 것을 참아보실 수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경고: 아비의 죄를 삼사대까지
이계명에는 상당히 무서운 경고가 첨부되어있습니다. 이 계명을 범하여 우상을 섬기고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 사람의 삼사대 후손에게까지 죄책을 넘겨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잘못된 습관이 자식에게 전수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죄책이 자녀손에게 전수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는 언약적 연대(covenant solidarit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단위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맡기시고 물으시는 기본 단위입니다. 그래서 만일 언약 가정의 가장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그 가족이 모두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는 그 자녀들이 아무 죄가 없이 무죄한데 아버지 때문에 죄값을 받는다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아버지의 죄에 그들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면 자식들도 그 우상숭배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잘못된 예배의 관행이 얼마나 참된 신앙을 훼손하는가를 이 경고를 통해서 보이십니다.

5. 약속: 천대까지 은혜를
경고에 이어 약속도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6).” 이 약속은 경고의 말씀에 비하면 비할 수 없이 강력합니다. 죄책이 삼사대에 이르는 반면, 은혜는 천대까지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성품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그 가정을 뚫고 들어오는지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제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집안에 은혜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의 죄의 흐름을 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어떤 가정이었느냐, 과거 여러분의 부모님께서 우상을 섬기던 분들이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 계시고 하나님을 아는 자리에 와 계시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책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고 은혜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이계명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 표현하지 말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 상상으로도 그려내서 그 상상 속의 이미지의 하나님을 섬길 것을 금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하는데, 그 말은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된 그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주관적 반응이 예배의 성패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얼마나 예배가 우리 인간 중심적이 되었는가 하면, 예배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뭔가를 느끼는 그 느낌으로 예배를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더 많이 교회로 불러오기 위해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형상’들을 예배 안에 도입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배는 하나님을 모독하게 되고 인간을 섬기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우리의 찬양과 기도와 설교와 모든 예배 형식 속에서 온전하게 드러나게 될 때 성공적인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실 때, 예배를 드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주의 복되신 역사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