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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0) - 엘림이냐, 가나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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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20) - 엘림이냐, 가나안이냐

출애굽기 15:27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10-06-04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의 이적을 체험하고 단 3일만에 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불평을 했던 ‘마라의 쓴 물’ 사건을 함께 살펴보았다. 당장 물이 없고, 먹을 것이 떨어지는 상황이 되니까, 과거의 모든 은혜와 이적 체험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을 보았다. 초장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누구인지 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듣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이 가진 동일한 속성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마라의 쓴 물’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경험한 것은 나무를 던져 물이 달아지는 이적이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무는 십자가를 가리킨다. 이 나무로 말미암아 마라의 쓴 물이 달아진 것은,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질적인 쓴 뿌리,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짜 풍성한 오아시스, 엘림으로 인도하셨다. 엘림에는 물샘 열 둘과 종려 70주가 있었다. 12와 70의 숫자는 엘림의 완전하고 풍성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오늘 엘림에 관한 이 한 구절을 가지고 상고해야 할 것은, 엘림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수수께끼나 신비로운 의미를 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 신앙 여정에서 엘림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출애굽이 구원을 상징하는 사건이고, 홍해 사건이 신자의 세례를 상징하며, 광야 생활은 신자의 성화를,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영화로운 구원 곧 천국 입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기서 우리는 엘림이 상징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엘림이 가나안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나는 오늘날 이 엘림과 가나안의 혼동으로 말미암은 착각이야말로 신자들이 신앙 여정에서 당면하고 살아가는 가장 심각한 신앙의 오해와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느 누군가가 엘림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야, 여기가 천국이구나, 천국이야.” 우리는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단지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 행복하다는 의미에서라면 그것의 맞고 틀리고를 논하는 것은 너무 진지해지는 것일 테다. 그러나 그 의미가 단지 지금 행복하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우리 여기서 너무 좋으니까, 그냥 눌러 살자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늘날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정신을 차려야 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엘림에 있어도 여전히 광야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정확하게 날수를 맞출 수는 없지만,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들이 약 5주 정도 지내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16장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른 날짜가 제2월 15일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제3일에 마라에 이르렀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바로 그들은 마라에서 엘림에 이르렀다. 다시 엘림에서 시내산 사이의 신 광야에 이른 것이 45일째라고 하면 엘림에서 신 광야에 이르는 여정을 약 닷새에서 일 여드레 정도를 잡는다고 해도 그들이 엘림에 머문 것은 최대한 5주 약 35일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들이 여기에 오래도록 머물렀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까지의 너무나 고통스러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경험하는 인생 처음의 가장 달콤한 휴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거기서 더 이상 노예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등에 채찍질을 해대는 애굽 사람들도 없었다. 남의 나라 땅에 살면서 서러웠던 모든 것들이 다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시간이었을지 모르겠다. 마라의 쓴 물의 경험이 무색하고 부끄러울만큼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한껏 누렸던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 있다. 그렇게 풍성하고 완전한 오아시스 엘림에서 먹고 살다가 죽으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출애굽 시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엘림은 여전히 광야에 있는 오아시스지, 그들이 가야 할 목적지인 가나안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 사실을 기억하기 싫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의 편안함을 미래의 영광과 바꾸지 않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신자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왜 이 세상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사랑하며,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유혹을 받는 것일까? 사도 요한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성도들에게 권면할 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는지를 알았다. 그는 요한일서 2:15~17에서 그 권면을 준 뒤에, 3:1~3에서 우리가 장래에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될 영광스러운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신자들이 자신의 장래의 영광과 신분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아니,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라, 그 영광에 대한 사무침, 전율, 흥분이 없다면 도무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것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노사도인 요한은 자기의 살아온 인생을 통해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5:17~18).” 무엇이 바울 사도로 하여금 그 모든 고난을 감당하고 견디게 하였을까? 그것은 그가 보았던, 너무나 분명하게 보았던 장래의 영광 때문이었다. 이 영광이 없었다면, 아니 그가 이 영광의 찬란함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 영광에 흥분할 수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그 모든 고난을 감당하면서도, 스스로 기뻐하면서 성도들에게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단지 요한과 바울만이 아니다. 교회사에 살아갔던 수많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동일한 신앙의 양태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장래의 영광을 이 세상의 썩어질 영광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믿음의 영웅들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신자, 참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가졌던 태도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고백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엘림에 있어도 여전히 이곳은 광야라는 것이다!

마라의 쓴 물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이유
이런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 여정에 만나게 되는 ‘마라의 쓴 물’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만일 우리의 광야가 엘림에서 엘림에 이르는, 아니 엘림 그 자체라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곳이 광야라는 사실을 어떻게 깨닫게 될 수 있겠는가? 또 가나안이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그것이 뭐가 그다지 중요하겠는가? 가나안에 가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광야는 분명히 광야다. 광야는 엘림의 연속이 아니다. 비록 우리 인생에서 수많은 엘림을 만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여기는 광야지, 가나안이 아닌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마라의 쓴 물의 경험이다. 마라의 쓴 물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셔서 우리에게 종종 마라의 쓴 물을 주실 때가 있다. 분명히 그 쓴 물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비록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쓴 물을 주시지만, 결국에는 십자가의 은혜로 그 물을 달게 하시는 은혜도 허락하신다. 이것을 우리 인생에서 많이 경험하지 않는가? 당시에는 괴롭고 아파도 그것이 지난 후에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일이 없었더라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일이 비록 고통이고 쓰디 쓴 아픔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하셨습니다.”라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마라의 쓴 물은 우리에게 은혜다. 마라의 쓴 물이 우리 인생에 하나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엘림이 가나안이라는 착각을 면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이 천국이라고, 우리는 장래의 천국 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왜 우리가 이 신앙의 여정 속에서 깊은 계곡과 험한 산을 지나면서까지 천성에 이르고자 애쓰면서 살아가겠는가? 여기가 천국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에서 마라의 쓴 물을 마시게 될 때,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믿음의 반응이고, 이것이야말로 신자와 비신자가 명명백백하게 구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라의 쓴 물을 마실 때, 그리스도인은 내가 지금 살아가는 곳이 광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까지 마라의 쓴 물을 마시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이 너무 즐겁고 어느 정도는 내가 원하는대로 굴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곳이 천국이라고, 나는 엘림에 와 있으니까, 여기는 결코 광야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라의 쓴 물은 당신에게 깨우쳐준다. “정신차려라. 네가 사는 곳은 가나안이 아니라, 엘림, 광야의 한 복판에 있는 오아시스일 뿐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반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가야할 가나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자기가 사는 곳이 광야라고 할지라도, 광야에서 더 좋은 엘림을 찾는 것, 그리고 거기서 오래 사는 것이 그가 소망할 수 있는 전부니까, 우리와 같이 반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 신자와 비신자가 분명하게 갈리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신자는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이고 그래서 이 세상에 목을 매지 않는 사람이라면, 비신자는 가야 할 하늘이 없으므로 그의 모든 소망은 이 세상에 있고 그래서 그는 세상에 목을 매는 사람이다.

여기 그리스도의 삶의 윤리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여기 있다.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마라의 쓴 물이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 마음 속에서 평강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마귀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 그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엘림이 가나안이다. 바로 여기 네가 지금 이만큼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 이게 엘림이고 가나안이다. 여기서 즐겨라. 이게 다야.”라고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여기는 광야다. 너는 지금 광야 한복판에 있는 엘림을 즐기고 있는 거야. 엘림이 엘림이라는 사실을 알고 즐기기를 바란다. 네가 가야할 목적지는 이 엘림이 아니라 가나안이란다. 너는 언제라도 내가 너를 인도할 때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으렴.” 이렇게 가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 물에서 엘림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중요한 신앙의 교훈이다.

마라나 엘림이나!
우리는 지금 마라에 있는가, 엘림에 있는가? 우리가 스스로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알기에도, 우리들 중에 어떤 분들은 마라의 쓴 물을 마시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 또 어떤 분들이 지금 엘림에 와서 휴식을 취하는 분들도 계시다. 또 어떤 분들은 이제 막 마라의 쓴 물이 달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신 분들도 계시고, 또 어떤 분들은 이제 막 엘림을 떠나서 신 광야에 이른 분들도 계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라도 인도하시는 방식이 다르고, 시기가 다 다르다. 우리는 이렇게 다 한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우리들 자신만을 위한 여행계획이 다르고 시기들이 다르다. “다 똑같이 갑시다”하는 것이 구호는 좋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우리가 한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함께 경험하고 공유하게 되는 신앙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개인적으로 만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하나님께서 우리 각 개인들을 인도하시는 시간과 방식에 있어서 동일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가? 간혹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들이 있다. 다 똑같아 져야 한다는 부담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대놓고 주장하는 공산주의도 이루지 못한 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이상을 말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지도 않는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 말씀은 다 똑같아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도 여전히 유대인은 유대인이고 헬라인은 헬라인이고, 종은 종이고, 주인은 주인이며, 남자는 남자고 여인은 여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광야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다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를 구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동일하다. 이런 모든 차이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 차이들은 어쩌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들이고 우리의 속은, 우리의 속사람은 동일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마라나 엘림이나 그게 그거라는 말이다. 내가 마라에 있느냐, 엘림에 있느냐 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며, 그것이 교회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마라에 있으면 어떻고, 엘림에 있으면 어떤가? 마라의 쓴 물을 마시는 자는 십자가의 은혜로 달게 되는 것을 곧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마라에 있는 자는 곧 엘림에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 엘림에 머무는 자는 곧 다시 출발해야하는 것이지, 계속해서 엘림이 좋다고 거기 머무르겠다고 하다가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엘림에 머무는 자는 곧 다시 신 광야로 들어가야 한다. 무슨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인가? 그들은 모두 다 광야에서 여행을 하고 있는 여행자들인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는 모든 구분들이 여러분의 시각과 관점을 형성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우리는 다 한 길을 가는 순례자들이다. 단지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이 어떤 이는 마라이고 어떤 이는 엘림일 뿐 말이다. 마라에 머무는 사람은 엘림에 머무는 자를 시기하면 안 된다. 괜한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그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엘림에 머무는 사람은 마라에 머무는 자를 향해서 뭔가 문제가 있을거라는 식으로 판단하는 일을 그쳐야 한다. 당신도 며칠 전에는 마라에 있던 사람이 아니었는가? 우리는 다 같은 목적지를 가는 순례자요, 함께 힘을 주어야 하는 친구들이다.

엘림은 보너스(덤)다
나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광야 여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우리가 얼마나 지쳤는지, 우리가 남은 힘이 얼마나 되는지도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 오늘은 홍해의 이적 앞에서 감격하고 경축하고 하나님 밖에는 없다고 말하다가도 삼일 후면 불평이 입에서 그치지 않게 될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신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광야 여정의 힘듦을 아시고 주시는 것이 엘림이다. 여러분의 지난 삶의 여정을 돌이켜보라. 여러분 인생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라의 쓴 물만 있었는가? 우리들 중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일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아시고, 혹은 그 사람이 해결해야만 하는 어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을 때 그 문제를 다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는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지난 삶을 회상해볼 때,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마라의 쓴 물이 있었는가 하면 엘림도 있었다. 또 엘림이 있었는가 하면 마라의 쓴 물로 인도될 때도 있었다. 우리는 이 광야에서 엘림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라의 쓴 물에서 마라의 쓴 물로 인도함을 받으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너무나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가끔, 그리고 간혹 엘림을 주신다. 이렇게 얻고 경험하게 되는 엘림은 우리의 마땅히 누릴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엘림은 보너스다. 덤으로 주어진 것이다. 광야는 광야니까, 우리가 이런 엘림을 꼭 기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황량하고 거친 곳이다. 광야는 마라의 쓴 물과 잘 어울리는 면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우리에게 엘림을 주시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이 엘림을 우리가 바로볼 때,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엘림이 보너스요, 덤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엘림은 광야 여정에서 지친 우리에게 충분한 안식과 만족을 주는 곳이다. 엘림은 보너스다. 엘림은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엘림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 엘림이 보너스라면, 엘림이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가나안은 무엇이겠는가? 가나안은 실재다, 가나안이 본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나안은 실재다. 여기서 우리의 인식, 분별은 너무나 분명하다. 엘림은 우리가 떠나야 하는 곳이다. 그곳은 여전히 광야다. 우리는 가나안, 본봉 말하자면 실재를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곳을 가야 하는 것이다. 누가 보너스로 만족하겠는가? 본봉을 받지 않고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엘림을 가나안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엘림이 가나안으로 보이는 것이 유혹이고, 엘림을 가나안으로 삼는 것이 타락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가나안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영광이 내 마음을 흔들어놓을 때, 우리는 엘림의 환상에 속지 않는다. 그리고 엘림을 엘림으로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엘림에 영원히 장막을 치지 않았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이 가나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엘림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일어서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당신은 여행자요, 순례객이다.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 사람이다. 혹시 지금 마라의 쓴 물을 마시는 분들이 계신가? 그 일로 인하여 너무나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리까지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라는 다만 경유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위로와 힘을 얻으라. 마라는 당신이 정착할 목적지가 아니다. “오, 주님, 우리 눈에 가나안 우리의 목적지가 환히 밝히 보이게 하셔서 저희가 그 영광에 취하여 이 세상의 영광을 바라지 않고 제 위치가 마라이든, 엘림이든 목적지를 향해서 걷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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