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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5). 예배와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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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95). 예배와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시편 95:1-11, 히브리서 3:12-13, 출애굽기 17:1-7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3-08-09

말씀내용
시편 95편의 1-2절과 6-7a절은 오랜 동안 예배를 시작할 때 특별히 예배의 부름으로 사용되어왔기에 많은 성도들에게 익숙한 본문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이 시편의 전반부(1-7a)는 하나님께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촉구하는 내용이지만, 이어지는 후반부(7b-11)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기에 많은 학자들은 95편이 상이한 두 개의 시편을 묶어놓은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그렇게 보아야만 할 근거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전반부와 후반부는 분명히 예배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교훈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예배와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라고 붙였습니다. 제가 최근에 시작한 주일교리강좌 시리즈의 제목이 <교리와 삶>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교리와 삶은 하나일 뿐 아니라, 예배와 삶도 하나입니다. 분리될 수 없습니다. 95편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전반부는 예배하라는 부름이고 초청이며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응답(반응)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완성되지 못하는 위선적 예배자들을 향하여 이사야 29:13을 인용하여 이렇게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 7:6).” 한편, 95편의 후반부는 예수님의 이 꾸짖음을 상기시켜주는 경고입니다.
95편의 전체 내용을 숙지하고 이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배로의 부름 (1-7a; 막 7:6; 사 29:13)
전반부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배로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1-2절과 6절은 두 차례에 걸쳐 예배로 나아오라는 초청이고, 3-5절과 7절 상반절은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A. 첫번째 부름 (1-5; 시 62:1; 합 2:20)
먼저 1-2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1–2).” 1절도 6절도 ‘오라’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단어는 ‘이동하라, 출발하자’라는 뉘앙스가 더 강한 단어인데, 하나님의 얼굴을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출발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그분의 얼굴을 뵙기 위해 이제 출발합시다”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시인은 ‘노래하며, 즐거이 외치자’고 말하는데 이 두 동사는 모두 큰 소리로 열정을 다해 기쁨이 터져오르는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자는 말입니다. 베스 태너(Beth Tanner)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큰 소리로 부른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노래하다’는 기쁨으로 외친다는 뜻이고, ‘외치자’는 전쟁의 외침이나 경고의 외침을 의미한다.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려면 대단한 수고가 필요하다. 회중이 이렇게 하게 되면 귀청이 터질 듯하게 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신체가 보유한 모든 힘과 능력을 동원해 찬양하라는 부름이다.”
우리는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큰 소리로 노래하며 외치면서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지만, 이것 만이 예배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때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위와 임재 앞에서 잠잠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있습니다. 62:1은 잠잠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편 62:1).”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도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하박국 2:20).”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현대적 예배 방식과 전통적 예배 방식에서 이 두 가지가 갈리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시인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이렇게 큰 소리로 노래하며 목청껏 외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할 때, 적어도 두 가지 바람직한 예배의 태도를 언급하는데, 기쁨과 감사입니다. 노래와 외침은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2절에서는 감사함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감사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감사를 말합니다. 이 감사는 예배자를 압도합니다. 그때 예배자는 노래와 큰 외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기쁨과 감사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구원의 반석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반석, 영생의 근원이며 힘이시기에, 우리의 기쁨과 감사는 그리스도를 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3-5절에서 밝힙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은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3).”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제는 시 92-100편에 흐르는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이라는 주제를 드러냅니다. ‘크다’는 단어를 두 번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크고 탁월하심을 강조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십니다. 여기서 모든 신들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모든 신적 존재들, 가령, 태양, 달, 별, 강, 동물 등을 가리킵니다. 이 존재들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일 뿐입니다.
4-5절은 크신 하나님의 주권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4–5).”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포괄적입니다. 땅의 깊은 곳과 산들의 높은 곳은 마치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처럼 땅의 모든 곳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땅의 깊은 곳은 아마 죽음의 세력이 임하는 곳을 가리키거나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리고 아무도 갈 수 없는 깊은 곳을 가리킬 것입니다. 산들의 높은 곳은 고대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다른 영들, 신들, 여신들이 거한다고 생각하는 곳이고, 물리적으로는 산의 정상으로 아무도 이를 수 없을 땅의 가장 높은 곳, 땅의 깊은 곳의 상극을 가리킵니다.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혼돈과 악이 존재하는 거친 곳이라면, 육지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 바다와 육지 또한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손이 지으셨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못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여기까지가 첫번째 예배의 부름입니다.
B. 두번째 부름 (6-7a; 출 19:5-6; 요 10:14-15)
이제 두번째 부름이 이어집니다. 6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 첫번째 부름이 일반적이라면, 두번째 부름은 특별합니다. 6절에는 예배를 상징하는 세 단어가 나옵니다. ‘굽혀’는 예배할 때 존경심을 표시하는 복종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경배하며’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몸을 땅에 엎드리는 자세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자’는 예배의 태도를 고조시킵니다. 여기서 예배와 복종의 대상은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이십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는 창조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언약적 관계라는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언약의 공동체 곧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신 것을 가리킵니다(출 19:5-6). 제가 두번째 부름은 더 특별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7절 상반절에서 발견됩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7a).” 그저 크신 하나님과 그 주권이 미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성도와 맺어 주신 언약의 관계 때문입니다. 크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고 그가 친히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땅에 육신으로 오셨을 때,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4–15).”
하나님은 단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셨고 구원하셨으며 친히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굽혀 경배하며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고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이것을 생각하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자기 백성에게 헌신하시며 전념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할 더 나은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2. 예배적 삶을 살라는 경고 (7b-11; 출 17:1-7; 민 20:1-13; 히 3:7-4:7)
이제 95편의 후반부로 들어갈 텐데, 여기서 전반부의 부드러운 초청은 정신이 번쩍 들만한 경고로 바뀝니다.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7b–8).” 이 경고는 무서운 말씀으로 마칩니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11).”
앞에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이 후반부의 기능은 예배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뻐하고 살아가는 언약 백성이 가지는 언약적 책임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8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시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과거 이스라엘 역사의 두 사건을 소환합니다. 므리바와 맛사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을 완악하게 한 일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시험하고 조사한 일이었습니다(9). 첫 사건은 출 17:1-7에, 두번째 사건은 민 20:1-13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두 사건은 매우 유사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두 사건이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난 동일 사건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두 장소에서 일어난 두 사건일 개연성이 큽니다. 출애굽기 17장의 므리바는 시내 반도 남단, 신 광야에 있는 르비딤 근처의 장소이고, 민수기 20장의 므리바는 가나안에 가까운 가데스 광야의 므리바입니다. 다만, 두 사건이 동일하게 하나님을 시험하고 다툰 사건이기에 므리바, 맛사라고 불립니다. 므리바는 ‘다투다’라는 뜻이고, 맛사는 ‘시험하다’라는 뜻입니다. 먼저 출 17:1-7에 기록된 첫 사건은 광야 생활의 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서 백성은 물을 달라고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백성은 모세와 다투었지만, 사실은 이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민수기 20:1-13에 기록된 두번째 사건에서도 마실 물이 없어서 백성은 모세와 다투어 온갖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라고 분명하게 기술됩니다(민 20:13). 그들은 광야에서 많은 기적과 공급하심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절하고 그분께 도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 그들을 살려 두신 하나님의 뜻에 도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라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시인은 이때와 같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은, 내 욕구와 내 현실을 증거로 내세워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더 넓게는 자기 의를 보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일은 무지의 문제 혹은 말씀의 의미를 몰라서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아멘!)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고집스러움이고 의지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가벼운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결과를 10-11절에서 보여줍니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10–11).”
하나님은 그들 때문에 근심하셨습니다. ‘근심하여’로 번역된 말은 ‘역겨워하다, 질색하다, 혐오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미혹된 상태 즉 갈팡질팡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노로 맹세하여,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차적으로 이 경고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그래서 광야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이차적으로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그 땅에 들어가 거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와 공급을 영적으로 누리는 안식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 회원으로 속한다고 할지라도, 그 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들의 광야 경험을 기념하기 위해 장막을 치고 지내는 초막절에 이 말씀이 선포되었다면,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말로 들렸을 것이고 그들은 결코 조상들이 겪은 일을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것을 다시 놀랍게 해냈습니다. 그는 3:7-4:7에서 시편 95을 네 번이나 인용함으로써 1세기 자신의 독자들을 향하여 경고합니다. 특히 7-8절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인용했고, 11절도 두 번 인용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시편의 주제를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국한시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7절에서 말하는 '오늘'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며, 언제나 현재의 그 시간을 가리킵니다.


3. 교훈과 적용 (마 11:28; 히 4:3; 히 3:12-13; 10:24-25; 마 4:1-11)
시편 95편의 주제는 예배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모든 독자를 초청합니다. 온전하고 합당한 예배는 예배 시간에 예배당에 있는 것을 넘어, 그 말씀에 마음을 다하여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배와 삶은 나뉠 수 없습니다. 참된 예배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그 온전한 예배로서의 삶은 예배 가운데 들은 하나님의 음성/말씀에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않고 순전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인내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 이 본문을 인용했습니다. 히브리서는 믿는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서신입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핍박 속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유대교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과 핍박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 그들의 믿음을 붙들어줄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다면(믿음의 인내) 궁극적으로 그들은 약속된 안식, 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는 삶을 보증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다가오는 약속된 기업에 참여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는 자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을 때 이 땅에서 부분적인 성취를 맛보지만(마 11:28; 히 4:3) 장차 오는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믿음으로 끝까지 순종하며 견뎌야 합니다. 인내와 순종은 참된 믿음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모든 예배자는 므리바와 맛사의 일을 기억하고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영원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결정합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브리서 3:12–13).”이 경고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일 때 자신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지원의 원천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10장까지 끌고 가면서, 우리가 서로에게 은혜의 도발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인도합니다(히 10:24-25). 우리는 힘든 시기를 겪을 때 하나님의 음성에 불신앙으로 반응하기 쉽습니다. 더욱이 죄는 매우 교묘하여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는 데 쉽게 성공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짐을 지고, 영적인 격려를 제공하고, 때로는 책망하며 경건한 믿음의 모범을 보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패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신 후에 마귀가 유혹을 했지만, 광야의 이스라엘 조상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셨고, 당신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아들임을 보여주셨습니다(마 4:1-11).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고 우리의 선구자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완악하게 되려고 할 때, 여러분이 모든 상황에서 온전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주목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 말씀 앞에 다시 부드러운 마음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안식을 맛보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배와 삶은 분리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