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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5).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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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5).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

시편 15:1-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9-06

말씀내용
1. 칭의의 열매
본문은 1절의 질문과 2~5절의 대답으로 된 문답 형식의 시입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성도의 표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내가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에게 맺어져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누가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르며 하나님의 성산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 수 있는 자인지 묻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를 묻는 칭의의 방법에 관한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의 중추입니다. 이 시가 다루는 것은 그렇게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이 어떤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지고 싶은 갈망이 생기고,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율법을 따라 살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을 이해하지 않으면, 본문은 마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말씀으로 잘못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시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살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묻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사람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시가 절기에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이 성전에 들어갈 때 성전 문지기가 묻고 대답하는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해주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려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회개하지 않는 죄는 구원을 취소시키지는 않지만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본문은 가르칩니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특징들
2~5절은 1절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대답들은 대구법으로 두 개의 특징들이 짝을 이루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A.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2a)
제일 먼저 그들의 행위입니다. ‘정직’이라는 말은 본래 희생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이 ‘흠이 없고 온전’해야 한다고 할 때 쓰이는 말입니다. ‘손상되지 않은, 흠이 없는, 온전한’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이런 제물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예배자를 대신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 자신은 얼마나 더 흠이 없고 온전한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정직하게 행하여’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공의를 실천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일을 행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것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을 알아주지 않으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7:22~23). 대신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 25:37~39)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알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그분은 사람들이 칭찬했던 그 모든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B.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2b~3a)”
두 번째로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사람의 특징은 말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2b~3a)”라고 했습니다. 먼저 ‘마음에 진실을 말한다’고 할 때, ‘진실’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뜻도 가지는데, 이 말은 조금 더 나아가 ‘믿을만 하다, 신뢰가 간다’는 의미로 어떤 진술이나 사람에 대해서 사용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참되시다고 하고, 예수님은 진리라고 하고 또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고 할 때, 이 모든 말은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진리, 참된 것만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말에 대해 많은 교훈과 경고를 줍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지옥 불이 많은 인생을 불살라버리는 것에 비유하여 혀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약 3:6).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진리)을 말하라”고 가르쳤습니다(엡 4:15).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 처럼, 진리 곧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빈말이나 내용 없는 칭찬,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나 아첨 등을 버릇처럼 하고 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 처럼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말함으로써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좀 더 나아가 말로써 부정적인 일을 하지 말 것을 가르칩니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입니다. 개역성경에 ‘참소한다’는 말로 번역된 부분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마귀의 주요 특징으로 묘사되는 용어입니다. 이 말은 ‘정탐하다’는 의미인데 은유적으로 ‘뒤에서 험담하다’ 또는 ‘중상(모략)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들은 스파이처럼 자신의 악의를 감추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단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뒤에서 과장하여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사실이 아니라면 거짓말이기에,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해도 형제에게 치욕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죄와 비교해볼 때, 하나님의 교회에 가장 큰 해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교회 역사와 우리의 경험이 증거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도 사도들은 이런 문제를 유난히 많이 다루고 경계한 것입니다.

C.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3b)”
이것은 앞에서 다룬 특징에서 좀 더 나아가 이웃에게 누명을 씌우고 실제적인 악을 행하는 문제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중상하고 참소하는 말은 그 말들을 사람들이 곧이 듣고 믿고 판단하고 그것을 전함으로써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리처드 턴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너무 쉽게 들어서는 안 되고 더군다나 형제에 대한 나쁜 소문을 그대로 믿어서도 안 된다.” 이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분별하라는 말이 아니라 신중하라는 권면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무분별하게 형제에 대한 나쁜 소문을 쉽게 믿고 전파함으로써 형제에게 악을 행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런 삶 속에서는 결코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릴 수 없습니다.

D.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4a)”
네 번째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자의 특징은 인간 관계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또 어떤 사람을 멀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사귄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렇지 않은 자를 멸시한다고 말합니다. 야보고서에서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한 것은(약 4:4)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사귀며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자를 가까이 하고 사랑하며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자의 결혼 문제에도 의당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의 눈이 망령된 자’를 멸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그의 눈이 망령되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기호는 그의 신앙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경건함이 사람이 갖춘 어떤 것보다 귀한 매력으로 보이십니까? 만일 성공하고 유명한 사람이 그것 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E.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4b)”
사실 이 말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구법으로 표현된 두 특징의 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언제나 이룬다. 심지어 자기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때에도 서원을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진실성(integrity)에 관한 문제입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하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급박할 때 하나님께서 문제만 해결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약속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상황이 호전되면 자기가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거나 약속을 일방적으로 변경합니다. 신자들의 말은 믿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되고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분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취할 도리입니다. 야고보서 5장 12절을 봅시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맹세나 서원은 신중하게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완전한 항복 하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제삼계명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모든 형태의 맹세나 서원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믿을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식에서 서약을 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거나 교회의 회원이 될 때, 그리고 임직을 할 때도 서약을 합니다. 이런 서약을 언제 했냐는 식으로 무너뜨리는 일이 어디서나 벌어집니다. 서원은 자발적인 하나님께 대한 약속이고 약속의 성격을 가진 맹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원이나 서약을 할 때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원을 한 것이 설령 해로울지라도 하나님께 드린 약속이기에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외가 있다면, 그 서원을 지키는 것이 입다의 서원에서와 같이 죄를 짓는 경우가 될 때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5장 5절은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그 말에서 믿을만한 진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F.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5a)”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의 특징은 돈과 관련된 태도입니다. 돈에 대한 태도는 회개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사람은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마 6:24). 율법은 형제(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합니다(출 22:25~27; 레 25:35~37; 신 23:19). 형제의 곤궁한 처지가 내가 돈을 버는 기회가 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의 도리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형제 관계를 돈 관계나 이익의 관계로 생각하는 모든 형태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자기 비즈니스를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교회 안에서 피라미드식 영업 관계를 맺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 관계에 돈이 개입되는 것은 여러 모로 우리의 죄성을 지나치게 가볍게 여기는 위험한 태도입니다. 본문은 뇌물의 문제도 언급합니다. 뇌물은 선물과 다릅니다. 뇌물은 일하기 전에 주는 것이고, 선물은 일한 후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는 것입니다. 뇌물은 정의를 굽게 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율법은 뇌물을 주거나 받는 것을 금합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 정의를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에 의해 굽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일 수 없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한 마디로, 이것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이냐, 행위냐?
본문이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 대해서 말합니다. 본문은 이런 일을 ‘읽는 자’나 ‘듣는 자’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시는 마치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달려 있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결코 아무런 행위의 열매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순종이라는 행위로 자신을 증거합니다. 본문과 같이 어떤 선행을 하라고 명령하거나 어떤 덕을 칭찬하는 말씀들이 나올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믿음을 전제로 한 것임을 즉각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 우리는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또 주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요 15:5). 이 점에서 믿음은 선행?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모든 순종의 행위?의 모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버나드의 말입니다. “우리의 선행이 우리를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게 하는 근거는 아니지만, 우리는 선행의 길을 따라서 성산에 올라가야 한다.” 여러분이 참된 믿음에 서 있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순종으로, 그 선행으로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며 하나님과 사귐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근거는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었고, 의롭다함을 얻는 자로서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성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산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