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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5). 새 하늘과 새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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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5).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 21:1-4, 베드로후서 3:12-13, 레위기 26:1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6-13

말씀내용
우리는 드디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단락인 결론부에 도착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21:1-22:5이 결론부이고, 22:6-21은 에필로그입니다. 결론부의 주제는 완성된 천국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으로는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슬픔이 없는 새로운 질서, 금과 보석으로 빛나는 영원한 성,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종들의 기쁨(22:4), 에덴동산을 연상하게 하는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22:1-2) 등이 있습니다. 이 결론부는 단순히 요한계시록의 결론부가 아니라, 창세기로 시작한 성경 전체의 결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22장은 창세기의 앞 부분과 많은 점에서 대응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죄로 말미암아 망가졌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 천국이라는 주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바라보아야 할 소망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고 문제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소망은 언제나 천국에 있어야 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천국은 이루어질 수 있는 개연성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확실성을 보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1세기 말의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이 말씀이 보여주는 장래의 영광스러움은 모든 고난을 감내하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반드시 믿음으로 말미암은 고난이 있어서 만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영광은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빚어 주실 영원한 나라에 있다는 것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많은 사람에게 가장 많이 오해 받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국에 대한 성경의 묘사가 상징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피해서는 안 될 주제이고, 또 성경이 말씀하는 만큼은(그것이 우리가 믿을 충분한 근거입니다) 알아야만 합니다. 몇 주일에 걸쳐 우리가 상고할 이 본문을 통해서 천국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점검해보고 더욱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새 하늘과 새 땅 (1; 사 65:17; 66:22; 벧후 3:13; 롬 8:21-23)
본문에서 요한이 보는 환상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1절은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신천신지(新天新地)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천국입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1-3장에서 1세기 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 영적 분투를 하고 있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칠중심판 시리즈도 보았습니다. 17-20장에서는 큰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 현세를 종결 짓는 최후의 사건들인 천년왕국,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의 지향점이 바로 본문에서 보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에서 빼놓지 않고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을 말씀하셨는데, 그 약속하신 상급들이 모두 이 결론부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상급이고 보상이라기 보다, C.S.루이스의 말대로, 이 땅에서 그들이 따라 살았던 제자도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푸른 초장이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든 주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계 14:4) 길의 끝에서 이 천국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행보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행보이고 여정이 맞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실 새 하늘과 새 땅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예언을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으로 끝마쳤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7)…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66:22).” 사도 베드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13).”
여러분, 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왜 필요했습니까? 만일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첫 창조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심각하게 망가졌고 그래서 온 세상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기만을 신음하며 기다리게 되었습니다(롬 8:21-23).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필요로 하게 된 이유입니다.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자,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게” 된 것을 봅니다. 먼저 ‘바다가 다시 있지 않다’는 것부터 생각해봅시다. 바다는 요한계시록에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적대적이며, ‘사망과 음부’와 같은 맥락에서 바다가 등장합니다(20:13). 용은 성도들과 싸우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고(12:18) 짐승은 바다에서 나왔으며(13:1) 큰 음녀는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17:1). 또 바다는 죽은 자들의 거처로서(20:13) 우상숭배적인 교역의 주무대이며(18:10-19)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는 영역(5:13; 7:1-4; 8:8-9; 10:2, 5-6; 14:7; 16:3)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다가 다시 있지 않더라는 말씀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악과 관련된 역사가 영원한 천국에서는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탄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와 그들을 추종하던 모든 세력이 다 불못에 던져졌기 때문에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현재의 세상은 사라지고 마는가? (벧후 3:12-13; 계 20:11; 막 13:31; 롬 8:21-22; 마 19:28; 행 3:21; 계 21:5; 빌 3:21)
사실,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부분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의 세상이 완전히 소멸되고 새롭게 창조된 세계로 대체된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현재 세상의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망가진 것들을 정결하게 하여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까? 전자를 완전소멸이론이라고 하고, 후자를 갱신이론이라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3:12-13을 볼까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12–13).” 이 말씀은 어떤 해석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요한계시록 20:11에서는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주님께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막 13:31)”고 하신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 구절들은 완전소멸이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갱신이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먼저 로마서 8:21-22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서 8:21–22).” 여기서의 강조점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는 것이지, 피조물들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마태복음 19:28)”라고 하셨을 때, ‘새롭게 된다’고 말씀하셨고,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사도행전 3:21)”고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1:5에서도 주님께서 친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마 많은 성도들이 완전소멸이론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이유는 코르넬리스 비네마가 지적하듯이, 기독교인들의 일반적 신앙관이 창조세계의 선함에 대해서 부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처음 창조 사역이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것이었듯이 구속 사역도 하늘과 땅을 아우른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만물—창조 세계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다고 말씀하셨던 그 창조 세계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이 되지도 않을 만큼 말입니다(사 65:17).
완전소멸이론이냐, 갱신이론이냐 하는 것의 쟁점은, 현재의 세상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되는 천국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가, 아니면 완전한 불연속성 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성경 구절들을 고려할 때, 그리고 비슬리-머레이가 지적하듯이 문맥상 요한의 관심이 물리적인 지리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완전소멸이론을 주장하는 루터교와는 달리, 개혁신학은 갱신이론을 지지합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인 벨직 신앙고백서(1561)는 “이 옛 세상을 깨끗이 하기 위해 불태울 것이다.”라고 서술합니다. 그렇다면 갱신이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먼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할 때, ‘새(로운)’는 헬라어로 ‘καινός’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시간적 새로움을 의미하는 ‘νέος’라는 단어와 달리, 질적 새로움, 본질적 새로움을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 질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강조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세상의 새로와짐은 육체 부활의 성격과 유사합니다. 부활을 통해 입을 육체가 육체로서 연속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새로운 질적 차원을 가지는 영화로운 육체가 되는 것처럼, 세상의 새로와짐도 이런 연속성을 가지면서 새로운 차원을 입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한 몸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립보서 3:21).” 세번째 근거는 안토니 후크마의 지적인데,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세상을 소멸하셔야 한다면 사탄은 큰 승리를 거두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용입니다. “(완전소멸이론에 따르면) 사탄이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의 창조세계는 치유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으며 하나님도 병든 우주를 어떻게 다루실 수 없어서 결국 완전히 소멸하시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탄은 이런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반대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사탄의 결정적 패배의 클라이막스는 하나님께서 사탄이 그토록 부패시키려고 힘썼던 바로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사탄의 악한 음모의 결과들을 이 땅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하실 바로 그 때이다.”(『개혁주의 종말론』CLC(2002), pp.394-395).
그렇다면 베드로후서 3:12-13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 본문은 노아 홍수 심판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베드로후서 3:6).” 홍수를 통해서 세상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범죄한 인간들과 그 흔적들을 심판하고 정결하게 함으로써 세상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주님의 재림 때에도 부패한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여기 사용된 표현들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주님의 재림으로 시작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연속성을 가진다고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그 연속성이 얼만큼이고, 불연속성은 얼만큼이다라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 여기까지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3.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2; 엡 5:22-33; 계 19:7-8; 고전 3:16-17)
2절에서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2절에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요한이 본 새로운 세상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고, 그것이 천국입니다. 바벨론의 특징이 큰 성이었다면, 새 예루살렘의 특징은 거룩한 성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차이를 보여줍니다. 세상은 언제나 크기를 추구하고 크기로 평가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완전하고 영원한 상태에 있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 비일은 “예루살렘 성의 이미지는 실제로 새 하늘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이 나누는 교제를 나타내는 비유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 성의 이름이 ‘여호와 삼마’(여호와께 거기 계시다)가 되리라고 예언하였던 바로 그 성입니다(겔 48:35). 이 성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21:11-21에 나오는데, 이것은 에스겔과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반영합니다.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성의 기원이 하늘임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자발적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형성하시는 교제이며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앞에서 요한계시록은 하늘 성전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왔었는데(7:15; 11:19; 14:15; 15:5-6, 8; 16:1,17), 이제는 그 하늘 성전이 성의 형태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성도들의 영원한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묘사를 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준비하다’라는 단어는 인간의 행동보다 주로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킵니다(9:7,15; 12:6; 16:12). 물론 여기서도 준비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 5:22-33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였듯이,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거룩한 교회, 새 예루살렘으로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구속하고, 교회를 의롭게 하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교회를 영화롭게 하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입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아름다운 모습은 11-21절에서 자세히 묘사되는데, 그 단장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가리킵니다(계 19:7-8). 이 영화롭게 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이 신부 이미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큰 음녀 바벨론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그들이 거할 장소인가? 답은 둘 다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성도들이 거할 미래의 집이기 이전에, 성도들이 누릴 미래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것은 온전하고 영원한 상태에 들어간 교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그리고 21:9-10에서 말씀하듯이, 새 예루살렘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또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3절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는 장소로서의 새 예루살렘을 암시하고 7-8절에서는 불신자들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는 대신, 성도들은 이기는 자가 되어 이 성을 상속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장소적 의미를 보여주는 언급들입니다. 만일 어떻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어떻게 동시에 장소와 백성을 의미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이것이 묵시문학이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언약이 성취되다. (3-4; 레 26:11-12; 요 1:14; 사 51:11)
3절을 보면, 보좌에서 나오는 큰 음성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그것은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는 음성인데, 이 음성은 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언약이라는 기본 주제가 성취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 언약의 약속은 이것입니다.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위기 26:11–12).”
이 약속은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거듭 주어진 말씀이었고(출 29:45; 렘 31:33; 겔 37:27), 실제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유형화된 하나님의 임재는 성막과 성전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고 했는데,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동사는 구약 성막을 치고 거하신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 3절의 ‘계시리니”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옴으로써,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람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주요 특징이 하나님의 임재이며, 모든 성도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교제가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어지는 4절은 영원한 언약이 성취될 때 성도들이 누릴 유익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눈물을 닦아주시고 사망이나 애통함,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부정적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 핵심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슬픔과 고난이 제거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제일 먼저 주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눈물은 특별히 믿음과 가진 증거를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희생하면서 흘린 눈물,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으로 인해 땅에서 흘렸던 고통의 눈물(로버트 마운스)’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슬픔의 원천이 제거된 곳입니다. 사망, 애통, 곡함, 그리고 아픔은 모두 죄의 결과로 이 땅에 들어온 것들입니다. 사망은 죄의 첫번째 결과이고(롬 5:12; 약 1:15) 애통과 곡함과 아픔은 사망의 전조들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처음 것들인데,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질 때, 다 지나갈 것입니다. 이것들이 다 제거된 상태는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된 상태, 몸의 속량이 일어난 상태입니다(롬 8:21-23). 사망과 애통과 곡함과 아픔이 사라진 자리에, 행복과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상태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이사야 51:11).”


5. 교훈과 적용 (히 11:10, 16)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영웅들이 믿음으로 바라보았던 실재였고 소망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브리서 11:10)…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6).”
여러분도 믿음의 눈으로 그 본향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사십니까? 그래서 믿음을 지키느라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닦아 주실 눈물 말입니다. 본문은 천국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내려오는 것이지 우리가 천국에 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는 천국은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연속성을 가지지만, 비할 수 없이 다른 차원의 완전하고도 새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미혹하는 큰 음녀이자 큰 성 바벨론의 매력에 푹 빠져 살아갈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바벨론과 비교할 수 없이 매력적인 성을 보여주십니다. 그 성의 매력은 바벨론의 강력한 유혹을 거부할만한 동기를 부여해줍니다. 무엇보다 그 성의 특징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사귐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성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이 성은 분명히 미래에 속해 있고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이지만, 이미 지금 성령님 안에서, 그 말씀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가족이라는 사실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펼쳐지게 될 본향을 늘 사모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맛보게 하시는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