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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3). 두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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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3). 두 초청

요한계시록 22:17, 이사야 55:1, 고린도전서 16: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8-15

말씀내용
오늘 우리가 살펴볼 17절은 주님의 재림의 임박성에 초점을 맞춘 말씀인데, 비교적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오라’는 내용의 초청이 네 번 나옵니다. 먼저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는 ‘오라’이고, 둘째로는 듣는 자가 말하는 ‘오라’입니다. 셋째로는 목마른 자를 부르는 ‘올 것이요’이고, 넷째는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초청입니다. 이 초청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개역개정역이 따른 해석인데, 이것은 네 차례의 초청 모두 동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초청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해석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 두 번의 ‘오라’는 초청은 주님을 향한 것이고, 나머지 두 번의 초청, ‘올 것이요’와 ‘받으라’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대로, 처음 두 초청이 주님께 대한 ‘오라’는 말이라면, 우리는 ‘오라’ 대신 ‘오소서’ 혹은 ‘오시옵소서’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읽는다면, 이 구절은 우리가 기존에 읽던 방식과는 다른 뜻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 이 결정은 서로 다투어야 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문법이나 문맥상, 두 해석이 모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후자의 입장에서, 오늘 이 말씀을 강론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두 초청’입니다.


1. 첫번째 초청: “오시옵소서!” (17a; 롬 8:16; 요 14:16; 15:26; 16:14)
먼저 첫번째 초청이 있습니다. 17절은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라고 시작합니다. ‘성령과 교회’라는 표현을 주목해 봅시다. 여기서 성령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들을 가리키기 보다, 성령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성령님은 그 말씀에 영감을 주신 분이고(2:7) 또 예언의 영이라고 불리시기에(19:10) 이 둘 사이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신부는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교회를 가리키는데, 특별히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완성된 교회와 관련이 있습니다(21:9-10). 그 모습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21:2). 그랜트 오즈번은, 신부는 승리 속에 들어가 영생을 상속받을 모든 자로 구성된, 최후의 완성된 교회에 대한 문학적 비유 언어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신다는 말은, ‘성령으로 충만한 신부인 교회가 말한다’거나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가 말한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님과 하나가 되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의 설명이 이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성령께서 오라고 하시고 신부가 오라고 한다고 하지 않고,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기를’이라고 한 것은, 교회가 오라고 외칠 때 성령께서 교회 옆에서 말씀하시고, 교회가 그리스도께 오라고 외치는 것은 그렇게 외치도록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말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도는 언제나 공동의 활동입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는 소원을 적고, 그 다음에 우리가 그 소원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바람과 믿음을 떠나서 간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의도하며 간구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그렇게 하도록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교회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로마서 8:16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하시듯이 말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오라”고 말씀합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주님을 향한 말이라면, ‘오소서’ 혹은 ‘오시옵소서’라고 읽어야 합니다. 17절 상반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는 근거는 17절 상반절이 바로 앞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성령과 교회의 응답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12절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선언하시고(13) 신자와 비신자들에게 각각 격려와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13-14). 그리고 다시 주님은 자신이 다윗의 뿌리요,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16). 이제 교회가 응답할 차례인데, 사도 요한은 단순히 교회가 아니라, 성령과 신부가 응답하는 것을 봅니다. 신부는 영광스럽게 완성된 교회, 성령님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신부는 “오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성령님이 응답하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어 그들과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었습니다(요 14:16). 보혜사 성령님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한복음 15:26).” 이 성령님께서 그리스도께 “오소서”라고 교회와 함께 부르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수 없습니다. 리처드 필립스의 말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정혼한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 돌아와 혼인잔치를 기다리며 신랑에게 “오소서”라고 부른다. 앞에서 주님이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시자(7,12)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오소서!”라고 응답한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응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20)!”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뜨겁게 주의 재림을 열망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죽으시기 전에 보혜사를 약속하시면서 그가 오셔서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요 16: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는 어떻습니까? 이것도 주님을 향한 초청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듣는 자도 오시옵소서 라고 할 것이요”라고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듣는 자’는 누구입니까? ‘듣는 자’도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인 신부가 듣는 자인 교회를 향해서 말한다는 것은 조금 어색해 보일 수 있지만,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문학의 장르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랜트 오즈번이, ‘신부’가 최후의 완성된 교회를 상징한다면, ‘듣는 자’는 현재의 교회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즉 듣는 자는 1:3과 22:18에서 예언의 말씀을 듣는 교회이고 2-3장에서 편지의 말씀을 듣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라고 주님께 응답하는 말을 듣는 자도 화합하여 ‘오시옵소서’라고 주님을 부릅니다. 듣는 자가 말하는 ‘오소서’라는 외침에 대한 찰스 스펄전의 말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 외침은 여러분이 신부에게 속했다는 표시가 될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성령과 신부와 함께 ‘오소서’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한 성령을 받았고 한 몸에 연합하였음을 보여주는 표시가 될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결코 바라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에게서 달아나고 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모든 듣는 자를 향한 도전입니다. 여러분은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라고 주님을 향해 부르는 음성을 들으십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듣는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성령과 신부와 합하여, ‘오시옵소서’라고 주님께 외치십니까? 그런 심정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부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앞의 두 초청을 그리스도를 향하여 “오소서”라고 부르는 초청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찰스 스펄전, 번 포이트레스, 조엘 비키, 스티븐 스몰리, 리처드 필립스, 송영목 등 입니다. 이 해석의 입장에 서 있는 번 포이트레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입장을 정리하겠습니다.
“성령은 “오소서!”라는 기도로 교회를 인도한다. 즉 기도의 내용은 “오소서 주 예수여!”이다(20절). 신부 곧 교회(19:7; 엡 5:22-33)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기도와 갈망을 수용한다(롬 8:15-16). 요한계시록은 목마른 자에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오라”고 권고한다. 이것 때문에 어떤 해석가들은 “오라”의 모든 사용은 목마른 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보았다. 그러나 재림을 기대하는 분위기는 “오라”의 첫 두 사용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갈망하여 그에게 한 말이다. 그렇다면 목 마른 자의 초대는 놀라운 급진전이다. 그러나 가까이 옴이 “오라”의 첫 두 사용에 의하여 역설된 것과 같이 이것은 재림의 가까움이 임박하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회개를 위한 문은 열려 있다. 초대는 모두 그리스도를 이미 신뢰하는 자들과 여전히 반역하고 있는 자들에게로 확대된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아직도 시간이 있을 때에 주님께 오라.”
이 말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두번째 초청으로 인도하여 줍니다.


2. 두번째 초청: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17b; 사 55:1; 시 42:1-2; 눅 23:40-43; 요 6:37)
이제 우리는 17절의 하반절,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말씀을 상고할 차례입니다. 이것은 두번째 초청입니다. 여기서 ‘올 것이요’와 ‘받으라’는 초청의 대상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것은 문장 안에서 분명하게 그 대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목마른 자’와 ‘원하는 자’입니다. 이 복음 초청은 이사야 55:1로부터의 인유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본문에서 이 말을 하는 화자(話者)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신부일 수도 있고, 주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가 누구든지, 그 의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여기서 ‘목마른 자’와 ‘원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목마른 자가 생명수를 원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가리키는 것은 신자입니까, 비신자입니까? 물론 건전하고 뛰어난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본문 안에서 목마른 자가 신자인지, 비신자인지를 명시하거나 암시 조차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목마른 자가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포함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신자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신자들에게 와서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라는 초청은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교제로 초청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시편 42편 기자의 고백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편 42:1–2).” 이런 갈망은 참된 신자 안에서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갈망입니다. 이와 같이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목마른 자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강력하게 원하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초청은 또 다른 의미에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신자가 언제나 바른 말씀 안에 굳게 서서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2-3장에서 보았듯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교리에는 옳았으나 사랑에서는 실패한 교인들이 있었고,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에는 니골라 당이나 거짓 선지자 이세벨의 다른 교훈에 유혹을 받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또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심각하게 회개하고 돌아서야 하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교인들이 신앙을 적당히 타협하며 짐승의 표를 받고 경제적 손해와 박해를 피하면서 살아갈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거짓 신자들이 있었겠지만, 설령 교인일지라도 실상 복음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인이지만 체험적 신앙을 거의 알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은혜를 받았지만, 지금은 그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다 목마른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들 모두에게 너희가 나를 더 즐거워하고 그 복음의 유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이들 모두를 초청하십니다. 기독교의 주변에 머물러 살아가는 자들에게 더 깊은 헌신으로 들어오라고 촉구하는 부름이기도 합니다. 원하기만 하면,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초청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 ‘이게 내 이야기구나’ 하는 분은 없습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목이 마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만족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즐거워하며 그 감격 안에서 살아본 지 오래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목마른 자입니다. 주님은 목마른 자들을 부르십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고 부르십니다. 목이 마르고 원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초청은 비단 신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레고리 비일 같은 학자는 이 초청은 세계 전체를 향한 제약 없는 초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라고 이해하지만, 이 해석에 대한 확정적 근거는 본문 안에서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세상의 모든 비신자들을 포함하는 초청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는 요한계시록의 큰 주제 가운데 하나이고, 여기서 우리는 그 주제가 부각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목마른 인생입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가운데, 지금 영상으로 예배에 참여하시는 여러분 가운데, 아직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인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았고 그분을 신뢰하여 살아가고 있지 않은 분들에게 말합니다. 목마르십니까? 원하십니까? 이 생명수를 얻기 위해 여러분이 치러야 할 대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목이 마른 것을 알고, 그것을 원하는 것이 여러분이 생명수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이 초청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여기에 생명수를 얻기 위한 어떤 조건이 필요합니까? 스펄전은 코끼리도 들어갈 수 있는 문들이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 문들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가 값없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누구도 이 문으로 들어가 생명수를 받는 자들을 제지할 권세가 없습니다. 목마른 자, 원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이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이 문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닫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설 것이며,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선명하게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했습니다(눅 23:42). 그가 한 일, 그가 한 말은 반대편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할 때, 그를 꾸짖어 말한 것 뿐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누가복음 23:40–41).” 이 강도가 구원을 받기 위해 치룬 값은 그야말로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선언하여 주셨습니다(눅 23:43). 그 사람은 목이 말랐고 원했으며 그래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 마셨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도, 너무나 흉악한 죄인이어서 혹은 그 어떤 이유로도 거절 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오, 주님! 저는 목이 마릅니다. 제게 이 생명수를 마시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는 주님이 아니면 영벌을 면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저를 기억하여 주옵소서!”라고 구하십시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주님은 결코 멸시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 6:37), 주님은 이런 은혜를 구하며 나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이 말씀을 믿고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3. 교훈과 적용
‘두 초청’에 관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무엇을 교훈하셨습니까? 여러분이 회개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믿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A. 재림 대망 공동체 (고전 16:22)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에서 세 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7,12,20). 이 말씀에 대하여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감동하여 “오시옵소서!”라고 주님을 부르게 하십니다. 교회는 주의 재림을 대망하는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공동체가 맞는지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왕국을 세우기라도 할 것 인양 비추어지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오소서, 주님!”이라고 부르짖는지 말입니다. 모일 때마다 “마라나다!”라고 인사했던 초대교회 공동체처럼(고전 16:22), “오시옵소서!”라고 구하는 주의 재림을 대망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B. 선교 공동체
주의 재림을 정말 대망한다면, 우리는 또한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세상을 향해서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위하는 일을 시작하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바란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것입니다. 주님이 정하신 수가 찰 때 주님이 오실텐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을 향해 “오라, 와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초청할 것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은 신실하게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 공동체임을 기억하고 그대로 행하십시다.
C. 모든 것의 원천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마셔라 (요 6:54; 계 3:20)
생명수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목마른 인생을 해갈 시켜 주실 분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선한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들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저의 사역의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원천은 성실함도, 지식도, 실력도 아닙니다. 그 원천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도 똑같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없는 인생, 그리스도 없는 사역은 결코 채워질 수도 없고 만족이 될 수도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한복음 6: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 마음 문을 열면 내가 네게로 들어가 너와 더불어 먹고 너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계 3:20). 목마른 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이 초청을 듣고 나아오는 사람은 그가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심지어 거짓 그리스도인이었든 상관없이 생명수인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고 또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중 그 누구도 이 자비로운 초청에서 제외될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이 초청의 말씀을 들은 여러분, 지금 생명수가 되시는 주님께 나아와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