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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9). 억울한 자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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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9). 억울한 자의 기도

시편 109:1-31, 예레미야 18:18-23, 베드로전서 2:19-2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5-08

말씀내용
시편 109편은 어떤 이들에게는 읽기 조차 거북하다고 느낄 수 있는 시편입니다. 낸시 드클라이세-왈포드는 109편은 그 신랄한 언어 때문에 교회에서 사실상 외면 당한 시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 ‘억울한 자의 기도’가 충분히 정확하게 109편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우리의 경험 속에서 이 시편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게 하는 제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편에는 소위 저주 시편들이 있는데 69(24-28), 104(35), 109(7-10), 137(8-9), 139(19-22)편들입니다. 이중에서도 109편은 대표적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이 저주 시편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기도로 만들 수 있는가 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시편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말입니다. 먼저 본문을 살펴본 뒤에 이 질문을 다루어 보도록 하지요.


1. 정황과 구조 (삼하 16:5-14; 삼상 21:22; 22:9; 삼하 15:12-31)
109편은 다윗의 시라고 되어있는데, 어떤 상황에서 썼을지 생각해 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할 때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던 때에 지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삼하 16:5-14). 이외에도, 에돔 사람, 사울의 목자장 도엑의 배신 사건이나(삼상 21:22; 22:9) 또는 다윗의 모사였다가 압살롬의 반역 때 배신을 한 아히도벨의 사건(삼하 15:12-31) 등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109편이 어떤 특정한 상황—다윗이 매우 부당한 일을 억울하게 겪고 있는—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도 삶의 여정에서 이런 일들을 겪기도 하므로 이 시편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1-5절은 이런 기도를 촉발하게 한 상황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6-20절은 109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뜨거운 본문인데, 대적을 거스르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이어서 21-25절은 자신을 위한 간구이고, 이 전체 기도는 30-31절의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2. 이런 기도를 촉발한 상황 (1-5,30; 빌 4:6-7)
먼저 이 기도를 촉발한 상황을 보겠습니다. 1절에서 다윗은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라는 찬양으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비록 그 내용은 신랄하지만 기도가 찬양으로 시작하고 찬양으로 마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0절에서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30).”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임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바로 ‘잠잠하지 마옵소서’라고 자신의 위기 상황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힘들다고 고백합니다. 2-5절은 본격적으로 자기가 당한 상황에 대한 기술입니다.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2-5).” 한 마디로, 그들은 성품이 악하고 동기도 악의적이며 방식은 교활하고(거짓된 입, 속이는 혀), 다윗을 향해 이유 없는 부당한 적대감을 표출하는데, 정말 힘든 것은 그들이 다윗의 친구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사랑하나(4)’와 ‘나의 사랑(5)’이라는 표현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선을 행했지만, 그들은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4절에서 ‘나는 기도할 뿐이라”는 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가 기도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본래 이 말은 “그러나 나는 기도합니다.” 또는 “그러나 나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But I am a man of prayer (NIV)”라는 강한 뉘앙스를 가지는 말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기도입니다. 나의 원수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거짓된 말을 하며 나를 해치려고 할 때, 나는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느끼는지, 이렇게 고백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일 뿐 아니라, 성도들이 마땅히 취하는 방식이 아닙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


3. 대적자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6-20,31; 렘 18:18-23; 행 1:20)
109편에서 가장 어려운 본문은 6-20절입니다. 저는 이 단락의 제목을 ‘대적자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라고 붙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대적자들을 저주하는 기도’가 더 적합하지 않을지 반문하겠지만,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단락의 기도에서 ‘하소서’가 눈에 띄게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에게 이렇게 해달라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들은 실로 무시무시하지요. 가령, 10절에서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와 같은 ‘하소서’입니다. 어떤 성경 학자들은 이 내용이 너무 신랄해서, 이 내용은 악인이 다윗을 향해 퍼 부은 기도라고 해석함으로써 다윗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읽는 것은 결코 적절하거나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동의할 수 없습니다.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런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예레미야 18:18–23).”
이것은 분명히 다윗이 한 기도가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왜 이 내용이 대적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6절입니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6).” 사실 이 악인이 다윗에 대하여는 사탄의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사탄은 그 의미가 ‘고발자, 참소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탄(고발자)이 그 악인의 오른쪽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법정 이미지를 전제하는 말입니다. 법정에서 오른쪽에 서는 사람은 증인입니다. 사탄이 증인으로 서서 그 악인을 고발해달라고 다윗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반면, 3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증인이 되사, 이 억울한 거짓 증거에서 건져 주시기를 바라는 다윗의 마음이 표현된 고백입니다. 7절도 법정 언어입니다.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7).” 고발자는 무고하게 다윗을 참소하는 악인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무고한 고발, 고소가 끊이지 않습니다. 만일 이런 고발자들의 원대로 된다면 정의는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무서운 사실은 악인도 기도한다는 겁니다. 다윗은 그의 기도가 도리어 유죄로 판명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은 참된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8절은 베드로가 가룟 유다에 대하여 인용한 말씀인데(행 1:20), 이 인용은 본문을 해석하는데 실마리를 줍니다. 다윗이 벌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단지 개인적 모멸이나 개인적 원한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입니다. 이 왕을 대적하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에, 다윗은 정의가 실현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09편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자, 이제 9-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9-15).” 이것은 그 악인이 처벌을 받게 되면 일어날 일들입니다. 특히 15절 하반절에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라는 기도에는 악인과 그 후손이 땅에서 끊어질 때까지 땅은 결코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다윗은 16-19절에서 그가 이렇게 그 악인을 심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고(16-19) 다윗이 구하는 벌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그 악인이 범한 죄에 상응하는 내용입니다.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16).” 이 말은 악인이 근본적으로 선했지만, 어쩌다가 이 반역 행위에 가담하게 된 것이 아니라, 본래 악한 의도로 교활하게 이 일을 꾸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남을 저주하기를 즐겼고, 축복하지 않았습니다(17). 남을 저주하는 일은 마치 입은 옷 처럼, 물이 몸 속으로 들어가고 기름이 뼛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그들의 성품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18-19).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보응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20). 이 기도에서 다윗은 대적자들을 직접 저주하는 대신, 그들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정의를 행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4.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위한 기도(21-29)
이제 다윗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으로서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즉, 그저 개인적 원한을 갚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왕인 자신의 의를 변호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그 나라에 세워 달라는 기도입니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하나님의 정의와 그 뜻을 구별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늘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을 부단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21).”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는 다윗이 지금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평판과 존귀가 지켜 지기를 바라고 있고 그 마음이 이런 표현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운 왕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유념해야 하는 마땅한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아는 길은 악인의 반역이 응징 되는 것을 통해서 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지고 하나님께서 크게 존귀를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인 자신이 악인의 고소대로 유죄 판결을 받느냐, 무죄 판결을 받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원수들은 비방하는 자들이고(25), 욕하는 고발자들입니다(29). 다윗의 기도의 전체적 동기와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왕에게 약속대로 무죄 판결을 내리시고, 무죄를 입증하실 때 하나님의 존귀가 지켜 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22-29절의 내용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나는 또 그들의 비방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22-29).”


5. 마지막 찬양 (30-31; 롬 8:1)
109편은 마지막 두 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마칩니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30-31).” 하나님께서는 고발자들을 유죄로 판결하실 것이고, 다윗의 오른쪽에서 그를 의롭다고 판결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6. 교훈과 적용 (마 5:44; 롬 12:14; 눅 23:34; 벧전 2:19-25)
우리는 109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억울한 자의 기도’에서 억울함은 단지 개인적 차원의 억울함을 넘어서는 면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도는 부당한 비난과 판단을 받는 모든 억울한 상황에서 그대로 되갚아주거나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어떤 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기도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쏟아낼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기도는 성도의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러나 109편은 우리가 6-20절에서 처럼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제임스 보이스가 만들어낸 기도의 문장을 들어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아무개(나의 고용자, 불편한 이웃, 사이가 안 좋은 식구)에 관해 기도하려 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하고 내게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죽게 해주십시오. 그것도 아주 속히 죽게 해주십시오. 그 사람의 자녀들이 떠돌이 거지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무도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의 가족이 모두 대가 끊어지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위해 이렇게 해주시겠지요?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속이 시원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109편은 악을 악으로 갚거나 같이 저주하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저주는 하나님을 전혀 경유하지 않은 채, 치려는 대상을 직접 겨냥하는 것입니다. 저주란 저주하는 자가 하나님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내뱉는 힘 있는 말(word of power)입니다.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정의롭게 심판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나와 원수 간의 싸움이라면, 후자는 모든 것을 알고 온전히 정의롭게 행동하시는 하나님께 정의를 행하시라고 맡겨드리는 간청입니다. 성도는 최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고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실 것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가르치십니다.
성도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예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성호가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갈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21). 개인적 차원의 복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또한 성도는 원수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로마서 12:14).”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정의가 일어나는 것은 원수의 회개를 통해서 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반역자들은 끝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한 악인들은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심판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무죄판결을 받게 될 것입니다. 깊은 신학적 진리는, 죄인이 회개하고 믿으면 죄인에게 합당한 모든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구하는 이 기도는 심판이 그리스도께 임할 때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수 중 누가 회개할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 주님을 따라 기도할 수 있습니다(눅 23:34).
이런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중요한 것은 개인적 복수와 하나님 나라의 대의 또는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지 자기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을 대적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자를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우리의 자기 중심적 죄성을 고려할 때, 신중하고 신중해야 하는 것이지만, 피할 수 없이 중요한 구별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참모들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 말을 했는지는 팩트체크가 필요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오.” 바로 이 구별을 기도하는 성도들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억울한 상황, 부당하게 비난을 당하고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 우리 인생에서는 일어납니다. 이럴 때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31절에서 하나님께서 궁핍한 자신의 오른쪽에 서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판단하든, 중요한 것은 주님의 판단입니다. 우리의 심령 골수를 살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더없이 의로우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거짓으로 고발당하실 때,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자신을 내어 맡기고 개인적인 복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그저 하나님의 영예와 존귀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 자신은 부당한 판결로 사형에 처해질지라도 아버지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죄인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자신을 믿는 모든 자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점에서 시편 109편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왕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최종적인 무죄 판결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베드로전서 2:19–25).”
그러므로 성도가 이 모든 억울한 상황에서 할 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주 대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모든 처분을 맡기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정직하게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입니다. 정직한 기도가 왜 중요합니까? 우리는 “기도는 이런 것이야”라는 결론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조차 솔직해지지 못하고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109편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최종적 판결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지는 판단, 생각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