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민수기 강해 (6) - 바쳐진 사람들

민수기 강해 (6) - 바쳐진 사람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민수기 강해 (6) - 바쳐진 사람들

민수기 3:1-51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5-12-02

말씀내용
1. 레위 지파에 대한 두 가지 인구 조사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인구 조사 명령은 단순히 레위 지파를 제외한 12지파의 20세 이상의 남자를 계수하고 진영과 행군에서의 위치를 정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또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는 작업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3장과 4장에서 그것을 보게 되는데, 바로 앞서 인구 조사 명령에서 제외되었던 레위 지파 사람들을 별도로 계수하라는 명령입니다. 레위 지파를 계수하라는 명령은 두 개의 내용을 가집니다. 먼저 3장에는 한 달 이상의 레위인 남자의 수를 세라고 하는 명령과 그 내용이 다루어지고, 4장에서는 30세에서 50세 사이에 있는 레위인 남자의 수를 세라는 다른 명령이 주어집니다. 레위 지파에 속한 자로 한 달 이상된 남자 아이의 수를 계수하라는 명령의 근저에는 ‘대속’이라는 깊은 신학적 개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속한다는 개념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군사적 목적의 계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또 30세에서 50세에 해당하는 레위인 남자의 수를 계수하라는 것 역시 군사적 용도가 아닌 성막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2. 바쳐진 사람들(1~10):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장들에게 바쳐진 사람들
본문은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1). 특별히 대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은 아론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론의 네 아들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본문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의 위임을 받고 첫 제사를 드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자와 차자인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드리다가 즉사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레 10). 이들은 자식이 없이 죽으므로 아론의 셋째와 넷째 아들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되었는데 이들도 역시 아들이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 아들만으로는 엄청난 제사와 성막의 일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의 업무를 돕기 위해서 레위인들을 아론과 제사장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고 하셨습니다(9). 레위인들의 직무는 한편으로는 아론의 직무를 돕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중의 직무를 돕는 것이었습니다(7). 이 두 가지 직무에 바쳐진 사람들이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레위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점에서 그들에게 다른 지파들과 같이 누릴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소유자로 살지 않고 사용자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약의 개념으로 보면 그들은 정말 청지기의 삶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구약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 중에 맡겨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다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 설명드려야 하는 삶이 바로 청지기의 삶이고 레위인들이 보여주는 삶입니다. 그들의 분깃과 기업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신 10:9; 민 18:20 참고). 레위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3. 위험한 직무
레위인들은 특별히 성막과 관련된 일을 감당했습니다. 첫째는 성막을 지키는 직무였고 둘째는 성막을 옮기는 직무였습니다. 성막을 지키는 직무가 3장에, 그리고 옮기는 직무가 4장에 설명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막을 지키는 직무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진 직무였다는 사실입니다. 10절 하반절에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38절 참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보다 상위에 있는 것,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레위인의 직무는 위험하면서도 중요한 직무였습니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이 성막에 가까이 들어오려고 할 때 죽일 수 있다는 말은 그들 자신 조차도 성막에서의 일을 감당할 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기구들을 옮겨야 하는 고핫 자손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4:15).”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길 때 부주의함은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레위인의 직무를 통해서 성경은 우리에게도 경고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렘 48:10).”
4. 장자들의 대속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레위인(11~13, 40~51)
A. 한 달 이상 된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속한다.
15절에서 하나님은 레위인 계수의 원칙을 주시는데, 그것은 한 달 이상된 남자의 수를 계수하라는 것입니다. 계수하니 그 숫자가 모두 2만 2천 명이었습니다(39).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계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42). 그 숫자는 2만 2천 273명이었습니다(43). 두 숫자를 비교하면 레위인의 숫자가 273명이 부족했습니다. 이 부족분에 대해서는 1인당 5세겔씩을 속전으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셨고 이 속전은 아론과 그 아들들 즉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졌습니다(46~48).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가축 중에서도 처음 태어난 수컷에 대하여 동일한 원리로 레위인의 가축으로 대속한다는 개념이 포함됩니다(45).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한 가지 선언이 있는데, “레위인은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45, 12).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특이한 명령과 계산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 설명이 11~13절에 나옵니다. 그 역사적 유래는 첫 유월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불과 1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밤, 애굽 전국에서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궁에서부터 모든 백성의 가정에서 장자들이 일제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장자들이 유월절 양의 피로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 11~13절의 설명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의 은혜로 죽지 않고 살았던 장자들은 사람들이 짐승이나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 즉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은 사실상 그의 목숨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이고 이미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B. 장자와 처음 난 것은 대속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것이다(출 13:11~16).
출애굽기 13:11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너는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과 네게 있는 가축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처음 난 모든 자는 대속할지니라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그 때에 바로가 완악하여 우리를 보내지 아니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모든 것은 사람의 장자로부터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이셨으므로 태에서 처음 난 모든 수컷들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서 내 아들 중에 모든 처음 난 자를 다 대속하리니 이것이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가 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출 13:11~16).”
이 말씀에 의하면 중요한 원리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바쳐졌다는 것입니다. 짐승 중에서 처음 난 것은 제물로 바치고, 부정한 짐승 가령, 나귀와 같은 것은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여야 했고, 사람의 경우에도 다른 것으로 대속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장자는 짐승이나 어린 양이 아니라 레위인으로 대속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제시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인 중에서 한 달 이상된 남자를 계수하게 하셨고 그들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속하게 하셨으며, 레위인의 숫자가 모자라서 대속할 수 없게 된 273명의 장자에 대해서는 일인당 5세겔로 대속하게 하셨습니다. 5세겔은 당시 목동의 한 해 품삯에 해당하는 것으로 적은 금액은 아니었습니다.
C.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출 32:26~29)
이 점에서 레위인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였습니다. 장자가 하나님의 것이 되는 원리에 비추어, 레위지파는 야곱의 장자가 아니었지만 장자의 역할로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장자를 대속하는 지파로 선택하셨는가에 대한 근거는 출애굽기 32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은 모세가 내려오지 않는 것 때문에 불안해졌습니다. 그들은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섬겼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모세가 다루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출애굽기 32:26~29을 봅니다. “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이르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가는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레위 지파 사람들이 이 때 하나님의 편에 서서 행한 일은 우상숭배에 관여한 그들의 형제와 친구와 이웃들을 삼천 명이나 칼로 죽인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그들은 이 일을 행했습니다. 이때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특별한 의미에서 바쳐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장자의 대속이라는 개념으로 그 내용이 설명되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레위인이 되셨다!
자, 이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생명을 대신한 살아있는 구속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장자들은 레위인들을 볼 때, 자기들의 생명이 하나님께 바쳐졌어야 했지만 저 레위인들에 의해 대속됨으로써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운 장치인지요. 눈에 보이는 레위인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자신들의 구속을 확인할 수 있었다니 말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서 레위인들이 가지는 의미였습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장자들의 대속물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절차를 만드셨을까요? 이 모든 내용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장자들은 본래 애굽에서 나오던 날 다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그들의 집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발린 어린양의 피를 인하여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장자들은 죽지는 않았으나 본질상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장자들을 레위인으로 대속하셨습니다. 레위 지파가 자기들에게 주어진 땅도 없이, 오직 하나님을 자기 기업으로 삼고 성막에서 제사장을 위하고 또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위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은 자기들이 레위인들로 말미암아 구속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모든 인간에 대한 주재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 대한 주재권을 갖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대속 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너무나 귀해서 그 어느 것으로도 대속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대속의 제물을 우리를 위해서 제공해주십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대속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의 눈을 열어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들의 생명이 구속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서신서들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우리를 권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서고 넘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와 그렇지 않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들에게 레위인들이 그들의 구속의 가시적 증거였듯이, 오늘 우리 신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가 되었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구원받은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자들 가운데 레위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레위인의 존재를 보는 사람들 가운데 “아, 이제 막 살아도 되겠구나. 저들로 내 생명이 대속이 되었으니 나는 막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아,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속되었으니 이제 막 살아도 되겠구나”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은 “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내 생명의 구속이 하나님 앞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6.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히 12:23)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장자들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누가 장자입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다 장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들에게 베푸시는 유업을 풍성하게 신자들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12:23을 봅시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여기서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이 무슨 말입니까? 장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모든 장자들, 곧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여기 더 중요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하늘에 기록된’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 책에 일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계수되었고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은 참된 교회입니다. 그리고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신 그 선언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평생 우리의 구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대속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서 바라보아야 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구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존재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소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용자일 뿐이고 청지기일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업이 되시고 상급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이것이 십자가 위에 높이 그리스도를 다신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하여 바쳐진 사람들,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들입니다. 교회와 신자는 바쳐진 사람으로 이 세상 앞에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 바쳐진 존재로서 살아가는 힘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를 대속하여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쳐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십시오. 계속해서 그분을 바라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