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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2) -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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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2) - 드림

민수기 7:1-8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01-27

말씀내용
1. 열 두 지파의 지휘관들의 헌물(드림)
본문은 89절로 된 매우 긴 장입니다. 성막을 완성한 날, 성막을 봉헌하면서 열 두 지파의 지휘관들이 성막과 제사를 위하여 헌물을 드리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절에는 지휘관들이 수레와 소를 드린 것을 기록하고 있고, 10~83절에는 12일 동안 하루에 한 지파의 지휘관이 드린 것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84~88절에서는 12일 동안 각 지휘관들이 드린 봉헌물의 합계를 정리해서 다시 기록하고 89절에는 드디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대로(출 25:22) 성막의 지성소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는 일반적으로 설교되지 않는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상고하려고 합니다.
2. 언제 일어난 일인가?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이 일이 언제 일어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1절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1).” 그러면 이 날은 출애굽기 40장과 같은 시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막을 완성하고 성막의 각 기구에 관유를 발라 거룩히 봉헌하는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출애굽기는 성막의 완성과 함께 끝났습니다. 40장 33절입니다. “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여기서 출애굽 이후에 날짜가 기록된 일들 중에서 특별히 바로 이 날과 이 날에 이어 일어난 일들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것은 첫 유월절 그러니까 제1년 1월 14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세 달째가 될 때 그러니까 제1년 3월 14일경에 시내산에 도착하였습니다(출 19:1). 그리고 성막을 세운 것이 제2년 1월 1일입니다(출 40:2,17). 이 날은 정말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성막을 세우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쉐키나의 구름이 성막 위에 덮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출 40:34~35; 민 9:15). 그것은 모세가 두려워서 성막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장관을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성막의 중심에 서서 제사를 감당해야 하는 대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위임하는 의식이 시작되는데 이날로부터 7일에 걸쳐서 진행이 되어 제2년 1월 7일까지 이어졌습니다(레 8). 이와 함께 이 날에 시작된 또 하나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성막의 제사를 위하여 필요한 물품들과 제물들을 봉헌하게 되는데 이것이 12일 동안 계속되었으니까 제2년 1월 12일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2일 간의 봉헌이 끝난 이틀 후, 제2년 1월 14일에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정확히 출애굽한지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시간적 순서로 보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바로 제2년 2월 1일로, 민수기 1장 1절로 시작되는 인구 조사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아셔야 하는 것은, 민수기에 기록된 말씀이 일반적으로 시간의 순서를 따르고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적어도 순서를 따라서 기록된 것이라고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7장부터 9장까지의 말씀의 일부는 오히려 인구 조사 이전에 일어난 일을 서술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성격상 이 부분은 회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왜 이 내용이 레위기가 아닌 민수기에 기록되었는가?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왜 민수기는 처음에 인구조사를 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는데 갑자기 중간에 각 지파 지휘관들이 예물 드리는 이야기를 소급해서 기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내용이 시간의 순서를 따라 기록되어야 한다면 레위기에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레위기는 시간적으로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사이의 일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출애굽 후 제2년 1월 1일(출애굽기 마지막)에서 제2년 2월 1일(민수기의 시작) 사이의 기록이 레위기입니다. 그것은 세워진 성막에서 드려야 할 제사의 제도들을 가르치고 제사를 감당해야 할 제사장들을 위임하는 일, 그외에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들과 율법의 지침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각종 제사법들을 교훈하고 이어서 제사장을 위임하는 7일간의 일을 레위기 8장이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 만일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12일간 드리는 예물 봉헌이 기록되었다면 분명히 레위기의 중심 주제는 흐트러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성령의 영감으로 이 기록이 가장 합당하게 위치할 수 있는 곳, 바로 민수기 7장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7장은 지휘관들이 수레 6대와 소 12마리를 레위인들의 업무를 위해서 드렸다는 기록으로 시작되는데(1~9절) 이것은 레위인들의 성막 이동 업무가 어떻게 게르손과 므라리 그리고 고핫 자손에게 각각 분장되었는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미 민수기 3~4장에서 레위인을 계수하는 것과 관련해서 레위인들의 세 자손의 업무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세세한 내용을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비록, 이 각 지파 지휘관들의 예물 드리는 일이 그 전에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기록되는 것이 가장 적당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물을 드리는 지파들의 순서는 장유유서를 따르지 않고, 민수기 2장에서 보여준대로,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또 진행을 하는 순서를 따르고 있다는 점도 선이해를 필요로 하는 부분입니다.
4. 드림(헌상)
본문의 주제는 예물을 드림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헌상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한 곳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5장 5~6절입니다.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그들은 “나는 하나님께 드려진 몸입니다.” 혹은 “내 재산은 하나님께 다 드렸습니다”하는 식으로 부모 공경의 의무를 피하는 핑계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자기들의 이기적 죄성을 덮는데 사용하는 자들의 악행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할 때, ‘드림’이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 많이 나오는 히브리말 ‘코르반’이라는 말입니다. 10절 하반절을 봅니다.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 여기서 ‘헌물’이라는 단어가 코르반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같은 동사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예배드리러 나올 때 하나님께 헌상을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며, 어떤 태도로 드리는가에 대한 교훈을 이 본문에서 배우게 됩니다. 본문이 헌상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헌상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A. 사려깊은 예물(생각이 있는 예물)?레위인들을 위하여
먼저 1~9절에 보면,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수레 6대와 수레를 끄는 소 12마리를 드렸습니다. 이 지휘관들은 싸움에 나갈만한 인구를 조사할 때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우두머리를 세우라고 해서 세워진 지파의 대표자들입니다(1:4). 그러니 이들은 전쟁을 할 때 전쟁을 지휘해야 하는 명실상부 지휘관들이었습니다. 그 명단이 이미 앞에서 소개되었습니다(1:5~16). 이 지도자들이 먼저 드린 예물은 레위 지파에 속한 세 자손들이 성막을 운반하는데 사용될 수단이었습니다. 6대의 수레 중 4대와 소 8마리가 므라리 자손에게 배정되었고, 2대의 수레와 소 4마리는 게르손 자손에게 배정되었습니다. 반면 고핫 자손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4장에서 레위 지파의 세 자손이 담당해야 하는 직무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고핫 자손이 성막의 지성물들, 제일 중요한 부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게르손 자손이 성막의 휘장과 덮개에 관련된 물품들을 맡았고 므라리는 그 외 기둥과 받침, 못 등 무거운 물품들 그러나 가장 하찮아 보이는 물품들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사소한 부르심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하찮은 부르심은 없습니다. 하지만 수레와 소들이 배정되는 것을 보면 정작 가장 중요한 지성물을 맡은 고핫 자손에게는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고 가장 하찮아 보이는 물품들을 운반하는 므라리 자손에게 가장 많은 4대의 수레와 8마리의 소가 배정되었습니다. 이유는 그야말로 필요에 의한 실용적 이유입니다. 고핫 자손은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어깨에 메어야 했던 반면 므라리 자손은 가장 많고 무거운 물품들을 운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아무 불평도 나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수레와 소를 드린 지휘관들의 사려 깊음입니다. 즉, 이날에 완성된 성막 앞에서 각 지파의 지휘관들은 이제 출발과 함께 성막을 옮겨야 하는 자기들의 형제인 레위인들의 필요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성숙한 생각은 무엇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12일 동안에 드린 은반(은 쟁반), 은 바리(은 접시), 금 그릇들도 그 지도자들의 사려 깊음을 알게 합니다. 이것들은 다 그들이 볼 때에 성막에서 소제물과 향을 담을 때 필요한 물품들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과연 사려 깊음을 반영하고 있는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B. 희생 제물들?제사를 위하여
본문 10절은 특별히 12일 동안의 예물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일이 시작되는 시점을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라고 하지 않고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84절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물론 성막이 세워진 제2년 1월 1일에 성막의 모든 기구들도 기름을 바름으로써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특별히 ‘제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제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바로 그 제단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단은 희생제물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지휘관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첫 12일 동안에 처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희생제물들을 가져왔습니다. 물론 12일 동안에 예물을 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신 일이었습니다. 11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자원해서 지휘관들이 예물을 가져오려는 움직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루에 한 지파의 지휘관씩 나아와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명령이나 강제 없이 지휘관들이 자원하여 하나님께 가지고 나온 예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색함이 없이 풍성한 양의 예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수레와 소 그리고 은 쟁반과 은 접시에 담긴 소제물, 금 그릇에 담긴 향 외에도,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 숫양 한 마리,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다섯 마리이니 열 두 지휘관들이 드린 제물은 모두 번제물로, 수송아지 12마리, 숫양 12마리, 일 년 된 어린 숫양 12마리, 속죄제물로 숫염소 12마리, 화목제물로 소 24마리와 숫양 60마리, 숫염소 60마리, 일 년 된 숫양 60마리였으니 정말 풍성한 제물들이었습니다. 이 제물들을 놋제단에 드림으로써 거룩하게 구별된 놋제단이 이제 제 기능을 다하고 성막에서는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안에서 지속될 제사(예배)는 모든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위한 것이며, 또 모든 지파가 이 제사에 소용되는 제물들을 드려야 함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는 교훈적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이 땅에 존재하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소용되는 것을 책임있는 마음으로 감당하고 있는가를 또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C. 즐거운 드림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요소를 보게 됩니다. 성막이 완성되는 날로부터 시작해서, 열 두 지파의 지휘관들이 매일 한 사람씩 풍성한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백성들은 즐거웠을 것입니다. 성막이 완성된 것도 큰 기쁨이고 그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구름이 그 위를 덮는 놀라운 광경을 보는 것도 대단한데, 지휘관들이 성막의 완공을 경축하면서 하루에 한 사람씩 풍성한 예물을 가지고 나아오는 것은 모든 백성에게 즐거운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가지 중요하게 관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본문의 바로 앞에 기록된 것이 제사장 아론의 축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민 6:22~27). 왜 모세는 지휘관들의 예물 드림에 대한 기사를 아론의 축복 바로 뒤에 기록했을까요? 이것은 시간적으로는 정확하게 아론의 축복 뒤에 지휘관들의 예물 드림이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마 아론의 축복은 제사장들의 위임이 마치고 첫 제사를 드린 후에 행해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레 9:22~24). 그렇다면 이것은 제2년 1월 8일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봉헌 예물은 제2년 1월 1일부터 12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주제를 아론의 축복의 내용을 기록한 후에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헌상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먼저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호의를 사고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시작하십니다. 은혜와 축복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반응할 뿐입니다. 그것이 헌상, 곧 드림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죄책감을 이용해서 헌금을 강요하는 악한 행태들을 보고 듣습니다. 옳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한국교회의 비성경적이고 나쁜 악행들을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몇 주전에, 서울의 대형교회 목사가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암에 걸린다는 식으로 설교를 해서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오래도록 한국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해왔던 악행이었습니다. 소위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자원함이 아닌 강제적 심리 행사로 헌금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헌상에 대해서 들을 수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헌상의 자세에 대해서 말할 때,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고후 9:7). 또 하나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임직 헌금으로 알려진 한국교회의 관행입니다. 장로나 집사, 권사로 임직을 받는 사람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는 관례인데, 어쩌면 오늘 본문이 이런 관행의 성경적 근거 구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전적으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 지파의 지휘관들은 은혜에 대한 자원함으로 드렸지, 이것은 강요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임직 헌금에도 강요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마는, 모두가 다 똑 같은 액수로 헌금을 한다고 할 때, 경제적 형편이 다 다름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부담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문의 말씀을 주장하면서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다 똑 같은 액수를 드리지 않았는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똑 같은 액수를 헌금하기로 임직 받는 사람들이 작정하고 한다는 내용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즉 이 언약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힘있는 지파와 힘 없는 지파가 차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자리, 동일한 위치에서 하나님을 동일하게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자원한 것입니다. 이것은 즐거운 드림이었고 하나의 축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보장하시는 축복과 은혜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었기 때문입니다.
5. 최고의 예물은 우리 자신
이 내용의 마지막인 89절은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25장 22절에 대한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지은 후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모세에게 약속을 하셨었습니다. 이제 성막이 하나님께서 이르신 모든 말씀대로 완성되었고 제사장들이 세워졌으며, 지휘관들이 즐거이 하나님께 헌상을 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지성소 안에 위치한 속죄소 곧 증거궤 위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어진 성막 뿐 아니라 각 지파 지휘관들의 헌상도 기쁘게 받으셨다고 하는 하나의 인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합당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헌상은 분명히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우리의 헌상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헌상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불과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어느 부자보다 많았다고 하신 말씀은 “그들은(부자들)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었습니다(막 12:44).
결국 이 말씀은 헌상이란 물질이나 희생제물이나 어떤 것의 양으로 환산되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 더 분명하게는 그 사람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모든 신자들과 함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의 답의 첫 문장입니다. 즉 믿음의 드림은, 믿음으로 드리는 최고의 예물은 바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일생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 매일 드리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선교사나 전임 사역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을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그 길을 자기 부인과 순종으로 좇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무한한 은혜와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날마다 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된 언약 백성의 공동체로 벧샬롬 교회를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