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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3)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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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13)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민수기 8:1-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02-03

말씀내용
1. 문맥: 왜 여기 등잔대 규정이 나오는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문맥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왜 여기에 나오는가 그 전후 맥락을 살펴서 읽는다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성막의 등잔대에 관한 말씀이 왜 여기에 나오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A. 레위인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등불
본문 앞에 있는 7장은 성막이 완성되자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동료 레위인들을 위해서 소와 수레들을 드린 것과 또 그들이 하루 한 사람씩 희생제물들을 헌상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뒤에는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헌상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인들은 단지 성막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대속물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지파의 지휘관들의 헌상 그리고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헌상의 본문 사이에 등잔대에 관한 말씀이 위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각 지휘관들의 희생제물을 바침이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된 일이라고 강조함으로써(7:10,84,88) 이 제물들이 제단에서 행해질 제사를 온전하게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면, 이 본문은 성막의 일을 섬기기 위해서 레위인들이 대속물로서 헌상된다는 말씀의 도입부의 역할을 합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등불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성별과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삼는 이상을 구현하는 존재였습니다(Gordon J. Keddie).”
B. 놋제단과 등잔대
또 한 가지 우리가 문맥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막에서 하루 두 번 제사장이 살펴야 하는 기구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이 놋제단과 등잔대였습니다. 7장이 놋제단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8장은 등잔대에 초점을 맞춥니다. 제단에서는 아침과 저녁의 상번제가 드려져야 했기 때문에 항상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제단을 살펴야 하는 것은 제사장의 중요한 책임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등잔대도 아침과 저녁에 살펴야 했습니다(출 30:7~8). 두 곳 모두 그 불이 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레 6:8~13; 24:2~4). 그런데 등잔대의 불과 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제단에서처럼 등잔대에서도 항상 불이 타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와(레 24:2~4; 출 27:20~21) 아침이면 껐다가 저녁이면 다시 제사장들이 불을 켰다고 보는 견해입니다(출 30:7~8). 하지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등잔대에서는 언제나 빛이 비취도록 간수되었다고 증거함으로써 앞의 견래를 지지합니다. 또 하나 언제나 등불이 비추고 있었다고 보는 강력한 근거는 성막은 휘장과 덮개로 막혀 있어서 등잔대에서 비추는 빛이 아니면 칠흑같이 어두워서 제사장들이 제대로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루 두 번 살펴야 하는 두 개의 성물, 그리고 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들 때문에, 7장의 제단에 대한 강조와 함께 여기서 등잔대가 등장하는 것이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2. 등잔대의 모양?생명나무
사실 등잔대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출애굽기의 두 본문에 나옵니다. 어떻게 만들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기록한 출애굽기 25:31~40과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대로 만들었다는 것을 기록한 출애굽기 37:17~24입니다. 물론 오늘 민수기 8:4에서 등잔대의 제작법에 대해서 언급을 하듯이, 등잔대는 밑판부터 줄기와 잔, 꽃받침과 꽃까지 한 덩어리의 금을 쳐서 만든 것입니다(출 25:31). 여기에 사용된 재료는 순금 1달란트인데 환산하면 약 40kg 정도이고 시가로는 미화 2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23억이 넘는 금액입니다. 등잔대에 대해서는 재료로 사용될 금의 중량을 밝힐 뿐 그 크기에 대해서는 말씀을 하고 있지 않은데, 아마 이 정도의 금을 쳐서 만들게 되면 등잔대의 높이 1.5m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또 이 정도 높이가 되어야 그 앞에 있는 높이가 70cm 되는 진설병 상을 위에서 충분히 비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등잔대의 모양은 가운데 등잔대의 큰 줄기가 있고 양쪽으로 세 개씩 가지가 뻗어있는 나무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등잔대의 각 가지마다 살구꽃의 꽃받침과 꽃의 모양을 정교하게 넣을 것을 지시하셨습니다(출 25:33). 각 가지마다 꽃망울부터, 꽃과 열매의 모양까지를 다 넣으라고 한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일곱 개의 가지가 다 그렇고 아마 가운데 줄기는 하나가 더 있어서 도합 네 개가 있었을 것입니다(출 25:34~35). 그 모양에 대한 지시가 매우 세부적입니다. 가운데 줄기에서 맨 위의 두 가지가 나오는 아래 부분에 하나의 꽃받침을 두고 그 다음도, 그 다음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고 아마 맨 위의 두 가지가 나오는 곳 위에 하나의 꽃받침이 더 있는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한 덩어리의 금에서 취하여 쳐서 만든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등잔대가 나무 모양이라는 것은,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를 상징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등잔대의 모양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3. 등잔대의 기능?빛을 비추라.
등잔대가 모양을 통해서 생명을 상징한다면, 그 기능은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출 25:37). 어두운 성소를 비추는 것입니다. 등대에 일곱 가지를 두었다는 것은 그 빛이 얼마나 완전한 하나님의 빛인지를 보여줍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하나님께서 모든 빛의 근원이심을 보여주듯이, 등잔대도 그것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등대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고 명하신 것은 제사장의 중요한 의무였습니다(출 27:20~21; 레 24:1~4). 등대에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된 관계와 사귐이 지속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은 이 의미를 잘 설명했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요일 2:9~10).” 성소에 있는 등대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았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7:9).” 이런 구절들은 아마도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생명 자체이시고, 빛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빛 자체이심을 보여줍니다.
4.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하라”(2).
본문은 하나님께서 등잔대의 빛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하라고 지시하셨고(2) 아론이 그렇게 했다(3)고 기록합니다. 빛의 방향에 대한 언급입니다. 출애굽기의 본문도 ‘앞을 비추게 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출 25:37).
A. 빛을 비추라!
여기서 빛을 비추게 한다는 히브리 단어는 앞서 6장에서 살펴보았던 대제사장의 축복기도에서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6:25)”라고 할 때 ‘비추사’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등잔대의 비추임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론(대제사장)이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시기를 바란다”고 말로 축복을 선언했다면 성막의 등잔대는 날마다 빛을 비추는 실재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B. ‘등잔대 앞으로’ 비추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게 하되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성소에는 세 개의 성물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의 바로 앞에 있는 금향단, 그리고 성막으로 들어오는 (동쪽) 입구의 양편에 오른쪽으로는(북쪽) 진설병이 놓여있는 진설병 상이 있고 왼쪽으로는(남쪽) 등잔대가 진설병 상을 마주하고 놓여 있었습니다. 이 구조를 볼 때, 등잔대가 앞을 비춘다고 하면 바로 진설병 상을 비춘다는 말입니다. 진설병 상 위에는 매 안식일마다 제사장들이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새로운 진설병을 올려놓게 되므로 언제나 이 상 위에는 진설병이 놓여져 있어야 했습니다. 진설병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으로, 물려낸 떡은 제사장들이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상은 떡을 진열하기 때문에 ‘떡을 진설하는 상’이라 불렸고(대하 29:18) 이 떡은 진설병이라 불렸습니다. 여기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 좀 더 살펴보아야 할 사항이 있는데, 왜 떡을 상 위에 진설(진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이 떡이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이교적 관습에서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제사상과 그 위에 차려진 음식입니다. 그 제사가 신에게 드려진다면 신에게 먹으라고 주는 것이고, 조상에게 바치는 제사라면 조상귀신이 먹으라고 바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이나 조상귀신은 먹지 않습니다. 제사상의 떡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이 신을 먹이는 것이고 신에게 드리는 인간의 정성의 표시입니다. “맛있게 잡수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십시오”하는 기원이 담긴 것입니다. 신이 먹고 남긴 것을(사실은 먹지도 못하지만) 인간이 나중에 먹지만, 그 떡은 전적으로 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설병은 그런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잡수시게 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십니다. 진설병이 상징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진설병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다는 것과, 또한 그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설병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언약 백성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을 드러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음식을 공급해드리는 개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선하신 아버지이심을 가르칩니다. 12개의 떡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각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몫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떡은 아론과 그 자손이 먹지만 제사장이 먹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신하여 먹는 것이었습니다. 진설병은 언제나 이 상 위에 신선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이제 등잔대의 빛을 그 앞으로 비추게 하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등잔대의 빛이 진설병을 향하여 비춘다는 것과 빛을 비춘다는 것이 아론의 대제사장 축복기도의 내용과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 빛을 비추어주신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얼굴 빛을 어디로 향하시는가 하면 진설병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모든 필요를 향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얼굴 앞에 우리의 모든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필요는 어둠 속에 감추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설병 상에 진설병이 놓여있고 그 진설병을 등잔대의 빛이 비추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필요는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보고 아시며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즉, 이 등잔대의 빛의 비추임을 받는 진설병은 이스라엘 백성의 먹을 것, 입을 것, 살아가면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 필요를 보고 아시는 것 만이 아니라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진설병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에 대한 하나의 표지입니다. 민수기는 이제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의 행군을 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필요가 하나님의 얼굴 빛 앞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확증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적실성이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입니다. 내 필요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다! 그것은 감추어질 수 없다! 이것이 등잔대의 빛을 그 앞으로 비추게 하라는 말씀에서 얻는 영적 교훈입니다. “내가 보고 있다. 내가 축복하노라”하는 말씀입니다. 스가랴서에서 등잔대의 줄기로 뻗어있는 일곱 등잔은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한 것은 더욱 더 이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슥 4:10).” 일곱 등잔은 하나님의 임재의 완전하심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는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누리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5. 그리스도, 세상의 빛(요 1:4; 사 49:6)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사람들의 빛’이라고 소개합니다(요 1:4).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을 성취한 것입니다.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b).”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 빛이 비추어지는 경계가 유대인으로부터 온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막 안에 숨겨진 등잔대로서가 아니라 온 세상에 드러난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 1:4은 예수님이 등잔대가 상징하는 생명과 빛 모두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성경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참 등잔대가 되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결정적으로 만납니다. 요한계시록 21:23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어린 양, 그리스도가 바로 등불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 그 등대가 바로 주님이구나”하는 결정적 지시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생명이 되셨고 흑암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 빛이 되셨습니다.
6. (내가 빛인 것처럼)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빛이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 5:14). 그리고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16). 이것은 아론에게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할지니라”고 하신 말씀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얼굴 빛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게 하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니 이제 우리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 의미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비출 수 있는 등불은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빛은 없습니다.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습니까? 착한 행실과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마 5:16; 빌 2:15,16).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교회는 기독교 최후의 변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이 참 빛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바로 우리들,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이 빛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보도록 밝히 빛을 비추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주께서 벧샬롬 공동체와 모든 지체들의 삶 가운데 이 복된 부르심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은혜를 더욱 부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