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설교분류별모음

Home > 설교분류별모음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4). 귀 있는 자들의 회개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4). 귀 있는 자들의 회개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4). 귀 있는 자들의 회개

요한계시록 3:19,22, 요나 1:1-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3-01

말씀내용
우리는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지금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 중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한 다섯 교회를 향해서는 동일하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물론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책망이 없었다는 것이, 그들이 완벽했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들이 전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주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향해 지적하고 책망하신 일들과 관련해서 그들은 온전했고, 격려를 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19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기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설교자가 설교의 본문을 때마다 일어나는 세계적, 사회적 또는 교회적 이슈들을 다루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만도 없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설교자에게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말씀을 통하여 언제나 시의적절하게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성령님께서는 설교자에게 본문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조명해주심으로써 그렇게 하시고 설교자는 이점에서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주의 말씀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계시록 강해의 순서를 유지하면서, [귀있는 자들의 회개]라는 주제를 살피되, 요나서 1장의 말씀과 함께 상고하려고 합니다.


1.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았는가 (욘 1:7-8)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에게 원수의 나라요, 이스라엘을 언제 삼킬지 모르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하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니느웨의 악독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만큼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 명령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물론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싫기도 했겠지만, 자기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될까봐 그것이 싫었습니다(욘 4:2). 요나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욥바 항구로 갔습니다. 니느웨는 동쪽인데, 요나는 서쪽 끝 지금의 스페인 남부 해안의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아예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리 도망가겠다는 심정이 보입니다. 출항을 하고 얼마가 지났는지 모릅니다.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뱃사람들 조차 두려움에 사로잡혀 저마다 자기들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무거운 물건들을 바다로 던졌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선지자요 도망자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 와중에 말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긴장을 했길래, 이제 배를 타고 도망에 성공했다고 여겨 안심한 요나가 이렇게 큰 폭풍 속에서도 잠이 들 수 있었을까요?
잠자는 요나를 발견한 선장은 그를 깨우며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불신자인 선장이 기도하지 않는 선지자 요나를 부끄럽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뱃사람들은 자신들이 늘 하던 방식대로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 제비를 뽑아서 찾아내자고 말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았고 요나가 걸렸습니다. 그들은 요나에게 정체를 밝히고 왜 이 재앙이 임하였는가를 설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제비에 뽑혔을 때, 요나는 하나님께서 도망가는 자신을 추격하여 잡으셨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욘 1:9).”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한 까닭에 이 재앙이 임했다고 말했습니다(욘 1:10). 요나 뿐 아니라 불신자인 뱃사람들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이 폭풍은 요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재앙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에도 천재지변 같은 재앙이 임할 때, 신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내용입니다. 동남아에 쓰나미가 덮쳤던 2004년, 아이티에 대지진이 일어났던 2010년, 그리고 이번에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에 대해서도,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너무 일차원적이고 위험한 대답입니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나라를 심판하시는 재앙이 나옵니다. 심지어 심한 돌림병을 주실 때에는, 애굽의 모든 가축이 죽었지만 고센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임하는 천재지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더 신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 재앙은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이라고 말할 때 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하나의 근거일 뿐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사역 중, 총독 빌라도가 제물을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일이 있었습니다(눅 13:1-5). 그때 사람들은 죽임을 당한 갈릴리 사람들이 죄가 많아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사고로 그 자리에 있다가 죽은 18명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들보다 죄가 많아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생각을 깨뜨리셨습니다(눅 13:3,5).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쉽게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고 단정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건강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재앙의 원인을 규명하고 싶은 욕구가 발동합니다. 물론 요나의 이야기는, 폭풍이 임한 까닭은 불신자인 뱃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요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폭풍은 선지자 요나의 불순종 때문에 일어난 재앙이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이 초래한 하나님의 재앙인 폭풍으로 뱃사람들이 혼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한 사건에 대한 설명이지, 이것을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재앙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적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 이 재앙은 욥의 경우를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앙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듣는 것입니다. 하나씩 차근차근 살펴보지요.
우리가 본문에서 보듯이,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그 징계로서의 재앙으로 온 세상이 고통을 당하는 일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경우도, 우리가 성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넣어야 합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뉴스의 가장 큰 이슈는 신천지 이슈입니다. 그들의 비윤리성, 반사회적 무책임성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돌아볼 것은 없습니까? 어쩌다 이런 반인륜적, 반사회적 이단사이비집단이 한국 뉴스의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까? 신천지나 이단 사이비들이 자라나는 토양은 교회가 아닙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지난 삼 사십 년 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싸인을 무시하고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해오는 동안, 바른 교리와 성경의 가르침을 버렸기 때문에 이런 신천지 같은 이단 사이비 집단들이 많이 자라난 것이 아닙니까? 신천지는 기독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신천지를 비난하는 것만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까?
또 하나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많은 교회들이 정상적으로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초유의 일들이 벌어졌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역사에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이렇게 뉴스의 초점이 된 적이 있었습니까? 게다가 세상은 더 나아가 교회가 이 위중한 때에도 주일 예배 모임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헌금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이 사회 앞에 보여준 모습이 돈을 사랑하는 모습이었을 것이기에, 이 비난을 사실무근이라고 항변할 수 만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헌상이 예배를 구성하는 마땅한 요소라는 바른 가르침 조차 말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입니다.
주님은 일곱 교회에게 예외없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귀 있는 자입니까? 이 메시지를 들을 줄 아는 자들이 귀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만이 회개하라는 주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결국 회개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반응하는 자 곧 귀 있는 자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이 재앙을 통해서 뭔가를 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듣는 자는 오직 귀 있는 자 뿐이고, 그들은 믿는 자요 택하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위중한 시기에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이 재앙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 것인가? 중요한 것은, 재앙의 원인을 규명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듣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요나의 고백 그리고 대가 지불(욘 1:12)
제비에 걸린 요나는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이라고 뱃사람들에게 고백했습니다(욘 1:10). 이것은 정말 부끄러운 고백이 아닙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서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가다가 이 재앙을 만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고생을 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회개도 아니고, 그야말로 세상 앞에서 하는 공개적 죄 고백입니다. 때로는 이런 일도 필요하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요나가 이렇게 고백했지만 풍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다는 점점 흉용해졌고” 뱃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 지겠느냐고 요나에게 묻습니다(욘 1:11). 이제 요나는 요나서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말을 하게 됩니다. 요나서 1:12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요나 1:12).”
재앙의 원인인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재앙의 원인이라는 고백과 설명으로만 상황을 끝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재앙의 원인인 자기가 죽을 때, 이 재앙이 끝날 것을 압니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이 죽든지 살든지 나는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을 저버리고 도망 가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의 죽음으로써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뱃사람들을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요나가 참된 회개를 했다고 단정하기는 좀 이른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철저한 자기 부인, 자기 죽임을 통해 뱃사람들을 살리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결정했다는 것은 요나의 회개의 진정성을 판단하게 하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는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일어난 상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조롱거리가 된 이면에,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재난 속에서 그저 잠잠하기만 하면 됩니까? 아니면 신천지 탓이라거나 정부의 무능함 탓이라고 비난만 하면 됩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가벼운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3. 재앙의 원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욘 1:15-16)
선지자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잔잔하리라고 말하였지만, 착한 뱃사람들은 어떻게든 요나를 죽이지 않고 함께 살아보려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대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폭풍은 더욱 휘몰아쳤고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요나는 뱃사람들에 의해 바다에 던져지게 되고, 그러자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바로 그쳤습니다. 이 현상은 선지자 요나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바른 말이었음을 배에 탄 모든 자들에게 입증해주기 충분한 증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풍랑은 요나가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보내신 풍랑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뱃사람들에게도 정확하게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를 선포하는 본문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재앙의 원인이 요나라든가, 요나가 죽음의 심판을 받음으로써 재앙이 그치게 되었다는 것이 요나 이야기의 요점은 아닙니다. 단순히 재앙의 원인을 밝히고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이루어가시는 당신의 목적을 힐끗 보여주십니다. 1:15이 재앙의 원인을 보여준다면, 1:16은 하나님의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요나 1:16).”
뱃사람들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했습니다. 이 서원은 앞으로도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서원이었을 것입니다. 이 구절 하나로, 우리가 뱃사람들의 회심을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불순종으로 폭풍을 보내셨고, 요나를 돌이키게 하사 당신의 본래의 목적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뱃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알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분명히 계시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알려지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로부터 예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목적을 여기서 이루어 가십니다. 요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아니 요나의 불순종 까지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요나의 불순종이 뱃사람들의 순종을 가져왔고 요나의 하나님 경외하지 않음이 뱃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백성의 순종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문이 잘 보여줍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만큼 훌륭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 완벽했던 적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세상의 왕들 앞에서 거짓말을 함으로써 수치를 당했으며, 야곱은 이런 일이 인생에 다반사로 일어났고, 다윗은 부끄럽고 추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에서 떠나 하나님의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고 지켰던 적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손에 넘기사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일의 원인 규명과 해결과 벌을 주심에만 몰두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넘어 당신의 목적을 조금의 막힘도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모든 실패와 잘못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모든 실패와 잘못까지도 모두 다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차질 없게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선지자 요나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는 바, 하나님의 주권과 그것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4. 재앙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제 이 내용을 우리의 현실에 조심스럽게 적용해봅시다. 본문은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이 누구로 인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 중국과 정부와 야권을 비롯한 정치권과 신천지와 교회와 모든 단체 대표들이 모여 제비를 뽑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인을 밝히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시는 일임에는 분명하고, 원인과 관련하여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것도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살핀 것은, 코로나바이러스 재난의 원인은 교회의 죄악이다라고 단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점입니다.

A. 귀 있는 자만이 회개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일곱 교회를 향해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 듣습니까? 주님의 메시지를 듣는 자는 귀 있는 자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듣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고, 주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주의 자녀들입니다. 주님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양인 교회는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코로나 바이러스19라는 특별한 재난 상황에서 교회의 주일 공예배까지도 위협을 받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먼저,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악은 없습니까? 이 재앙은 우리와는 절대 무관한 것입니까? 신천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거짓 사이비 이단들이 그토록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여기에는 목사들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그러나 어찌 그들만의 책임이겠습니까?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는 주의 말씀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을 가리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르치고 전하는 모든 합당한 주의 말씀과 그 가르침 아래 순종하여 거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배우고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더 배우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이보다 더 큰 보상은 없습니다. 이것은 어떤 선물 보다 더 귀한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단 사이비에 속한 자들이 가진 열심의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섬겨왔다면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는 요나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뜻을 알면서도 적당히 회피하면서 편안함을 선택하면서 타협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돈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지 않았는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웃 사랑을 여러분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나타내면서 살아왔습니까?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특별히 지금과 같이 교회가 어려움의 때를 만났을 때 해야하는 첫번째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재앙의 때에 특별히 교회가 큰 위기 가운데 처해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주의 백성인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을 살피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귀 있는 자들’이 주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보여야 하는 합당한 반응입니다.
물론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회개해야 할 죄악도 있겠지만, 벧샬롬교회 또는 한국교회가 공동체로서 회개해야 할 공적인 죄악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교회가 한국 사회 앞에 공개적으로 회개해야 할 죄악일지도 모릅니다. 한국교회가 돈을 사랑했고, 성장주의의 기치 아래 물량주의를 추구했던 것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거대교회가 되었고 그것을 자식에게 세습하여 거룩한 주의 말씀까지 임의로 불경건하게 이용한 것이 한국교회가 이 세상 앞에 보여준 민낯이 아니었습니까? 가짜 학위, 가짜 목사안수, 여기에 거짓말들을 더하는 것이 이 세상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한국교회 교인들의 도덕성은 과연 세상을 부끄럽게 하고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만한 것이었는지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런 문제들은 일개 성도인 나와는 무관하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느헤미야(느 1:4-11)와 다니엘(단 9:3-19)의 기도만이라도 읽어본다면, 성도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범한 죄악까지도 마치 자신들이 범한 죄악처럼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 회개하는 성도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회개는 귀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귀가 있어 주의 말씀을 들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반응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고 그 말씀을 제대로 듣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조금 더 말씀하십니다.

B. 참 회개는 대가를 지불한다.
참 회개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선지자 요나가 자기 신원을 밝히고 재앙의 원인을 말한 뒤에, 한 말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욘 1:12).”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 어려운 때에, 신자는 불신자와 어떻게 다를 수 있습니까?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두려워 떠는 그 두려움으로 떠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저 우리는 이 사회의 소시민으로서 자신의 사적 손익에 대해서만 반응하고 대처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까? 단순히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의 전부일 수 있습니까?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코로나 바이러스인지, 하나님인지를 분명하게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신자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천지 사람들이나 불신자들만 걸리는게 아닙니다. 당연히 신자도 걸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하이벨베르크 요리문답 1문으로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듯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저는 제 것이 아니요, 제 몸과 영혼 모두 저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보혈로 저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시고 저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저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저를 보호하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저의 구원을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함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가 영생 받았음을 확신하게 해주시고, 이제부터는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그리고 어느 때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병이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마 10:28). 이것은 신자들을 이런 위중한 상황에서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판단하고 다르게 행동하게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신자로서, 이런 상황에서 감당해야 할 몫,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치를 수 있는 몫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같이 생각해봅시다. 신자 개인으로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로서 세상에서 우리가 치를 대가를 말입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선지자 요나는 선장의 깨움을 받고 너도 깨어 기도하라고 면박을 당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좌우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그가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창세기 20:17).” 우리는 한없이 부족해도, 세상을 향해 이런 존재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을 다시 확인하십시다. 교회는 이런 존재입니다. 재앙을 만난 세상에서 우리가 봉사할 영역을 찾아보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마땅한 바입니다.
우리는 지금 온 나라가 겪고 있는 재앙의 상황에서 벗어나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교회의 공예배가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이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는 먼저 “회개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반응합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우리가 치를 대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감당한다면, 그것이 참된 의미에서 ‘귀 있는 자의 회개’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의 자녀들이 이렇게 행할 때, 우리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크게 두려워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