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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4).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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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84).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18-21, 신명기 29:19-20, 신명기 4: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8-29

말씀내용
이제 우리는 2019년 7월 21일에 시작한 요한계시록 강해의 마지막에 이르렀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가 강조하는 두 가지 주제는 오늘 이 마지막 본문인 18-21절에서도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언의 말씀의 진정성과 주님의 재림의 임박성입니다. 18-19절이 예언의 말씀의 진정성을 마지막으로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면, 20절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주님 자신의 확실한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요한 자신의 응답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은 통상적인 서신의 형식에 따라, 주 예수의 은혜로 독자들을 축복함으로서 요한계시록을 마무리합니다.


1. 경고의 대상 (18-19; 2:6,14,15,20; 3:14-22; 렘 14:15-16)
먼저 독자-청자들은 18-19절에서 무서운 경고를 듣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요한계시록 22:18–19).”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것도 가감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너희 뜻에 맞추어 수정하거나 변경하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여기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요한계시록을 가리킨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경고의 말씀은 요한계시록으로 정경이 완성되었으니 누구도 이 정경의 목록에 다른 성경을 더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정경이 요한계시록으로 완성되었다는 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 경고의 직접적 의미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이 말씀은 복사기가 없던 당시에, 필사자들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필사할 때 실수로 말씀을 빼거나 더하게 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위협적 경고도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19절에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의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는 말씀 때문에 성경의 ‘본문에 대한 죄’를 지으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이해하지만, 이것은 이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참된 믿음 없이 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처음부터 구원이 주어진 적이 없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참 신자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거짓 그리스도인들, 거짓 신앙고백자들이 최후의 상을 받지 못할 것을 거듭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이 경고는 요한계시록을 가르치다가 잘못된 해석에 기초하여 가르칠지도 모르는 선의의 그리스도인 교사나 목사들을 향한 경고도 아닙니다. 물론 말씀을 가르치는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지혜를 구하면서 부지런히 연구하여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말입니다. 조지 래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그의 메시지를 해석하는데서 판단의 실수나 전달함에 있어서 일어날 수 있는 소극적인 잘못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고, 의도적인 왜곡과 곡해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준엄한 경고는 어떤 대상들을 염두에 둔 말씀일까요? 이 본문이 의도하는 대상들은, 굳이 요한계시록의 본문 안에서 찾아 말해야 한다면, 이미 우리가 2-3장에서 보았듯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곡해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이 경고는 예언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배교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이 죄를 범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배교자와 불신자라고 선언하는 셈입니다. 가령, 에베소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했고 버가모 교회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까지 했던 초대교회 이단 니골라 당의 가르침이나(계 2:6,15) 버가모 교회를 흔들었던 발람의 교훈(계 2:14)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던 거짓 선지자 이세벨과 같은 자들의 교훈(계 2:20),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를 미혹했던 부와 건강의 복음 즉 번영신학의 가르침(계 3:14-22)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번영신학과 같은 거짓 복음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심각하게 많은 교회의 강단을 오염시켜 왔고,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을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과 같이 차지도 덥지도 않으며 자신의 부와 건강을 자랑하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신앙으로 이끎으로써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회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 뿐이 아닙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수많은 교회들을 흔들어 댔고 많은 사람을 미혹하며 지금도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은 대표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이 경고의 말씀에 해당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단들은 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구원 받음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를 성경에 더한 사람들이었고 사두개인은 요소, 부활이나 천사 등에 관한 가르침들을 부인함으로써 성경에서 그 내용들을 제거한 자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안식교의 창시자인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나 모르몬교의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Joseph Smith)는 모두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제함으로써 수정을 가한 사람들이었고, 또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인 테이즈 러셀(Taze Russel)도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제거함으로써 성경을 왜곡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경고는 비단 이 당사자들만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가는 모든 자들에게도 이 경고의 말씀은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예레미야 14:15–16).”
거짓 선지자들,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가감하였던 자들의 가르침을 따랐던 백성에게도 하나님은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 분별력과 신령한 지혜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무분별하게 자기 입맛에 맞는 유튜브 영상들로 영적 지식과 성경 지식을 더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최종 권위(18-19; 신 4:2-3; 12:32; 29:19-20)
또한 이 경고는 그리스도인의 최종 권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과 삶에서 최종적, 궁극적 권위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 입맛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리거나 수정 혹은 변개할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인 성경은 주의 백성이 살아가는 삶의 최종 권위입니다. 이점에서 18-19절은 신명기의 말씀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출애굽을 한지 40년이 거의 되어 가나안을 목전에 둔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선포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서 너희의 삶을 규정하고 지배할 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삶을 지배하려면, 그 율법에 권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의 국가에도 헌법과 각종 법률들이 있어서, 그것이 그 나라의 시민의 삶을 지배하고 구속하는 것은 그 법이 가지는 권위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가 살아가는 나라의 법을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조작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권위입니다. 모든 정상적인 법치 국가에서는 궁극적으로 법관의 권위가 아니라 법의 권위에 묻고 호소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시민은 물론, 법관도, 대통령도 법 아래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의 권위입니다.
모세는 신명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국가로서 존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다스리는 원칙을 이 율법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 몇 차례에 걸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명기 4:2)…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명기 12:32)…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신명기 29:19–20).”
여기서 이 신명기의 경고들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지를 4:3이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신명기 4:3).” 이 경고는 믿음이 없고 불순종하는 자들, 비록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바울브올의 일로 배교를 행한 자들을 향한 경고였습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명기 4:2-4과 12:29-32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양립할 수 있다는 거짓 가르침을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금송아지 사건으로부터 바알브올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숭배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는 유혹에 직면했다. 이런 거짓 가르침은 결국 하나님의 율법을 더하는 일이 된다.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제하는 것과도 동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상숭배를 금하는 실정법을 위반하고 결과적으로 그 율법의 타당성을 무효화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일반적인 불순종이 아니라 명기된 말씀에 관한 거짓 가르침이고, 이 미혹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신명기에서 사용된 경고의 용례는 오늘 우리가 살피는 본문의 용례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명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사도 요한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 가감하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이 말씀이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새로운 법전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요한은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증언한다는 말은 법적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는 용어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의 진정성 그리고 변경이 불가하다는, 말씀의 권위를 선포합니다.
18-19절의 경고는 직접적으로는 요한계시록의 말씀, 그리고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전체 성경이 가지는 신적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말씀에 대한 수정과 왜곡의 시도에 대한 처벌 규정은 매우 무겁고 무섭습니다. 그 처벌 규정은 요한계시록에 나온 모든 재앙이 다 부어지거나,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감히 자기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은 자기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데니스 존슨(Dennis E. Johnson)의 말입니다. “이 신적인 증거는 장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실만큼 당신의 사랑받는 신부를 마귀의 거짓말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그 말씀의 진정성을 질투하실만큼 보호하신다.”
결국 말씀을 가감하는 것에 대한 반대는 무엇입니까?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시 신명기 4:2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명기 4:2).” 가감하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가감하지 말라는 말은 단지 성경을 그대로 놔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권위 아래서 살라는 것이고, 어떤 조건 속에서도 어떤 불이익과 고난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3. 기독교 신앙은 재림 갈망의 신앙이다 (20; 빌 3:20-21; 딛 2:13)
이 경고 후에, 요한은 주님의 재림 선언을 들려줍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누구입니까? 주님 자신이십니다. ‘이것들’은 물론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1장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시작했습니다. 이제 주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 약속은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에서 세 번 반복된 약속 중 최종적인 약속이고 요한계시록의 클라이맥스입니다(7,12,20). 사실, 주님의 이 말씀은 17절에서 성령과 신부가 주님을 향해 “오소서, 오시옵소서”라고 외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주 예수님이 친히 하신 약속입니다. 주님의 시간은 이르지도 늦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시간에 정확하게 일하십니다. 어느 인간도 자신의 시계와 캘린더를 가지고 주님을 향하여 “아직은 때가 아니라”거나 “너무 늦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실 뿐 아니라, 모든 시간의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주님의 재림은 언제나 모든 신자에게 그리고 모든 불신자에게도 임박한 일입니다.
주님의 이 약속에 대하여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로 응답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기도이며, 모든 교회와 성도가 주님이 영광 중에 강림하시기까지 잊지 말아야 할 기도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립보서 3:20–21).” 바울이 갈망하고 기다린 것은 주님의 재림이었습니다. 바울과 요한 뿐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지던 1세기 말 소아시아의 성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매일 황제 숭배의 압력 속에서 살며, 유대교의 비열한 공격을 받아야 했으며, 세상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거짓 가르침들을 분별하고 그 거짓 가르침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먹고 살아가는 상업 행위나 시민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거나, 혹 누군가의 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들은 늘 자신의 마음 속에서 타협의 유혹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외적 압박과 내적 유혹 속에서 그들을 지켜주었던 것은 주님의 재림 약속에 대한 신뢰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갈망은 날마다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인도해주었을 것입니다. 재림의 신앙은 그들을 깨어 있게 함으로써 방종으로부터 지켜주었고, 또한 주님을 향한 사랑을 통해 율법주의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었을 것입니다. 재림의 소망은 심한 압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영혼들을 향한 구령의 열정으로 그들을 불타오르게 하였고,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1세기 말,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도서에서 재림에 대한 소망을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딛 2:13). 이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도 주님의 재림 약속은 복스러운 소망으로 자리하고 있는가?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재림 신앙이어야함을 주님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씀이자, 신구약 성경의 마지막 말씀에서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4. 주 예수의 은혜가 이긴다 (21)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이 하나의 서신이었기에, 서신의 통상적 형식을 따라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요한계시록 22:21).”
이것을 틀에 박힌 형식적 인사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실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이보다 더 놀랍고 영광스러운 인사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상황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로마의 황제라는 권력, 짐승의 권세, 음녀 바벨론의 유혹을 이깁니까? 어떻게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고,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주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상황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도는 주의 은혜를 힘입어 죄와 육신과 세상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이기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신 채, 친히 이 모든 악을 직면하셨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고난을 겪으셨으며, 십자가로 이기신 주님이십니다.
누구의 은혜입니까? ‘주 예수의 은혜’입니다. 만유의 주권을 가지고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 주 예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이길 세력은 없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아니면 믿음과 인내하는 힘은 모두 불가능한 목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끝으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문안을 한 뒤, ‘아멘’으로 이 긴 서신을 마칩니다.


5. 교훈과 적용
이제 두 가지 교훈을 적용적으로 살핌으로써, 요한계시록 전체의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첫째는 권위의 문제입니다. 저는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권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권력, 어떤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에게도 궁극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상, 주의에도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거짓 목사들의 헛된 가르침에 미혹당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떤 정치 지도자들에게 열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정치 사상이나 철학 이론을 복음처럼 믿고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불이익과 고통이 따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왜곡하지 않고 그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권위 아래 사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이고 궁극적 권위입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 일에서 수없이 실패를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동일하게 율법 아래 태어나시고 율법을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 일을 이루셨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패할 때마다 우리는 자비하신 그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얻는 둘째 교훈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번째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배웁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갈망이나 바람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갈망과 바람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크레이그 키너는 그의 요한계시록 주석의 마지막 문단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수년 전에 나는 결혼 배우자를 위해 걱정을 하면서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형제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찬양하는 것을 들었을 때, 갑자기 나는 그리스도의 재림 보다 아내가 될 사람을 더 갈망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회개하였고 내 마음이 주님 앞에서 정돈될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하였다. 우리가 가진 어떤 갈망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참된 사랑에 대한 갈망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그 사랑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가 영원히 증거하는 그 사랑이다.”
재림을 갈망하는 신앙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 현실에 매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주의 말씀대로 세상의 형적은 다 지나갑니다(고전 7:31). 주님이 오실 때,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계 11:15).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알기에, 이 세상을 살지만 자유와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매이지도 아니하며 그것을 넘어 주의 재림을 바라보는 가운데, 자유와 여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살아갈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의 말씀의 권위 아래서 살아가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모든 짐승의 위험과 음녀의 모든 어긋난 길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주의 재림을 갈망하는 신앙으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재림의 관점에서 여러분의 현실을 인식할 때, 여러분은 당당하게 이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고 살아갈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