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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3) - 첫 표적-혼인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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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3) - 첫 표적-혼인잔치

요한복음 2: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8-10-26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번째 기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에 기록된 7개의 표적 가운데 첫번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 기적들을 기적이라는 말로 쓰지 않고 표적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11).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기적은 그냥 어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라면 표적은 그 놀라운 기적의 배후에는 매우 중요한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그냥 육안으로 기적을 보고 믿는다는 것은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기적을 믿음의 눈으로 인식하게 되면 거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교훈과 증거가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표적 기사는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잘 아시다시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 사건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왜 주님께서는 하고 많은 이적 중에서도 첫번째 이적으로 술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술을 드시는 분들을 위해서일까요? 술 문제는 한국교회에서는 참 심각한 이슈가 되어온 것입니다. 잠깐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술마시면 천국가는가? 이것은 물론 구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단지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상황에서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인식이 한국교회 초기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술 마시는 것이 천국 가고 못 가고 하는 문제가 아닐지라도, 신앙이 어린 사람들이 시험에 드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의 판단을 받지 않도록 즉 덕을 세우기 위해서 절제하는 것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물론이요, 신앙이 성숙할수록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지요? 왜 주님께서 첫 표적으로 술을 만드셨는가? 대답은 조금 더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결혼잔치에 떨어져버린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것은 주님의 사역에 대한 매우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의미를 전달해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인간의 곤경: 포도주가 떨어졌다!(3a)
이 표적기사는 즐거워야 할 혼인잔치에 기쁨을 보장하는 포도주가 끊어진데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관련을 가집니까?

A. 잔치는 벌어지지만 기쁨은 사라질 것이다(시 104:15; 전 10:19).
여러분은 이런 상황을 아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잔치들이 벌어지지만, 기쁨은 쉬 사라지고 맙니다. 잔치는 흥겨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계속되는 잔치는 없습니다. 흥겨운 잔치가 끝나고 홀로 집에 돌아왔을 때 느끼는 외로움과 허전함 같은 것을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세상에 계속되는 기쁨을 제공할 수 있는 잔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속을 보면 결혼식을 할 때, 잔치를 일주일씩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손님들에게 계속해서 포도주를 제공해야 하는데, 아마 그러던 중 포도주가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간혹 당시 유대 사회에는 결혼식에서 포도주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 경우 소송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까, 이런 것은 정말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포도주는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 104:5에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라고 했고 전 10:19에는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결혼식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기쁨이 다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기쁨은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를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나 이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 없이 자기 스스로를 온전히 기쁘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모든 인간의 곤경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B. 인간의 곤경은 축복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인간의 곤경은 사실 축복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간다고 해도, 영혼의 깊은 속은 채워지지 않고 너무나 목이 마른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축복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2. 인간의 해결 방식(3b~4)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잔치집에 흥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합니까? 요즘 같으면 어디 가서 사오면 되지만 그런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해결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 주인이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마는, 놀랍게도 이 잔치에 함께 참석했던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가가 나와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참석하신 것으로 보아, 이 결혼식은 예수님의 친척의 결혼식이었던 모양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상황에 대한 설명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12살 때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놀라운 사건 등을 통해서 예수님을 아는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께서 뭔가를 행하심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내심 기대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냥 한 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A. 인간 관계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좀 당혹스럽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은 거절입니까? 예, 거절입니다. 여기 ‘여자여’라는 표현은 무시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부인’하고 부르는 말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주님을 물었습니다. ‘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머니가 육신의 모친으로써 저와 가지는 인간적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또, ‘내 생각과 당신의 생각을 별개입니다’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마리아가 이제 어머니로써 자식에게 명령할 수 있는 그런 때는 지나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개인적 관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님께 대한 모친 마리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특별한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사라져버린 기쁨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관계로 되는게 아닙니다.

B. 인간의 선이나 좋은 뜻, 덕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
마리아가 이렇게 예수님에게 부탁했을 때에 그것은 실로 선한 뜻이었을 것입니다. 해줄 수만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의 선이나 좋은 뜻, 덕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은 인간의 도덕적 선이나 좋은 뜻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생각을 내려놓는 것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 자체로 훌륭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영적인 무지로 말미암아 이것을 혼동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고 힘들어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은 그저 좋은 생각, 도덕적 선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3. 예수님의 관점(4, 11)
주님께서 주신 대답은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관계의 우선순위를 생각하게 합니다.

A. 관계의 우선순위
예수님에게 어머니 마리아보다 더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선적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이 가지시는 더 우선적 관계 때문에 일보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언제나 ‘당신을 보내신 이’이신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우선적일 수 있는 관계는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이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심으로써 이제 마리아는 뒤로 물러나서 구주를 필요로 하는 한 죄인으로 서야 할 뿐인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모든 삶은 전에도 그러셨듯이 철저하게 자신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살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B. 때(사명)
주님은 분명히 거절하는듯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거절은 사실상 부분적인 거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의 때가 아직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때는 여러 번 나오고 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결국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그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역사가 완전하게 만족되는 순간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긴장감을 고조하면서 그 때를 향해서 전개되어 가고 있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넓게 보면 여기서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은 메시야로서 공적 사역을 시작할 때를 가리킨다고 보면 됩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서 살아가십니다.

C. 표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믿게 함
결국 주님께서는 이 표적을 행하셨는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 이것이 바로 표적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거기는 단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표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하는 모든 표적들은 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는 방법들입니다.

4. 하나님의 방법:
결국 주님은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 없던 포도주를 제공해주시는 이 일에는 사람들의 놀라운 순종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A. 믿음과 순종(5~8): ‘무엇을 명하시든지’,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 ‘끝까지’
주님께서는 하인들을 불러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7). 그러나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마리아가 먼저 하인들에게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대답을 들은 마리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대를 꺽지 아니하고 하인들을 불러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본문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기대는 ‘무엇을 명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말을 하게 했습니다. 믿음은 조건을 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무엇을 명하시든지’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는 말씀을 하자,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명하신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요구는 하인들이 늘 하던 일인 결례를 위한 항아리에 물을 채워넣는 ‘사소한’ 주문이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보통 유대인들의 집에 손과 발을 닦는 정결규례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하인들은 주님께서 뭔가 대단한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한 일을 주문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엄청난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매일 매일 삶의 자리에서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들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이 없이 ‘엄청난 일’을 할 기회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작고 사소한 일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순종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은 ‘끝까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아리에 다 물이 채워진 후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십니다. 연회장은 이 결혼잔치의 주인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나 전체 진행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하신 명령은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명령입니다. ‘물을 방금 떠다 항아리에 채워넣었는데, 그걸 떠다가 갖다 주라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떠다 갖다 주니까, 연회장은 이미 변화된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끝까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한 번 해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안잖아?’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게 되는 믿음과 순종은 얼마나 단순한 것입니까? 결코 주님은 힘들어서 하지 못할 일을, 힘에 부치는 일을 명하시지 않습니다. 하기에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이는 하기가 쉽지 않은 일들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일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만 압니다. 연회장은 어디서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나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서 보통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오고 사람들이 취해서 맛을 구분할 수 없을 때 질이 낮은 포도주를 내오는 법인데 어떻게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이제야 내오느냐고 놀라며 묻습니다. 그러나 신랑도, 연회장도 모르지만 하인들은 압니다. 혹시 신랑이 그 말을 듣고 나중에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게 아는 것과 순종을 통해서 이것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B. 충만과 넘침: 주님이 하시는 일 그리고 은혜의 특성(시 23:5; 롬 5:5; 엡 2:7; 3:8)
또 하나 이 표적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이 만들어주신 포도주의 양입니다.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라고 했는데, 여기 ‘통’은 약 9 gal. 정도의 양입니다. 그러니까, 두세 통이라고 하면 18 gal. 이나 27 gal.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돌항아리에 채워지는 물의 양이니까, 돌항아리 6개라고 하면 만들어진 전체 포도주의 양은 108 gal. 이나 162 gal.이 됩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여기서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 또는 주님의 은혜의 특성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충만과 넘침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부족하게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실 때에도 주님은 정확하게 맞추어서 양식을 만드시지 않았고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에 차게 남기도록 만들어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은혜를 주실 때, 약간 부족하게 주심으로써 나머지는 네가 해라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인색하시지 않습니다.

시편 23편에 있는 다윗의 고백을 아시지요? 그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흘러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베푸심의 특성입니다. 로마서 5:5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찔끔 하고 주신 것이 아니라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엡 2:7에서는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주님은 그저 대충 잔치를 마칠 정도의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게 아니었습니다. 다시 잔치를 처음부터 시작하고도 남을 만큼 풍성한 양의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자들은 점점 그 부요하시고 넘치도록 베푸시는 주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색함에서 관대함으로, 관대함에서 허비하듯 느껴질만큼 부어주는 사랑을 베풀게 될 것입니다.

5. 기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요 10:10; 15:11; 17:13)
이렇게 해서 곤경에 처할 뻔 했던 이 잔치는 처음보다 더 나은 기쁨으로 잘 마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 술입니까? 왜 첫 표적이 포도주를 만드신 일입니까? 이것은 소경을 보게 하는 것도,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도, 못고칠 병을 고쳐주심도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서 주신 것도 아닙니다. ‘도덕적 차원에서, 긍휼의 차원에서 그다지 꼭 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나요?’라고 묻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저 남의 집 잔치에 술 마련해주시는게 메시야의 사역이며, 그 전능하신 능력을 그런데다 사용해도 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표적, 이보다 메시야이신 주님의 사역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얼른 보면 잔치가 열리는 것 같고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진정한 기쁨은 다해 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내고 연출할 수 있는 모든 기쁨은 포도주가 떨어졌듯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냥 잔치만을 연출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혹은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야?’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이 왜 오신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그렇게 만나셨고 만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삶에 대해서 맛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이 누리시는 그 종류의 기쁨을 충만하게 경험해 보셨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표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A. 참 포도나무(요 15:1)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시편에서 말씀했는데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5:1). 주님이 우리의 모든 기쁨의 근원이 되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술이 아니고 주님이 기쁨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B. 참 기쁨이 될 포도주는 새언약의 피로 흘려질 예수님의 피다.
그렇다면, 기쁨이 될 포도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흘려주신 보혈, 곧 새언약의 피가 바로 우리의 참 기쁨이 될 포도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피로써 우리가 누리지 못할 기쁨을, 곧 다해버리고 마는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가 누리고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C. 잔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주님은 이 첫 표적으로써, 우리 모두를,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을, 삶에 지친 모든 사람들을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여기에는 결코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언젠가 다 떨어져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포도주의 기쁨이 아니라, 결코 다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으며 잃어버리지도 않을 참된 기쁨이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저 믿고 순종함으로써, 여러분은 이 잔치에 들어와 먹고 마시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