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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8). 감당할 수 없는 기쁨

빌립보서 3:1-9 / 장경진 전도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5-01

말씀내용
1.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1:4, 2:17-19, 29, 3:1)
바울은 지난 2장 후반부에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라고 하는 복음이 빚어낸 성품의 사람들을 소개하며 복음의 아름다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3장을 시작하며 바울은 빌리보 교회를 향한 실제적인 권면의 내용을 전합니다. 그 내용은 빌립보서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기뻐하라’는 것 입니다. 앞선 1-2장에서 바울은 여러 차례 ‘기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자신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누리는 기쁨(1:4), 교회의 기쁨을 위한 자신의 헌신(1:25, 2:17-18)을 전하였고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맞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2:29). 그리고 이제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서 명확하게 이 기쁨을 누릴 것을 요청합니다. 자신이 옥에 갇혀 있음에도 누리고 있는 이 기쁨이 바로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한 바울은 이제 빌립보 교회를 향해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끝으로’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지막 이야기라는 개념이 아니라, 앞서 다루었던 내용에서 이제는 새로운 단락으로 바울의 내용을 전환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 입니다. 앞서 기쁨에 대해 다루었던 여러 이야기들은 바로 빌립보 교회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명령에 대해 순종하기를 바라며 그들의 마음을 향해 들려준 이야기였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바울은 3장 1절에서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음에도 이 말은 앞선 두 장에서 나누었던 모든 이야기들과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으며, 이 반복은 수 없이 반복하고 강조해도 중요한 명령이라는 겁니다.

2. 이상한 전환(1, 2; 갈 1:7-8;)
지난번 빌립보서 2장의 후반부를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의 종되심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 후에 바울은 갑작스레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는 장면을 보며 복음의 이야기가 실제 우리 삶에 적용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전환이기에 성경에서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전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거꾸로 가장 이상한 전환이 나타나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하며 복음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전하기 보다는 갑작스레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말합니다(2). 주 안에서의 기쁨을 강조하다가 갑자기 거짓 교훈을 삼가라는 바울의 이야기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전환이고 도무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전환이 일어난 장면입니다. 2장의 아름다운 전환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대체 기쁨을 말하던 바울은 왜 이렇게 험한 말을 하며 이상한 전환을 보여줄까요? 대체 이러한 바울의 이야기는 ‘기뻐하라’는 명령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빌립보서에서 제시하는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대체 기쁨과 거짓 교훈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계심을 주며 바울은 2절에서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을 조금 살려서 표현하면 이런 겁니다. ‘똥개 조심! 범죄자 조심! 칼 조심!’이라고 외치는 겁니다. 왜 이렇게 강렬한 단어들을 사용하며 바울이 외치는걸까요? 3절에서 말하기를 이들은 예수를 자랑하지 않고,자기들의 육체에 행한 물리적인 행위가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은 갈라디아서 1장 7절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복음은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의 몸에 새긴 할례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킴으로 복음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가진 의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며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강조했습니다(갈 1:8).

3. 바울이 포기한 초고스펙 이력서(4-9;)
그런 바울은 4절부터 말하기를 자신도 육체로 말하면 신뢰할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바울의 자기 경력 증명서와 같은 것인데요. 간단하게 살펴봅시다. 그가 5절에서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자신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순수 혈통의 유대인이라는 겁니다. 이를 덧 붙이며 자신은 베냐민 지파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낸 지파의 일원이며, 남유다 왕국을 형성했던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자신은 뼈속까지 유대문화 아래서 자란 사람이라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헬라 문화 아래에서 모국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기에 영어권에서 자란 한인 2세들을 보면 영어를 사용하며 문화 역시 미국의 문화 속에서 자라지 않습니까?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유대인이지만 헬라 문화 아래서 자랐으며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던 거지요. 그러나 바울은 모국어로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는 문화적으로도 히브리인이라는 겁니다. 더불어 그가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학자였다는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박사 학위를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뿐만이 아니라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위치에 있던 지도자였습니다. 바울이 내세우는 이력서를 보면 당대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는 이력서입니다. 그의 이력서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6절 후반절에서 말하듯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자’입니다. 바울이 지니고 있는 이 엄청난 스펙, 정말 죽여주는 이력서를 가지고서 당대에 갈 수 없는 곳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사람이지 않았습니까? 유대 사회에서는 정말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엄청난 스펙을 버렸습니다. 버린 정도가 아니라 그는 이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은 이보다 훨씬 고상한 어떤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전까지 그에게 중요했던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기에 더 이상 그것들이 자신에게 의미를 줄 수 없다는 겁니다. 마치 새벽까지 밝게 빛나던 별들을 보며 밝은 별빛을 보다가 해가 떠오르는 빛 앞에서 모든 별빛이 사라지는 것 처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뛰어난 새로운 지식이 바울 자신을 사로 잡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전의 어떤 스펙도 자신을 지배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에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발견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너무도 놀라워서 이전에 바울을 지배하던 모든 것들은 이제는 해로운 것이 되었고, 심지어는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이 오늘 바울의 고백입니다. 쉽게 말해 그냥 이전의 그 모든 것들은 자기에게 ‘똥’이라는 겁니다. 이 모든 스펙과는 견줄수도 없는 엄청난 진짜 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4. 인간이 찾는 의로움, 스펙(2-9; 창 3:7;)
인간은 어떤 존재보다도 스펙을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 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훌륭한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우리가 가진 장점과 기능들을 증명해줄 수 있는 학위나 자격증들을 갖추고 우리 자신을 논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우리가 지닌 스펙에 따라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달라지며, 어딘가를 들어갈 수 있는 범위와 기준들은 훨씬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스펙을 갖추는 만큼 우리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 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혹은 어떤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러분이 지닌 스펙을 최대한 성실하게 작성하고 이를 어필해야 할 겁니다. 즉, 어딘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가 가진 경험과 능력과 기능과 성품 등 모든 면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우리의 시스템 자체가 틀렸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이 자신의 놀라운 스펙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진짜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는 이러한 스펙에 대한 이야기 너머에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스펙은 단지 우리의 취업과 학업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는 이것들을 사용하고 서로를 평가합니다. 친구를 사귀는데 있어서도 스펙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외모, 혹은 성품 등에 대해서 사람들은 우리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염려하며 자신을 가꾸지 않습니까? 하물며 연애는 어떻겠습니까? 훨씬 더 복잡해집니다. 단순히 외모와 성품만으로 연애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경제 능력과 안정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친구 관계보다 훨씬 치열하게 우리가 가진 어떤 능력들을 제시해야 합니다. ‘저를 보세요~제가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고 있는지를 보세요. 그리고 경제적으로 얼마나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지 보세요. 성품도 그럭 저럭 괜찮습니다’ 라며 우리가 지닌 스펙을 보여줌으로 연애 상대에게 어필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세속적인 것들이고 저희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런 외적인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C.S 루이스는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런 유의 속물근성이 없다고 느끼며, 속물근성에 대한 풍자를 읽으며 잔잔한 우월감을 느끼는 가운데 또 다른 형태의 욕구에 사로 잡힐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 조심스럽지만 이런 것일수 있지요. 벧샬롬교회 자체가 여러분의 스펙이 되어서 다른 교회를 너무도 쉽게 평가한다거나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복음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는 인식이 우리의 스펙이 되어있지는 않습니까? 공동체의 중요성을 지향하는 교회라는 우리의 지향점이 다른 교회와는 우리를 더 좋은 교회라고 보여주는 차별점이 되어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지향점 자체가 우리 스스로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면 실은 더욱 위험한 것이라고 C.S 루이스는 경고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이 스펙의 진짜 위험성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친구 관계, 취업, 결혼, 교회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깊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즉, 친구, 취업, 결혼 등에서만 스펙에 따라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문을 열고 닫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어떤 기준만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잘 보여주지 못했을 때, 혹은 무언가 자신이 상대에게 실수했다고 생각할 때, 상대가 원하는 만큼 자신을 맞춰주지 못했을 때, 누군가가 우리를 비판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나 자신이 그만큼 스펙을 갖추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워 합니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경멸하며 자신을 차단하는 겁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가 내세우는 기준만큼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의 스펙을 거부하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로움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원하는 만큼 의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우리는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원하는 만큼 부응하기 위해 외적인 스펙을 쌓음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게 원하는 만큼 부응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몰아 세우고 고통을 주며 책망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의로움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음을 깨닫고 스스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렸던 것 처럼 우리는 자신이 벌거 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겁니다(창 3:7). 그래서 우리 스스로 의로움을 입기 위해 애를 쓰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로움에 대한 욕구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의 스펙과 경력을 가지고 세상, 나 자신, 하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점에서 자신의 엄청난 스펙들을 나열하며 이것들의 위험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하는 겁니다. ‘이 외적인 율법의 의는 내가 흠이 없는 자 처럼 보이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짜 의로움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내가 그토록 찾던 의로움들은 배설물들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나 자신을 배설물로 칠하고 있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가 의로운 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내세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목표를 위해, 무언가에 부응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기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의로움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는 의로움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거짓말이며,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복음에서 멀어진 삶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5. 의로움에 대한 태도의 변화(갈 3:27)
이런 점에서 바울이 오늘 빌립보 교회를 향해 권면하며 주의를 주는 것은 죄의 위험성이 아닙니다. 죄가 빌립보 교회를 분열시키고 고통에 빠뜨렸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오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결국 죄이지만, 그 깊은 면에서 담긴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로움에 대한 태도입니다.
바울은 이 엄청난 스펙 속에서 찾고자 하던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의로움이었습니다.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며, 베냐민 지파이며,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며, 교회를 박해함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율법의 의’였다는 겁니다. 바울은 회심 이전에도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나쁜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 위험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그를 회심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가지고 있던 의로움에 대한 이해와 태도의 변화가 그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던 겁니다. 더 이상 자신이 추구하고 갈망하던 방식으로는 의로움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겁니다. 오히려 그렇게 추구하던 의로움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며 옭아메며 고통스럽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던 겁니다.
왜냐하면 진짜 완전한 의로움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희미하게 빛나던 별들을 보다가 태양이 떠오름으로 더 이상 어떤 빛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 처럼 진짜 의로움이 되시는 빛을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가치 있으며 진짜 자신이 찾고 갈망하던 스펙이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 열리는 의로움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이러한 의로움을 줄 수 없음을 경험하며 더 이상 다른 의로움을 찾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바울은 그래서 9절에서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함으로 나의 의로움을 쌓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발견하신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주신다는 겁니다.
바울이 배설물로 여기던 우리가 찾고 구하던 의로움으로 덕지덕지 되고 나 스스로를 치장하고 꾸미는 이 무의미한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덮여진 우리를 하나님께서 보신다는 겁니다. 끊임없이 자기의로 점철되었던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우시고 영화로우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시며 그분은 우리를 아름답다고 여겨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진노와 절망의 눈빛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맞아주신다는 겁니다. 이 세상 어느 직장도 어느 친구도 나를 받아주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아름답게 여겨주시며 맞아주신다는 겁니다.
더 이상 아담과 하와가 무화가 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리기 위해 애썼던 것 처럼 우리를 의로움으로 가리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우리가 구하는 허름한 의로움이 아닙니다. 우리를 가릴수도 없고, 결국에는 우리를 ‘자기의’라는 옥에 가두고 절망으로 이끄는 그런 옷이 아닙니다.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 우리를 발견하시고 사랑하여주시고 용납하여주신다는 겁니다.
이 아름다움을 아는 바울은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의로움을 구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의로움 안에 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것도 우리의 삶을 통제할 수 없으며, 어떤 것도 더 이상 내 삶을 고통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6. 그리스도의 의로움 안에서 누리는 기쁨
하지만 우리는 실제 삶에서 실망과 아픔을 경험합니다. 상처를 받기도 하고요. 만약 저와 여러분이 삶의 현실에서 실망과 아픔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을 구원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사랑했던 것임을 말해 줍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이 의로움을 놓는 것이 힘겨우며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본래의 위치로 돌려보내줘야 합니다. 팔일만에 받은 할례는 그냥 할례일 뿐이며, 베냐민 지파는 그저 자신의 출생이며,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그저 자신이 자란 문화이며 바리새인은 그저 자신의 학문이었을 뿐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바울의 의로움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이상 그것들이 자신의 의로움이 될 수 없기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우리의 교회가 아무리 좋은 교회여도, 우리의 자녀들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할지라도 그 어떤 것도 결코 우리의 삶을 통제할 수 없으며 우리를 망가뜨릴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던 우리의 의로움이 공격 당할 때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때때로 절망스러울만큼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고통 앞에서 구원을 잃은 것 처럼 슬퍼하며 가슴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슬픔과 절망보다 더 큰 기쁨을 볼 기회를 얻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의 자리에서 마주한 것은 슬픔과 절망만이 아니라 진짜 의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 앞에 섰음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구원으로 여기던 것들, 내가 의로움으로 여기던 것들이 더 이상 구원이 아니며 의로움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신 자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진짜 의로움이 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아름다운 존재로 용납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던 의로움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애쓰던 우리의 삶을 위해 친히 생명을 버리시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신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우리는 오직 그 안에서만 진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기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는 기쁨, 더 이상 다른 의로움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는 참된 자유와 우리 같은 존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시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로 인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누립시다. 함께 기도합시다.